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학살 베트남 민간인 지금까지 집계된 것만 9000여명 추정”
“한국군 학살 베트남 민간인 지금까지 집계된 것만 9000여명 추정”
  • 한성욱 선임기자
  • 승인 2018.12.0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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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상임이사-1회

 

1955년 최초 발발했던 베트남전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남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 정부에 반대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무대도 남베트남에 한정돼 있었고, 북베트남으로는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던 내전이었지만, 1960년 미국이 개입하면서 확산됐다. 1965년 미국이 한국정부에 전투 병력을 공식요청하면서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백마부대 등 종전 때까지 32만 명이 파병됐다. 한국군 전사자는 5000여 명에 달했다. 1975년에 종전됐으나,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유가족의 고통과 눈물은 지금도 가시지 않고 있다.

베트남전쟁이 남긴 문제 중 대표적인 것이 고엽제와 학살(Massacre)이다. 고엽제 피해자 문제도 그렇지만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은 특히 심각한 문제다. 종전 후 국제사회가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인 전쟁이었다고 비난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여론이 들끓었다.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상임이사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 상임이사

최근엔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밀라이 학살과 빈호아 학살, 퐁니·퐁넛 마을 학살, 하미 마을 학살 등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민간인학살’이란 표현이 쓰이고 있다. 이로 인해 선량한 백성이나 민간인이라도 죽여도 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학살 사건의 진상이 속속 밝혀졌고 미국과 한국에서도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미국도 정부 차원의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한국정부는 아직까지 미지근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베트남전쟁은 반인륜적이었고 학살의 피바람을 몰고 왔다. 학살은 복구할 수 없는 영원한 상처를 남긴다. 회복이 불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고 기록하고 역사에 남겨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다.”

구수정 '한국-베트남 평화재단'(한-베 평화재단) 상임이사는 베트남을 돕는 것이 곧 국익이라고 말한다.

1993년 베트남 호치민(胡志明)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문제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던 1997년 어느 날, 베트남 전쟁 중에 벌어졌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관련문서를 처음으로 접하게 됐다.

“문서 제목도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었다. 섬뜩했다. 1980년 초중반의 문서로 보였는데 내용이 너무 잔혹해서 믿기 어려웠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반신반의 했다.”

베트남 역사와 전쟁사를 연구했지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구 이사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노근리 학살'도 1999년 한국 사회에 공론화되었을 때 처음 알았다고 말한다. 문서를 접한 이후부터 그의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1999년부터 여성으로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깊이 있게 다뤄온 구수정 상임이사를 서울 옥수동에 있는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잊혀 졌으나 잊혀 지지 않은 전쟁, 베트남전쟁 중에 희생된 민간인들과 유가족, 한국정부의 사과와 배상, 한국과 베트남의 정치경제적 미래관계 등을 짚어보았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 한-베 평화재단이 만들어진 계기는.

▲ 공식적으로는 지난 2017년에 설립돼 1년 반이 지났지만, 이미 1999년부터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 운동을 해왔다. 내년이면 20주년을 맞는다. 한-베 평화재단은 이러한 한국 시민사회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졌다. 1998년 베트남 유학중일 때, 일본의 한 시민단체인 ‘피스보트’(Peace Boat. 크루즈 선을 이용, 인류평화프로그램을 실천하는 국제비영리단체)에 탔던 한 일본인이 이런 말을 했다. 그런데 당신들은 일본을 두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데 당신들도 베트남에서 저지른 과오를 전혀 모르지 않느냐’고 하더라.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학살과 관련한 자료들을 통해 확실한 검증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1999년 초부터 학살 마을지역을 찾아다니며 한국군 증오비와 위령비를 목격했고, 피해자 유족들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학살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나.

▲ 베트남 유학 중에 석사논문으로 베트남전쟁, 특히 미국의 베트남전쟁 시기를 다뤘는데,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연구’가 주요 의제였다. 93년부터 머물면서 베트남 역사와 전쟁사를 연구했지만,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그러다가 1997년에 우연히 문건 하나를 접하게 됐다. 제목이 ‘남베트남에서의 남조선 군대의 죄악’이었다. 섬뜩했다. 당시에는 한국군을 ‘남조선군대’ 또는 ‘따이한’, ‘박정희 군대’라 불렀다. 1992년 수교 이후부터 ‘한국’으로 부르지만, 문서에는 ‘남조선군대’로 표기되어 있다.

 

- 문서 분량은.

