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인터뷰] 김성훈 장보고글로벌재단 명예이사장(전 농림부 장관) -2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1회에서 이어집니다.>

김성훈 장보고글로벌재단 명예이사장(전 농림부 장관)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김성훈 장보고글로벌재단 명예이사장(전 농림부 장관)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 청해진이 오늘날 자유무역항 기능을 했다는 말인데.

▲ 완도 청해진(淸海鎭)은 국제자유무역의 원형이었고, 청해진 터 장도(將島)는 문화재청이 발굴한 자료에서 나타났듯이 당시 청해진은 장보고 상단(商團)의 본부였다. 지정학적으로도 청해진은 범선시대에 한·중·일 항로를 왕래하는데 천혜의 요새였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홍콩과 싱가포르 같은 독립적인 국제무역과 서비스 중계항(中繼港)이자 자유항(自由港)이었다.

현재도 완도항은 명목상 국제항구로 지정되어 있으나, 정부의 동북아 교류협력정책에 따라 과거 장보고의 영화가 퇴색된 것도 사실이다. 중간거점 항 역할을 하던 제주와 목포, 군산, 광양 등이 오늘날 부산항과 인천항, 평택항 등과 같은 국제적 항구에 그 역할을 내주었다. 부산항과 인천항이 자유무역항으로서 동북아 물류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다. 그러나 청해진은 이미 9세기부터 오늘날의 국제항의 기능을 담당했다.

 

- 장보고를 경제공동체 선구자로 평가하는데.

▲ 9세기경 장보고 대사와 국내외 신라인들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볼 때, 한·중·일 3국의 주요 상업과 교통요지에 둥지를 틀고 중국대륙 내부는 물론 3국간의 중계무역과 멀리 샴(태국)과 페르시아(이슬람) 국가들과도 교역했다. 동북아 경제교류협력의 중심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장보고 대사는 우리가 세계사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세계인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도 국가 간 경제공동체 국제협력 모델의 선구자였다. 앞으로도 활발히 전개될 정경분리와 민간주도형 ‘장보고 모델’은 동북아경제 협력과 다가 올 남북한 경제협력사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사’가 아니다. 현재와 미래의 교범(敎範)임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 장보고 선단의 의미는 무엇인가.

▲ 당시 장보고 선단은 동양 3국은 물론 아시아, 유럽대륙과도 교류가 있었다. 9세기 때 물류이동은 자연적이고 인위적, 기술적 제약으로 인해 지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한 개척정신을 통해 교역을 확대해 나갔다. 이점은 세계해양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업적이라 할만하다.

이른바 대륙 간 육로 실크로드(Silk Road)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교역규모나 빈도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유럽대륙과 중국-한반도를 잇는 동서양 교역은 해운범선시대를 맞으면서 실크로드와 세라믹로드(Ceramic Road)가 열렸다. 각종 물자와 인적교류, 문화와 예술 교류가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장보고(張保皐) 선단의 역할은 세계사에 가장 두드러진 국경을 초월한 국제협력의 이정표(里程標)를 보여줬다.

 

- 다양한 항로(Road)를 개척했다.

▲ 당시의 동북아 중요 항로는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북중국(北中國)항로와 남중국(南中國)항로가 있었다. 북중국항로에는 노철산(老鐵山)수로와 황해(黃海)횡단항로가 포함된다. 한반도 서남부와 절강성 영파 또는 강소성의 양주를 잇는 남중국항로(일명, 동중국해 여단항로)가 있다. 황해 횡단항로와 남중국항로가 장보고 시대에 가장 많이 이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항로들은 이미 장보고 시대 이전부터 한반도 남쪽지방 주민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이용돼 온 것이 이때부터 공식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항로들은 이후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크게 개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를 들면 목포-연운항, 부산-상해 등이다. 말하자면 장보고 선단은 새 항로의 개척자이며 최대 수혜자라 말할 수 있다.

 

- 동양 3국 번영을 가져왔다는 평가도 있는데.

▲ 동북아 경제교류협력과 경제공동체 개념은 이미 장보고와 신라인들이 먼저 모범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장보고 휘하의 청해진 그리고 재당 신라인들은 대부분 상공업과 해운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신라와 당나라, 일본의 경제이익에 공히 기여함으로써 실제 공무역과 그를 대신한 사무역을 주관했다.

오늘날의 다국적 종합상사 또는 초 국경기업(Multi-National, Trans-National Corporation)도 감히 하기 어려운 상생적 ‘윈윈’(win-win) 전략에 의한 국제기업경영의 모델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정경분리(政經分離)와 상호협력이라는 배분과 조화라 말할 수 있다.

