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원은 아직 그 곳의 시간 위에 놓여있다
나의 소원은 아직 그 곳의 시간 위에 놓여있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9.08.05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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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남미여행기-서른 번째 이야기 / 강진수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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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새벽 4시 즘 일출을 보기 위해 서둘러 일어났다. 이미 주변에서도 일출을 보러 토레스 삼봉을 오르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도 가져온 랜턴을 들고 아침도 거른 상태로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따라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도 있고 돌산인지라 새벽부터 빈속에 오르기엔 꽤나 버거웠다. 게다가 조그만 랜턴 불만을 따라 산을 올라야 해서 아직 컴컴한 주변에 겁부터 덜컥 났다. 처음엔 사람들을 따라 올라가면 됐지만, 점점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뒤처지거나 앞서가 흩어지게 되면서 랜턴 불빛에 더욱 의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나의 야맹증이었다. 주변이 어두워지기만 하면 더욱 눈이 침침해지고 잘 보이지 않아 산길을 오를수록 제대로 길을 따라가고 있는지 불안해졌다.

처음엔 형이 랜턴을 들고 앞서 걸어갔지만, 형의 발걸음은 재빠르고 나는 눈이 어두워 계속 뒤처지게 되어 나중엔 내가 랜턴을 들고 앞에서 산을 올랐다. 사건은 그때부터였다. 앞에 따라갈 사람도 줄어들게 되면서 눈이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내가 앞사람을 놓치게 된 것이었다. 불을 비추어가면서 길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계속 걸어 올라갔으나, 점점 길은 괴상해지기 시작했다. 돌길이 아니라 아예 암벽이 나타난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가려 했지만, 완전히 어둠뿐인 곳에서 뒤를 돌아본들 되돌아갈 길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토레스 삼봉을 가기 위해 위로 올라가다보면 다시 등산로와 만난다는 것을 알았기에 커다란 바위를 타고 억지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모한 짓이다. 다른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에서 어둠만을 끼고 돌산을 오른다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위험한 행동이다. 잘못 발을 내디뎌 굴러 넘어지거나 앞사람이 찬 바위에 뒷사람이 맞기만 해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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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무척 당황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든 무작정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으로 가득차서 계속 발을 앞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처음엔 내가 천천히 불을 비추며 올라가고 형이 뒤에서 나를 받쳐주며 함께 길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한참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자 나는 완전히 겁에 사로잡혀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발이 덜덜 떨려 더 이상 내디딜 수 없는 지경이었고, 가파른 경사에 겨우 자세를 유지하며 멈춰 서버렸다. 그 상태를 본 형은 아마 책임감이 막중해졌을 것이다. 평소에도 산을 많이 타고 몸이 날랜 형은 내게 랜턴을 건네받고, 먼저 올라가 등산로를 찾아 다시 나를 데리러 올 테니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겁이 나서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해졌다. 형마저 유일한 불빛을 들고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니 세상에 오직 나만 남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십 여분을 기다렸을까, 보이지도 않는 형이 위쪽에서 내게 소리쳤다. 길을 찾았어. 내가 다시 내려갈게. 가만히 있어.

형이 조심조심 내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매미처럼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나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겨우겨우 경사의 꼭대기에 함께 올랐다. 오르고 나니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등산객들의 랜턴 불빛이 오고가는 것이 보였다. 등산로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위험한 순간이 지나고 나니 한결 몸이 가볍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얼른 불빛이 있는 곳으로 좇아가 등산객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따라 다시 십 여분을 걸었을까, 드디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토레스 삼봉이 눈앞에 나타났다.

커다란 호수와 그것을 감싸는 세 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을 때, 그 경이로움을 잊지 못한다. 마침 일출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주변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에 잔잔해야할 호수에는 파도가 일고, 세 개의 봉우리는 태양을 지키는 문지기라도 되듯이 호수의 일렁거림에 맞서 웅장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일출을 잘 감상하기 위해 자리를 잡느라 바빴다. 이른 새벽인데다가 산꼭대기라서 바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불어왔다. 커다란 바위틈이나 그 아래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도저히 일출 때까지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건장한 성인 남성들도 바람에 밀려 넘어지거나 쓰러지곤 했다. 우리도 겨우 한곳에 자리를 잡아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토레스 삼봉과 호수의 모습만으로도 압도적이었으므로 일출이라고 한들 더 감동스러울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우리는 감동 다음에 더 큰 감동이 올 수 있으리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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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바람 사이로 주황색 햇빛이 스미기 시작했다. 뒤이어 강렬한 붉은 빛이 세 개의 봉우리 너머에서 부채가 펼쳐지듯 하늘 가득 번져 메웠다. 잘 빚은 도자기처럼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근 해가 봉우리 사이에서 나타날 때에는 자리에 웅크려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탄성을 냈다. 해가 푸른 호수에 비치고, 불그스름한 공기가 봉우리와 호수 사이를 가득 채웠다.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나 홀린 듯이 호숫가로 다가갔다. 손을 뻗으면 저 영롱한 태양에 닿을 수 있을까. 바람이 거세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호숫가에 거친 파도가 치고 있다는 것도 전혀 염두지 않은 채로,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푸른 물결의 경계에 있는 바위들에 올라, 뜨겁게 타오르는 일출을 마주하고 섰다.

사람들은 각기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그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소원을 빌 시간은 있었을까. 넋을 잃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던 나도 가까스로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그 소원은 결코 특별할 것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운을 빌고,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행운을 빌었으며, 내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의 행운을 빌었다. 그 다음으로 나의 행운을 빌려다가 멈칫했다. 왠지 이곳에서 비는 소원에는 나의 욕심이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어떤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의 행운을 비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다만 그래도 나를 위해 어떤 소원을 빌긴 빌어야 했다. 꼭 행운이 아니더라도 나의 다짐과 마음을 빌어도 되지 않겠는가. 나는 생각했다. 길의 끝을 반드시 보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걸어야 할 길을 걸을 수 있다면. 내가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나의 길로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헤매며 혼란스럽더라도 이것이 나의 길이라는 확신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꼭 토레스 삼봉에 오르기 위해 새벽부터 헤맨 나의 길처럼. 그 소원 아닌 나의 소원은 아직 토레스 삼봉과 일출의 시간 위에 놓여있다.

 

ⓒ위클리서울/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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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의 삼 일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트레킹과 캠핑을 마치고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 발길을 옮겼다. 이제 드디어 마지막 나라, 아르헨티나. 남미에서의 우왕좌왕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에서 역시 많은 일들이 생기리라고는, 또 예상치 못한 놀라움에 휩싸이리라고는, 누가 알았겠는가. 아르헨티나의 남쪽 파타고니아의 작은 마을, 엘칼라파테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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