▲ 출처와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40페이지 분량으로 1980년 초중반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군의 민간인학살 문건을 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기록내용을 봤을 때 너무 잔악해서 믿기 어려웠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 반신반의 했다. 이 문서가 작성될 당시 베트남은 경제적으로 최빈국이었고 종이를 만드는 제지산업도 열악했다. 컴퓨터가 없던 때였기 때문에 글자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것도 복사본이었다. 잉크도 녹색잉크를 쓴 것 같았다. 복사 상태가 너무 흐릿해 원문을 읽거나 번역하기가 어려웠다. 원본도 습자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는 타자기에 녹색잉크를 써서 습자지에 치던 시기였다. 판독이 불가능했다.

 

- 번역이 어려웠을 텐데.

▲ 베트남 문자는 성조가 있어서 글자가 흐릿하면 외국인이 판독하기가 거의 어렵다. 내용을 슬쩍 봤지만 읽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가장 친했던 베트남 친구에게 정확한 필사를 부탁하면서 문서를 넘겨주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무슨 일인지 한 달여 동안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학과 사무실과 아는 친구들에게 수소문해도 알 길이 없었다. 문서를 되돌려 받으려했지만 행방도 묘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사는 집 문 앞에 사본하고 필사본이 놓여 있는 것이다. 친구가 몰래 놓고 갔는데 나를 만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다.

▲ 아마도 나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고 한국에 대한 감정 통제가 안됐던 것 같다. 저도 1999년에서야 한국전쟁 중 미군의 노근리 학살 사건을 처음 알았다. 미군이 그랬으리라고는 전혀 상상 못했으니까. 그 친구도 혈기 많은 젊은 청년이었고 학살문서를 처음 보면서 주체 못할 만큼 충격이 컸을 것이다.

 

- 베트남 사회가 학살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

▲ 당시 베트남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크게 다루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한번은 호치민시 청년문화회관에서 ‘베트남 청년들과 구수정과의 만남’이란 프로그램을 마치고 사인회를 가졌다. 사인 받는 줄이 줄어들고 마지막 청년이 다가왔는데, 행방불명된 바로 그 친구였다. 내 앞에 와서 ‘사실은 내가 꽝응아이성 출신이다’라는 말만 하고 가버렸다. 꽝응아이성은 베트남 중부에서 한국군이 전투를 벌이던 5개 성 중의 하나다. 이곳은 한국군 전투부대 주둔지였고 학살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도 놀랐다. 그 뒤로 그를 영영 만나지 못했지만, ‘이 친구도 나처럼 충격을 많이 받았구나…’ 필사를 하면서 학살의 진실을 깨달았을 것으로 짐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을 잘 안다.

 

- 학살이 일어났던 오지마을들을 일일이 찾아 다녔다는데.

▲ 학살이 일어났던 마을들을 찾아간 것은 여성으로서 내가 처음일 것이다. 학살문제는 나에게 뭔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런데 당시 산간 오지마을에도 한국기업들이 속속 진출해 도로를 놓은 것을 많이 보았다. ‘어? 분명히 이 기업의 한국인들이 나보다 먼저 왔는데, 어째서 마을의 학살위령 비를 모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로를 놓았던 사람들은 한국남성들이었을 텐데, ‘왜 아무도 민간인학살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까?’ 그런 번민이 많았다. 여성으로서 볼 때, 남성들은 ‘전쟁이란 그런 거지. 아이와 여성들도 죽는 게 전쟁이지’ 이렇게 생각했을 거 같다. 군대를 갔다 온 한국남성들 대다수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전쟁이지만 어떻게 이토록 많은 여성과 어린애, 노인들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번민이 많았다. 오히려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다르게 받아들였고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한다는 각오를 하게 됐다.

 

-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은 어느 정도인가.

▲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민간인은 지금까지 집계된 것만으로도 약 9,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이런 사건은 멀리는 1947년 제주4·3항쟁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나 1950년 6·25전쟁 때 이승만 군대의 보도연맹학살, 가깝게는 1980년 광주항쟁 때 되풀이 됐다. 이 모든 학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빨갱이’라는 이유다. 빨갱이면 갓난아이도, 임신한 여성도, 노인도, 그렇게 죽여도 되나. 아무나 죽인 뒤 빨갱이로 몰아 버린 것은 아닌가. 빨갱이면 그렇게 무참하게 죽여도 되나. <2회로 이어집니다.>

 

구수정 상임이사는…

1989년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1993년 베트남 유학
2008년 호치민국립대학 베트남 역사학 전공[석사⋅박사]
現 한-베 평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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