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남미여행기-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 강진수

 

53.

새벽 일찍 일어나 출발하려던 우리는 당연히 실패했다. 텐트 안에서의 첫 잠을 설치기도 했고, 체력이 동나 상당히 노곤한 몸 탓이었다. 아침 8시 즘 일어나자 이미 주변 다른 텐트들은 전부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들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을 간단히 챙겨먹고 텐트를 고이 접어 다시 배낭 위에 짊어 맸다. 9시가 조금 넘어서 바로 먼 길을 떠났다. 드디어 제대로 된 트래킹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파이네 그란데에서 이탈리아노 산장, 브리타니코 전망대를 거쳐 로스 쿠에르노스 산장에 도착하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대략 20 킬로미터 정도 되는 상당한 거리였는데 우리는 이때 충분히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트래킹의 난이도를 매우 간과한 대가는 나중에 치러야 했다. 파이네 그란데를 떠날 때는 몸이 가볍기에 쉽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조금만 가보자 나타나는 무자비한 돌길에 금방 발이 피로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풍경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저 멀리 우리가 떠나온 산장과 그곳을 감싸는 산, 호수가 아름답게 반짝거렸고 하늘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가끔씩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새들의 지저귐이 우리는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 꿈에만 그리던 길을 드디어 우리가 마주하며 걷고 있다.

국립공원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의 경로를 택한 것은 따로 이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동쪽보다는 서쪽의 길이 더 난이도가 낮았기에 체력을 보강하며 걷다가 동쪽을 올라갈 때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풍경이 더더욱 아름다워진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가장 멋있는 구경을 나중으로 아껴두고 싶은 마음이 컸다. 파이네 그란데에서 이탈리아노 산장으로 가는 길은 다행이 처음부터 험하진 않았다. 여유롭게 걸을 수 있는 정도의 경사였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고 점점 산의 안쪽으로 들어서자 길은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길이 험해지자 문제는 배낭의 무게였다. 배낭에다가 텐트까지 짊어지니 무게가 20 킬로그램은 거뜬히 넘었다. 게다가 갈증이 날 것을 대비해 물도 가득 채워서 떠나니 그 무게가 상상을 초월했다. 두 시간째 산을 걷자 물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가방은 그만큼 가벼워졌음에도 가벼워진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체력이 대신 깎여나가고 만 것이다. 몸이 무거워지다보니 등산 막대가 필수적임을 깨달았다. 이곳에 오르기 전, 굳이 등산 막대가 필요할까 우리는 고민했는데 사실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등산 막대는 반드시 빌리거나 사서 트래킹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험한 돌길에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가득 채워 온 물을 모두 마셔버렸지만, 별로 걱정할 것은 없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는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곳이기에 이곳의 개울물은 언제든 떠다 마실 수 있다. 그만큼 깨끗하고 맛도 좋다. 물론 더러워진 물인지 아닌지 잘 보고 깨끗한 개울물을 찾아 떠다 마셔야 한다. 그런 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등산객들이 머물러 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물을 떠 마시며 지친 등산객들은 서로를 위로해준다. 어쩔 땐 영어로, 어쩔 땐 스페인어로.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이젠 얼굴만 봐도 누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게 가장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완벽히 대화하지 않아도 서로 친구가 되고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 고독해지기 십상인 산길에서는 더욱이 그런 순간들이 소중하다. 숨이 차오르며 헉헉거리다가도 잠시 구석에 앉아 쉬며 짤막한 대화들을 나누고 위안을 얻다보면 금방 이곳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은 마냥 용기가 난다.

세 시간 즈음 지나 점심시간이 되자 이탈리아노 산장이 가까워졌다. 우리가 머물 산장은 아니었지만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점심을 해먹기로 했다. 그림 같은 산 속을 헤치자 큰 계곡과 흔들다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꼭 동화 속에 들어온 듯 흔들다리를 건너면 아름다운 고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계곡의 세찬 물소리를 뒤로 하고 다리를 무사히 건너자 기대한 고성 대신 허름한 산장이 등장했다. 드디어 잠시 쉴 수 있다, 당장 짐을 풀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점심이라고 해봤자 어제와 같이 하몽과 치즈를 넣은 보잘것없는 샌드위치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이미 바닥난 체력에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한 끼 식사였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나니 벌써 시간은 한 시를 한참 넘었고, 우리는 해지기 전에 오늘의 캠핑장에 도착해야 했기에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가 머물 로스 쿠에르노스 산장은 이탈리아노에서 약 7 킬로미터의 거리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기왕 이탈리아노를 온 이상 브리타니코 전망대에 우린 오르기로 했다. 멀리서부터 눈에 들어올 만큼 거대한 성벽처럼 하늘을 받치고 있는 브리타니코에 오르면 토레스 델 파이네의 전경을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무거운 짐들은 산장 구석에 보관할 수 있었다. 누군가 물건을 훔쳐가지는 않을까 늘 걱정하며 다닌 남미 여행길인데, 이곳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바쁘고 지친 등산객일 뿐이기에 그저 사람들이 이미 짐을 풀어놓은 곳에 무덤처럼 자기 짐을 쌓아놓고 길을 떠나면 된다. 지켜보는 사람은 전혀 없지만 그 누구도 그 짐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등산객들의 짐을 뒤져봤자 무슨 귀중품 따위가 나올까.

 

54.

배낭 없이 달랑 등산 막대만 들고 브리타니코를 오르니 날개가 달린 듯 한결 몸이 가벼워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미끄러운 돌길에다가 설상가상으로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지는 최악의 환경이었지만 일단 배낭을 덜어내고 나니 우리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했다. 산봉우리에서 흘러나오는 계곡을 따라 위태로운 돌길은 계속 되었다. 길가에 매달린 로프에 의지해 산을 오르는 것은 물론, 심지어 길이 없어 함께 오르던 사람들과 한참 맞는 길을 찾다가 오르곤 했다. 등산 막대는 단단한 돌에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계속 올라가도 가파른 바위 길은 끊이질 않았다. 이탈리아노 이전까지의 길이 가파르더라도 흙길이어서 부드러웠던 반면에, 브리타니코 가는 길은 험하고 위험한데다가 온통 바위뿐이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껏 가볍게 바위들을 뛰어넘으며 앞선 등산객들을 제치고 빠른 속도로 정상을 향했다. 정상 부근으로 갈수록 바위와 절벽들은 그 무시무시한 자태를 뽐냈으나, 시간도 여유도 없는 우리에게 그런 것은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해가 지게 되어 로스 쿠에르노스에 닿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큰일 중의 큰일이다. 길을 알아볼 수 있을 때 얼른 브리타니코를 다녀와 목적지로 향해야 했다. 그런 근심을 가득 안고 정상에 오른 순간, 모든 걱정들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약간의 구름이 낀 날씨였지만 그게 무색할 만큼 광활하고 아름다운 토레스 델 파이네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거대하고 청명한 호수를 신비로운 산봉우리들이 곳곳에서 감싸고 있는데, 정상에 올라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에서도 산을 많이 다닌다고 다녀봤지만, 이런 풍경은 생전 처음이었다. 꼭 전설 속에서 내려오는 비밀의 땅을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른 게 아니라, 이들이 나를 불렀구나. 숲과 바람이, 땅과 호수가, 하늘과 구름이, 그리고 이 신비의 한가운데 함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불렀구나. 하늘이 천천히 내 머리 위로 내려앉을 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라고밖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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