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기획]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살아보기 / 이석원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 전시실 ; 미술관은 1500년대 작품부터 현대의 작품까지 연대순으로 전시실이 나눠져 있다.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 전시실 ; 미술관은 1500년대 작품부터 현대의 작품까지 연대순으로 전시실이 나눠져 있다. (사진 = 이석원)

북유럽 국가들의 실질적인 중심이고, 사실상 북유럽의 종주국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스웨덴이지만, 한국에서도 이름이 높은 그 곳 출신의 예술가는 거의 없다.

스웨덴으로부터 640년을 지배받은 핀란드도 ‘핀란디아’로 유명한 음악가 시벨리우스가 있고, 마찬가지로 100 여년 동안 스웨덴의 연방이었던 노르웨이에는 ‘페르 퀸트’의 작곡가 그리그와 ‘절규’의 화가 뭉크도 있다. ‘인형의 집’의 극작가 입센도 노르웨이 출신이다.

스웨덴과 함께 북유럽의 강력한 지배자 역할을 하던 덴마크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이다. 그런데 유독 스웨덴에는 알만한 예술가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스웨덴은 북유럽의 중심인 것은 분명하다. 단지 인구가 다른 나라의 2배가 넘는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스웨덴은 북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고, 또 그 한가운데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이 있다.

2013년부터 공사를 시작해서 지난 10월에 재개관한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Stockholm National Museum). 참 오래 기다렸다. 부근을 지나갈 때마다 언제 공사가 끝나나 안달했고, 지난 봄인가? ‘10월에 재개관한다’는 안내가 붙은 것을 보고는 또 한참을 기다렸는데….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전경 – 석양 :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지는 햇살을 받은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이 노랗게 채색되고 있다.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전경 – 석양 : 저녁 노을이 질 무렵 지는 햇살을 받은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이 노랗게 채색되고 있다. (사진 = 이석원)

북유럽 최대 미술관이니, 몇 십만 점의 전시물이 있느니 등등의 소개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램브란트와 루벤스, 세잔과 부세 등의 위대한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말도 ‘유럽 주요 도시의 미술관이 대개 그렇지’ 정도로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가면 스웨덴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칼 라르손(Carl Larsson)과 18세기 초상화의 대가 알렉산데르 로슬린(Alexander Roslin), 음흉하고 능청스런 안데르스 소른(Anders Zorn)을 만날 수 있다. 한국 대중들에게는 아직 익숙한 이름이 아닐지는 모르지만, 가장 스웨덴다운, 스웨덴의 색깔과 정서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은 화가들이다.

옛 해군 기자였던 쉡스홀멘(Skeppsholmen)으로 들어가는 길목, 스웨덴 왕궁의 건너편 단아하게 놓인 국립 박물관 건물은 낮지만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그 오랜 시간 이 앞을 지나다니며 한동안은 장막에 싸여, 그러다가 아름다운 자태에 공사의 흔적 살짝 새겨 부끄럽게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제 그 화려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자태를 고스란히 뽐낸다.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이 처음 개관한 것은 1792년이다. 구스타브 3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소장품들을 모아 스웨덴 왕궁 한쪽에 왕립 미술관을 만들었다. 그러다가 독일 건축가 프레드리히 스튈러(Friedrich August Stüler)가 북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1844년부터 1866년까지 22년에 걸쳐 지금의 미술관을 건립했다.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전경 – 호수 배경 – 멜라렌 호수에서 바라본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전경 – 호수 배경 – 멜라렌 호수에서 바라본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사진 = 이석원)

루벤스부터 램브란트와 세잔, 부세와 샤르댕에 이르는 유럽의 명화들로 가득 채워졌던 곳.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미술관이 위대한 것은 칼 라르손과 알렉산데르 로슬린, 그리고 엔데르스 소른이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시선을 압도하는 좌우로 난 계단, 그리고 그 계단의 벽면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칼 라르손의 프레스코화. 라르손의 향기를 음미하며 계단을 오르면 다시 정면의 계단과 그 머리 위 또 다른 라르손의 프레스코화 ‘구스타브 바사의 스톡홀름 입성 1523’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맨 꼭대기 층에 올라서 뒤를 돌아봐야 만나게 되는 그림 ‘동지 희생(Midvinterblot)’. ‘동지 희생’은 고대 북유럽에서 동지에 행해지던 인신공양의 종교의식이다.

이 그림이 이 자리에 놓인 것은 기구한 사연과 함께 거의 80여 년만의 일이다.

국립 미술관 측에서는 중앙 홀 사면 벽 중 3면에 프레스코화를 그려달라고 라르손에게 청탁한다. 한 면만 빼고. ‘구스타브 바사의 스톡홀름 입성 1523’까지 완성한 라르손은 그 맞은 편 벽에도 자신의 그림을 넣고 싶었고, 1915년 6.4m×13.6m 크기의 ‘동지 희생’을 완성한다. 하지만 국립 미술관 측은 거절한다. 스웨덴의 화단도 문제가 많은 작품이라며 반대한다. 라르손은 무척 애썼지만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1983년 이 그림은 스톡홀름에서 전시돼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그림의 소유자는 ‘그 벽’에 이 그림을 걸어준다면 무상으로 기증하겠다고 제안한다. 그런데 국립미술관은 이 또한 거절한다. 그리고 1987년 이 그림은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 일본인에게 팔린다.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 칼라르손 : 미술관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면 벽면을 채우고 있는 칼 라르손의 ‘동지 희생’. 80여년을 돌고 돌아 그 자리에 놓이게 됐다. (사진 = 이석원)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 칼라르손 : 미술관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서서 뒤를 돌아보면 벽면을 채우고 있는 칼 라르손의 ‘동지 희생’. 80여년을 돌고 돌아 그 자리에 놓이게 됐다. (사진 = 이석원)

다시 1992년. 국립 미술관은 개관 200주년 기념으로 칼 라르손 헌정 전시회를 열었고, 일본에서 대여한 이 그림을 다시 전시했다. 스톡홀름 시민 뿐 아니라 전 유럽에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몰린 사람들이 수십만에 이르자 스웨덴 여론이 움직였다. 이 그림을 되찾아야 한다고. 그리고 라르손이 원했던 그 자리에 이 그림을 놓아야 한다고.

1997년 ‘동지 희생’은 스톡홀름으로 돌아왔고, 80년 전 라르손이 그토록 소원했던 그 자리에 놓였다. 라르손 최대의 역작으로 꼽히는 '구스타브 바사의 스톡홀름 입성 1523'과 '동지 희생'은 그렇게 마주보게 된 것이다.

국립 미술관에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화가는 안데르스 소른이다. 그림과 사진 모두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였고, 초상화의 대가로 인정받아 미국 대통령 3명의 초상화를 그렸던, 자신의 모델 모두와 염문을 뿌렸던 바람둥이 소른은 죽으면서 자기 작품 모두를 국립 미술관에 기증했다.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은 스톡홀름 시민은 물론, 스톡홀름을 방문한 다른 스웨덴 시민들도 5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온 공간이다. 또 유럽의 다른 나라 여행자들도 이곳 들리는 것을 빼먹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아직은 낯선 스웨덴의 예술가들일지 모르지만, 스웨덴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회화를 바로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이석원 님은 한국에서 언론인으로 일했습니다. 지금은 스웨덴에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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