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지 말고 즐기자!
책, 읽지 말고 즐기자!
  • 김혜영 기자
  • 승인 2019.06.27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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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서울국제도서전에 가다-1회] 김혜영

페스티벌의 계절인 여름, 풍성한 음악이나 흥겨운 춤 없이 오로지 책으로 가득한 축제가 있다. 6월 19일부터 23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이다. 이틀 동안 한국에서 가장 큰 책 축제를 다녀오며, 그 후기와 감상을 두 편에 걸쳐 풀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1편은 나의 독서 이야기를 포함한 도서전 방문기가 될 것이고, 2편에서는 현장에서 들은 과학 강연을 함께 나눌 계획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독서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일상을 살고 있다. 서울국제도서전을 방문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은 수업용 교재를 사는 것만으로 잔고가 빠듯한데다가 여가 시간까지 머리를 써가며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부터 자동차까지 온갖 정액제 서비스가 제공되는 시대에 제 값을 주고 종이책을 사는 일은 어쩐지 사치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언제 어디서든 꺼내 읽을 수 있는 나만의 종이책을 갖고 싶었다. 언제까지 읽어야 한다는 제한 없이, 도서관이 아닌 내 방 한 구석에서, 눈동자만 굴리지 않고 종이를 직접 만지고 넘기면서 독서를 하고 싶어진 것이다. 읽고 싶은 책이 생겼다기보다는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그리움을 느꼈다.

옛말에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교내 교지편집위원회에 들어가 책을 직접 출판하다보니, 디자인과 재질까지 관심이 생겨 책을 한 권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문제는 독서가 아닌 수집이 목적이자 취미가 된 것이다. 책을 읽고 싶다는 충동은 매번 강력했지만 짧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쉬고 싶다는 열망이 늘 이겼다. 더 이상 사지 말고 이미 구입한 책을 빠르게 읽어치워야 한다는 부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독서모임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지만, 곧 책과의 거리감을 좁히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톰 소여와 모험을 떠나고 안네와 일기를 쓰느라 밥도 걸렀던 어린 시절의 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강연
강연

책을 소장하고 구경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 또한 나쁜 일이 아니다. 허영심에서 우러나온 소비이든, 인테리어 소품으로의 전락이든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은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요즘 시대에 참 고마운 일이다. 그래서 책을 해야 하는 일 목록에 두지 않고 좋아하는 것의 영역에 넣었다. 책 굿즈인 예쁜 책갈피와 엽서를 책상에 꾸며두고, 침대 옆 협탁에 다른 종류의 책을 세권씩 올려놓았다. 일상을 보내다 책을 읽고 싶어지면 바로 손을 뻗어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도서전도 그런 마음으로 방문했다. 아는 것이 없어 주눅이 들 수 있고 읽을 자신이 없어 망설일 수 있지만, 책이 가득한 곳에서 책만 실컷 구경하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서울국제도서전은 1954년 전국도서전시회로 시작해, 95년에 국제도서전으로 격상된 역사를 지녔다. 올해는 25회를 맞아 출현(Arrival)이라는 주제로 5일간 열렸다. 단순하게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지만, 교육을 위한 정보를 얻거나 쉽게 접할 수 없는 출판물도 만날 수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다. 책을 사고파는 상업 공간이면서 책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모두가 연결되는 축제인 것이다. 책을 구입할 목적이 아니라면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박물관이나 전시회, 플리마켓을 구경한다는 느낌으로 가도 좋다. 대형 출판사의 거대 프로젝트부터 독립출판물과 세계출판물, 첫 선을 보이는 책들과 다양한 굿즈, 책 관련 프로그램과 전시까지 마련되어 있다. 앞으로도 열릴 도서전에 함께 가자고 초대하기 위해, 올해는 어떤 풍경이 펼쳐졌는지 찬찬히 소개해보겠다.

