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귀인
‘행복한 라짜로’,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귀인
  • 정민아
  • 승인 2019.07.0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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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뉴스지금여기] 정민아의 영화이야기

 

'행복한 라짜로', 알리체 로르와커, 2019. ⓒ(주)슈아픽처스

라짜로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지만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러나 그런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라짜로는 힘겨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라짜로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 시골과 도시를 유랑하는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 ‘행복한 라짜로’에서 예수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는 아닐 것이다.

착하고 친절한 라짜로의 순례길을 보여 주는 이탈리아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소박한 풍경과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사회의 거대한 부조리에 대해 말한다. 서정주의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거쳐 잔혹 드라마로, 아름다움과 스산함, 그리고 경이로움까지 다채로운 감정의 파고를 경험케 하는 근래 보기 드문 클래식한 아우라가 넘치는 영화다.

1940년대 네오리얼리즘과 1960년대 모더니즘영화로 세계영화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이탈리아 영화는 현재 젊은 감독들로 인해 다시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루카 구아다니노, ‘유스’의 파울로 소렌티노, 그리고 ‘행복한 라짜로’의 알리체 로르와커가 이탈리아 신세대 영화의 힘을 세계에 전파하는 중이다.

알리체 로르와커는 2015년에 ‘더 원더스’로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더니 지난해에 ‘행복한 라짜로’로 칸 각본상을 받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올해에는 심사위원으로 나서 ‘기생충’에 황금종려상을 줬다.

 

'행복한 라짜로' 스틸이미지. ⓒ(주)슈아픽처스
'행복한 라짜로' 스틸이미지. ⓒ(주)슈아픽처스

예수에 의해 부활한 ‘라자로’(Lazarus)를 연상시키는 ‘라짜로’(아드리아노 아르디올 분)는 가난하고 외로운 젊은이지만 언제나 친절하고 따뜻하다. 그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에서 지주인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이웃들과 함께 일한다. 라짜로는 어느 날 요양 차 마을을 찾아온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 분)와 처음으로 우정을 나눈다. 탄크레디는 자신의 납치극을 꾸며 마을을 벗어나려고 결심하고 라짜로는 그를 돕는다. 한편, 납치 신고로 마을을 찾아온 경찰에 의해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라짜로는 홀로 남겨진다.

영화는 내용상 1부와 2부로 나뉜다. 목가적 풍경의 평화로운 시골의 삶은 실은 착취와 억압으로 사람들을 눈멀게 한 거짓 평화다. 후작 부인은 바깥세계와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농부들을 속이고, 이들을 봉건적 소작농으로 부리고 있었다. 최근 우리에게도 간간이 드러나는 ‘염전노예’ 사건처럼 이 일은 이탈리아에서 ‘대사기극’이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화다. 감독은 이 실화에서 모티프를 따와서 이야기를 구성했다.

후작 부인은 소작농을 착취하고, 그 소작농들은 허드렛일은 라짜로에게 넘기기 일쑤다. 또 다른 형태로 라짜로를 착취하는 소작농들은 여기저기서 수시로 라짜로를 불러 대고, 그는 그 모든 힘든 노동을 불만 없이 묵묵히 해낸다. 하지만 그에게는 편한 잠자리와 넉넉한 식사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마을사람들에게 따뜻한 말과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라짜로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커피를 만들어 돌리려고 분주히 움직이지만 사람들은 다 떠나고 없는 식이다.

 

'행복한 라짜로' 스틸이미지. ⓒ(주)슈아픽처스
'행복한 라짜로' 스틸이미지. ⓒ(주)슈아픽처스

이야기는 시공간적 점프를 통해 시골에서 도시로,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 한복판으로 옮겨 간다. 어느 날, 경찰이 사건을 접하여 이 시골마을에 들어오고, 자본주의 세계를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준비도 없이 도시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더 비참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을 비껴간 라짜로는 도시에서도 여전히 선한 얼굴로 사람들 속에서 조용히 지낸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꽤 오랫동안 요정같이 예쁜 라짜로의 맑은 눈동자로 인해 가슴이 쨍하게 아려 왔다. 디지털 제작을 거부하고 16밀리미터 필름으로 시골과 도시를 담아 낸 장인적 시도에는 빠른 속도로 변한 세상이지만 어떤 신성함이 이곳을 이끌어 가고 있음이 우화적으로 담긴다. 영화는 부자와 빈자를 선과 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이기심과 착취로 피폐한 인간들 사이에서 문명사 이전부터 공생해온 야생동물의 정신적 원형을 간직한 그 누구인 라짜로. 그는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열병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법 같은 신비함을 오랜만에 체험하게 해 준 귀한 영화다. 봉준호의 ‘기생충’과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졌지만 전혀 다른 만듦새로 표현된 영화로, 두 영화를 비교하여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다. 목가적 서정주의와 도시 잔혹극을 넘나드는 이 영화에서 자연인이자 투사이자 익명의 영웅인 ‘요한, 씨돌, 용현’(‘SBS스폐셜’ 6월 9일, 16일 방영분)를 떠올린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 스틸이미지. ⓒ(주)슈아픽처스
'행복한 라짜로' 스틸이미지. ⓒ(주)슈아픽처스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님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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