 

- 오늘날의 근대무역 효시 아닌가.

▲ 그 같은 경영방식은 당시 신라와 당나라, 신라, 일본의 정치경제 관계가 불편했을 때, 또는 국가 간 조공무역이 종종 형평성이 결여되면서 어느 한 쪽에 불이익과 불평등을 초래하게 됐을 때 더욱 그 빛을 발휘했다. 이럴 경우 관련국 서로에게 편리한 반관반민(半官半民)식 무역형태, 즉 장보고 상단에 의한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와 대당매물사방식이 성행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적으로 껄끄럽고 재정수지마저 불균등할 경우 정부 간 또는 국가 간 공식거래보다는 실제 수요와 공급 그리고 거래가격을 반영하는 민간무역이 서로에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예컨대, 수교 이전의 한중 거래와 현재의 남북한 교역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장보고 상단(商團)은 이미 근대 무역방식에 가까운 민간주도의 거래 형태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세계패권이 해양에 있음을 알았다. 해양의 중요성을 말한다면.

▲ 인류역사는 해양의 역사다. “바다를 제패(制覇)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을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섬나라 영국과 일본, 해양제국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칸디나비안 제국, 북유럽의 바이킹족과 신라 후기 장보고(張保皐) 상단(商團)이 각기 북유럽과 동양 3국의 바다를 제패해 경영했던 사례 등이 그러하다.

오늘날도 세계 강대국들은 바다경영을 놓고 피나는 쟁패(爭覇)를 거듭하고 있다. 바다는 유형무형의 자원의 보고(寶庫)다. 바다가 지구온난화 완충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국제무역에 있어 세계열강들의 바다진출과 해양패권 전략은 아주 치열하다.

바닷길은 과거의 비단과 금은보화, 차와 향료, 도자기를 실어 나르던 기능에 머물지 않고 인류의 삶과 문화, 국운을 가르는 가늠자이자 생명줄이다. 고대의 실크로드와 세라믹 로드가 인적, 물적 교류의 중요한 통로였다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바다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면적 기재로 재조명되고 있다. 바다경영이 곧 세계경영의 길이라는 말이다.

 

- 우리의 지도층은 무엇을 배워야 하나.

▲ 지금의 정치인들은 장보고에게서 통합의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 정치가 하지 못한 것을 해양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의 미래는 바다경영에 있다’는 생각을 잊으면 안 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바다에 보물이 있다’, ‘바다에 살길이 있다’는 교육을 해야 할 때다.

그런 면에서 장보고는 우리 민족이 나갈 귀중한 표상(表象)이다. 9세기 당시는 페르시아와 중동, 태국, 필리핀 민다나오 등지가 우리의 일터였다. 이것이 바다경영의 효시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의 살길도 바다에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교육환경은 그렇지 못하다. 젊은이들이 야망과 포부가 없다.

안정된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몰린다. 드넓은 바다를 모르기 때문이다. 바다를 알면 일자리가 넘친다. 조선왕조가 조선반도만 주장하면서 망한 것도 바다진출을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왕이나 조정대신들도 바다를 외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으로만 여겼다. 바다경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 당시 조선은 어땠나.

▲ 조선조 때는 아예 해양경영을 포기하고 바다 진출의 문마저 굳게 닫아걸었다. 바다 진출을 역모자들이 나라를 탈출하려는 배신과 반역행위로 보았다. 바다는 천한 백성들이나 생업을 유지하는 생계수단으로 이용하는 터로 간주되었다. 3면이 모두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바다경영을 포기하고 살아온 우물 안의 개구리 민족이 되어 버렸다.

바다 속과 바다 너머에 엄청난 금은보화를 획득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너무나 근시안적인 조선은 스스로 ‘비단길’을 외면했고, 그런 결과는 서구 해양세력을 통해 발전한 일제(日帝)의 침탈을 불러들였다. 되풀이 말하지만, 동서고금의 역사는 바다를 장악한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다.

우리 역사에서도 불세출(不世出)의 영웅, 장보고와 바다사나이들이 신라에 의한 한반도가 반 토막이 된 통일 후(후기신라) 시대 속에서 들끓던 갈등과 저항적 에너지를 ‘신천지 개척의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국가발전과 국운을 도모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고구려나 백제의 유망민 입장에서 장보고 선단과 신라방의 운영은 정치에서 잃은 것을 바다에서 찾았다. 저항적 에너지를 공동체 정신과 창조적 에너지로 바꾼 원조라 말할 수 있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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