 

출판의 자유 - 대나무 숲의 유령들 전시
출판의 자유 - 대나무 숲의 유령들 전시

올해 도서전의 하이라이트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출현’이라는 주제 강연, 출판의 자유를 다룬 세미나와 전시, 아시아 독립출판물과 토크쇼, 오픈키친이다. 주제 강연은 우리 사회에 새롭게 출현한 이야기와 출판 콘텐츠에 관해 5일 동안 매일 하나씩 이루어졌다. 첫 날은 한강 작가가 종이책과 문학을 이야기하고, 둘째 날은 정우성 배우와 유엔난민기구 한국 대표가 새로운 이웃인 난민의 출현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 외에 물리학자와 철학자, PD까지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사가 무료로 강연을 진행했다. 사전에 신청하지 않아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강연장이 폐쇄된 공간이 아닌 부스 형식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려도 강연을 들을 수 있다. 필자는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의 강연을 들었는데, 우연히 참석했다 깊은 감명을 받아 다음 편에 자세히 소개하려 한다.

‘출판의 자유’는 세미나와 전시로 구성되었다. 두 편에 걸친 세미나는 세계의 출판인들과 연구자들이 모여 출판 탄압의 역사를 살펴보고, 자유 수호의 가치와 운동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일일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5일 내내 자리를 지킨 특별전시는 잠깐 시간을 내어 관람할 수 있었다. ‘금지된 책: 대나무 숲의 유령들’이라는 이름을 내건 전시는 현대미술과 금서를 접목해 출판 역사의 현장을 새롭게 조명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최근의 블랙리스트 사단까지, 권력에 의해 금지된 책들과 검열의 정치를 살펴보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훑을 수 있었다.

 

오픈키친
토크쇼
토크쇼

아시아 독립출판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 일본, 중국, 태국의 6개국이 독립출판물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프로젝트다. 외국어를 알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각국의 독립출판 대표가 진행하는 토크쇼도 있다. 무엇보다 아시아 독립출판이 도서전에서 가장 큰 부스였기에 현 출판 시장과 문화에서 독립출판물이 갖는 의미를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한국 부스는 개인의 창작물부터 일러스트레이션과 만화, 페미니즘과 LGBTQ를 주제로 한 출판물까지 폭넓게 자리했다.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픈키친은 이욱정 PD를 필두로 셰프와 작가들이 음식시연과 강연을 맡아 진행하고, 시식과 쿡북 전시까지 이루어졌다. 요리와 음식이 콘텐츠 업계의 트렌드가 되고 레시피를 담은 쿡북의 시장도 넓어지고 있기에 시의적절한 프로그램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책을 출판한 대전의 ‘성심당’에서 빵을 팔며 북토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전시를 둘러보다 지칠 때쯤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어 즐거웠다.

그 외 주빈국으로는 헝가리가 있었고, ‘스칸디나비아 포커스’에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도 참석했다. 작가와의 만남은 SF 소설과 새로운 젠더 감수성, 그림책 등을 다루며 비주류에 속하는 문화를 조명했다. 팟캐스트 공개방송과 3분 동안 소설을 써주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청소년이 출판에 도전할 수 있는 프로젝트까지 다양하고 알찬 구성이었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은 그야말로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축제다. 책 한 권을 샀을 뿐인데 온갖 노트, 엽서, 펜, 스티커, 쿠키 등이 함께 오고, SNS를 구독하면 잡지 한 권을 무료로 받기도 한다. 평소에 관심이 없었던 분야의 책이나 점자도서도 만나볼 수 있고. 아름다운 문장을 책갈피로 소장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한강 같은 유명한 작가의 사인회가 열리면 사람들이 몰리지만, 그 작가가 혼자 전시를 둘러보고 있으면 따라붙어 번거롭게 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도서전은 셀럽과 일반 참가자가 구분되거나 따로 무대가 마련된 파티가 아니라 모두의 축제다. 아이들이 읽을 책과 참고서까지 교육 분야도 있어 가족 단위나 학생들도 방문한다. 다양한 프로그램과 먹을거리 덕에 다른 페스티벌처럼 신나게 즐길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독서습관이 없는 사람도 책과 출판을 더욱 사랑하게 된 시간이었다. 혼자 방문해도 보고 듣고 느낄 것이 많은 축제이기에 많은 이들이 방문해서 책을 사랑하는 이 커뮤니티가 더욱 성장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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