[연재] 남미여행기-열아홉 번째 이야기 / 강진수

 

37.

한결 가벼운 마음과 몸으로 우리는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포토시 호수’를 둘러보았다. 우리 중 라리샤가 가장 좋아하는 동물이 바로 플라밍고였는데, 우유니 중에서도 이곳 포토시 국립공원은 플라밍고가 대규모로 서식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라리샤의 얼굴이 매우 밝고 들떠 보였다. 호숫가에 닿자마자 분홍빛으로 호수를 뒤덮고 있는 플라밍고 무리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물론 가까이 다가가면 플라밍고들이 놀라 달아나므로 그들이 놀라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투명한 호수 위로 붉게 물든 듯 노니는 플라밍고들을 보며 라리샤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다. 호숫가를 맴돌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었다. 경이로운 풍경이 나의 무거웠던 마음을 다시 한 번 덜어내 주는 것만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서 하루 종일 더러워진 몸을 씻고 식당으로 모였다. 저녁을 먹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모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와 농담을 나누다가, 로게르가 카드 게임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무조건 찬성을 한 마음 한 뜻으로 외쳤다. 자기 방으로 돌아간 로게르가 금방 카드를 찾아 왔다. 그 사이에 나는 와인 한 병과 컵을 들고 모두에게 한 잔씩 따라주고 있었다. 그리고 로게르와 에이미가 게임 방식을 알려주면서 게임은 시작되었다. 독일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게임이었기에, 에이미와 로게르가 보여주는 시범을 보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차근차근 게임을 익혀갈 수 있었다.

 

 

게임을 한창 하다 보니 서로 흥분하기 시작했다. 와인도 조금 마셨겠다, 취기도 약간씩 오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식당에 세라도 낸 듯이 왁자지껄 신나게 떠들며 게임을 계속 했다. 동맹을 만들어 누구를 공격하기도 하고, 갈가리 분열되어 자기 잇속을 챙기려다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모두 아이가 된 것 마냥 서로를 놀리고 격분하고 웃는 와중에 가이드가 슬쩍 우리에게로 왔다. 정말 즐거워 보여 망설여지지만 저녁을 준비해줘도 괜찮으냐는 것이었다. 오늘의 저녁은 죽과 약간의 고기와 채소, 그리고 파스타였다. 이미 와인 한 잔으로 입맛을 한껏 돋궈놓은 상태였기에 우리는 매우 허기가 졌다. 접시를 놓고 음식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껴 놓았던 두 번째 와인의 코르크를 열었다.

식사를 다 마치기도 전에 와인이 모두 동 나버렸다. 우리는 차분히 식사를 모두 마치고 상을 치운 다음, 다시 카드 게임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와인이 없는 채로 하려니 게임이 심심하게만 느껴지게 되었다. 결국 아까 와인을 한 병 깨뜨린 주범인 내가 새 와인을 하나 사오기로 했다. 내가 계속 그 일로 양심에 걸려하는 것도 있었고, 아무래도 우리 모두에겐 술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숙소 밖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술을 파는 가게가 하나 있다고 했다. 나 혼자 가겠다고 하니, 위험하다고 형이 따라나서고, 에이미도 같이 가겠다고 해, 세 명이서 사이좋게 팔짱도 끼고 밤길을 걷게 되었다.

 

 

한밤중의 우유니는 정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하다. 호수가 분명 지척에 있는데 어둠에 덮여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세 명은 랜턴에 의지하며 겨우 한 발씩 내딛었다. 가게는 조그만 오두막이었는데 대문이 잠겨 있었다. 오두막 안은 불이 켜져 있음에도 문이 잠겨 있으니, 사람이 혹시 있지 않을까 창문 너머로 건물 안쪽을 살피며 문을 두드렸다.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셔서 우리를 맞이했다. 스페인어 담당 에이미가 있었기에 와인을 사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값을 잘 치르고 와인 두 병을 조심히 모시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와인 병이 깨질까 걱정하느라 땅만 보고 걷다가, 숙소 앞에서야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에이미와 형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는 밤하늘과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의 향연을 나는 기억한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별빛은 선명하고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와인을 더 사길 잘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우유니의 밤하늘 밑에서 어떻게 맨 정신으로 감히 견딜 수 있을까.

 

 

38.

지루할지는 모르겠으나, 이 날의 밤을 좀 더 길고 자세하게 늘여놓아 보고자 한다. 우유니에서의 마지막 날 밤은 남미여행 중에 정말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새로 사 간 와인은 언제나 그랬듯이 카드 게임 도중에 금방 또 동이 나버렸다. 하지만 이미 취기도 꽤나 올랐겠다, 게임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조금 있다가, 우유니의 전력 사정으로 인해 식당의 불이 나가버렸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식탁을 지키고 앉아 실컷 수다를 떨었다. 레오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산다기에, 우리 일정의 마지막에 그곳으로 가면 방을 내어달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독일에 가면 에이미네 집에서 머물기로 하고, 스위스로 가면 로게르와 라리샤가 자신들의 소파를 기꺼이 내어주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에 나 역시 한국에 이들이 오면 반갑게 맞고 대접할 것을 약속했다. 너무 불확실하고 허황될 것만 같은 약속이지만, 우리가 이런 약속을 서로에게 되새길 정도로 그만큼 함께 보낸 이틀의 시간은 정말 길면서도 짧았다. 그리고 서로를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식당의 불이 완전히 꺼지고, 이젠 씻고 잠에 들어야 할 시간이 왔다. 우유니에 밤은 순식간에 찾아와 깊어진다. 숙소 안까지도 캄캄해진 시간, 전등이 나간 화장실에 랜턴으로 겨우 불을 비춰 세안과 양치를 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숙소 바로 바깥에 에이미가 이상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에이미는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까 와인을 사러 갈 때 보았던 밤하늘은 더욱 그 오묘한 색을 더하고 있었다. 에이미는 그 우유니의 밤 한 가운데에 떠있는 달을 찍고 있었다. 나와 에이미가 바깥에 있는 모습을 본 팀원들은 모두 하나 둘 홀린 듯 바깥으로 나왔다. 달은 밝았고 그 주변으로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깊은 어둠은 약간의 보랏빛으로 빛났고, 파랗게 반짝이는 별들이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무슨 말을 해야 그날의 밤하늘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무언가에 여전히 홀린 듯이 늦은 시각 밤하늘을 마주보고 가만히 서 있던 것이다.

그 가만히 서 있던 시간들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행복했을 것이다. 항상 입으로 떠들기만 했던 우유니에 도착했고, 그곳을 즐겁게 여행하며, 어느새 그 여행의 끝자락에서 선명한 달과 은하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거대하고 신비로운 우주 앞에서, 나는 팀원들과 차례로 포옹을 했다. 그 중에서도 에이미는 나를 가장 꼭 힘 있게 껴안아 주었다. 아직도 그 말 없던, 그 힘차고 따뜻한 포옹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만난 누구와 내가 마주한 공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걸까. 여행은 이렇기에 다니는 것일까. 은하수에서 작은 별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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