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이 그림에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이 그림에 이름을 붙이고 싶은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가을이면 각종 뜬구름 같은 그림들이 휙휙, 잘도 지나간다. 엊그제는 일본 수상 아베와 그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쌍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서 내 마음을 영 심난하게 하더니 오늘은 뜬금없는 신발이다.

신발, 오래 전에 돌아가신 고모부가 손수 만들어서 신고 다니던 짚신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검정 고무신이 생각나고, 여자애들을 그토록 눈물짓게 만들었던 알록달록 화려한 꽃신이 뒤를 이어 나타난다. 그리고 또 뭐가 있었나. 스파이크 운동화가 있고 백구두가 있고 거울처럼 반짝반짝 빛을 내며 실제로 사람의 얼굴까지 비춰주던 새까만 구두가 있고 등등, 각양각색의 신발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나타나서 나를 신명나게 한다.

그 많은 신발 중에서도 나는 왜 하필이면 낙하산 양말을 대고 꿰맨 검정 고무신이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찢어진 고무신이 아니라 그런 신발을 신었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해야 옳은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 뭐가 있었나? 가난이 있었다. 가난해서 오가는 정이 각별하게 도타웠고, 그래서 웃음과 희망도 제법 넘쳐났었다고 내 기억은 주장한다. 부끄러움과 눈물과 한숨도 당연히 따라다녔겠지만, 그런 부정적인 기억은 추상적으로 희미하기만 하고 뭔가 뭉클하게 디테일한 스토리만 커다랗게 부각되니, 그러고 보면 기억이란 참 이상한 것이다.

내 발 뒤꿈치에 가시가 달린 것도 아니련만, 이상하게도 내가 신는 검정 고무신은 뒤축이 잘 찢어졌다. 옆이나 앞이 찢어지면 그런대로 대충 신고 다닐 수 있지만, 뒤축이 찢어지면 슬리퍼처럼 질질 끌고 다녀야 하니 뛰어다닐 수가 없다. 엄마는 그때마다 질기기로 유명한 낙하산 양말 헤진 것을 모아두었다가 오려서 뒤축에 대고 꿰매곤 하셨다.

낙하산 양말 헤진 것을 뒤축에 대고 꿰맨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는 일이 나는 그렇게도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 부끄러웠다. 어쩌면 부끄럽다기보다 창피했다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맞다. 부끄러움이 아니라 창피였다. 부끄러움은 그나마 어떻게 수습이 가능하지만, 창피란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연동되는 까닭에 수습도 잘 안 된다.

꿰맨 신발이 어찌 그리도 창피했던 것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할 말은 하나도 없다. 어쨌든 창피해서 학교 안 간다고, 정지간 앞 바라지를 붙잡고 엄마에게 떼를 쓰다가 아버지의 호통소리 한 마디에 그만 죽어라고 달아났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새롭다. 엄마는 아마 그때 신발을 꿰매시면서 예쁘게 잘 됐나 어쨌나, 몇 번이나 살피고 또 살핀 뒤에서야 비로소 이만하면 됐다, 예쁘게 꿰매졌으니 아들이 덜 창피하겠다, 하고 옛다 신어봐라, 하셨을 것이다.

 

이건 너무 소박하지 아니한가
이건 너무 소박하지 아니한가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6년 전 여름날에
6년 전 여름날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가 4학년이었던가, 정확한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 어느 하루 아버지께서 뜬금없이, 갑자기, 스파이크 운동화 한 켤레를 사 오셔서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드셨다. 무슨 복권 같은 것에 당첨이 됐던 것도 아닐 텐도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느닷없는 사건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어서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스파이크 운동화를 신음에 있어 반드시 지켜야 할 사대원칙을 제시하셨다.

첫째 소풍 가는 날에 신는다.

둘째 설 명절 세배를 다닐 동안 신는다.

셋째 추석 명절 성묘를 다닐 때 신는다,

넷째 언제 어디서든 공차기 같은 험한 놀이를 할 때는 반드시 벗어놓는다.

이상의 네 가지 원칙을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착실하게 잘 지켜낼 것이라 생각하셨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착실한 아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스파이크란 그 당시 축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신어야 하는 축구화로 명명이 돼 있다시피 했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축구부의 정식 선수가 아닌 한 스파이크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게 주어졌다.

어찌 가만히 모셔두고 소풍날이나 기다릴 것인가. 세상천치 그런 바보가 어디 있을 것인가 말인가. 다음날 학교에 가면서 있는 사실에 없는 사실까지 보태가며 자랑을 실컷 늘어놓았다. 아이들은 당연히 안 믿어주었다. 까딱 잘못하면 허풍쟁이 거짓말쟁이에 미친놈 딱지까지 붙을 판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아버지가 제시한 4대원칙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아니 생각은 하면서도 잊자 잊어야 한다,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 몰래 스파이크를 신고 나가서 실컷 자랑을 했고, 공차기에 자치기에 온갖 놀이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된 채로 들어갔다.

그날 밤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나를 때렸던 것 같지는 않다. 맞았다면 필경 그 억울함이 평생의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아버지의 큰소리는 얻어맞은 것 이상으로 기억을 빽빽하게 채우고 앉아서 가끔 눈물을 글썽거리게 한다. 이 기억은 또 무슨 성질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거기 어디쯤에 행복의 작은 씨앗이 발아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나 말해야 할 것 같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나서, 집을 나와 도시를 떠돌면서는 아마 고무신은 쳐다도 안 봤을 것이다. 설령 보고 싶다 해도 봐줄 만한 고무신이 눈에 보이지 않기도 했었다. 어쩌다 가끔 절간을 가면 고무신이나 털신이 보이기도 했지만 신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과거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거나 인상을 찡그린 적도 없었다. 인연 없는 무엇을 대하듯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힐끗 쳐다보다가 스쳐갔을 뿐이었다.

 

신발장사 경력 50년이시라는데
신발장사 경력 50년이시라는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단골이니 뭔가 특별한 서비스를 하시겠다고
단골이니 뭔가 특별한 서비스를 하시겠다고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 시기에 내가 주로 신었던 신발은 워커였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을 판매하는 용산역 부근이나 황학동에 가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워커를 즐겨 신었던 까닭은 그것을 신었을 때의 육중한 무게감 플러스 걸을 때 들리는 저벅저벅하는 소리가 좋아서였으니 한 마디로 말해서 객기였던 셈이다. 워커 다음으로는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다니는 객기를 부렸고, 허리를 굽히고 들여다보면 내 얼굴도 비춰주는 검정 구두를 신었을 뿐, 고무신은 흰 것이든 검정 것이든 어린 시절 이후 신어본 적이 없었다.

다시는 신을 일이 없을 것 같았던 고무신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이십, 삼십대를 발 빠르게 지나서 사십대에 진입한 지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이미 도시를 떠나 시골 촌놈 소리를 듣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고창 오일장에 장구경을 갔다가 흰 고무신을 발견하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쳐다보았다. 그날은 그뿐이었다. 멀리서 구경만 하고 그냥 돌아왔다. 혹시 모르겠다. 검정 고무신이었다면 만져보기라도 했을는지.

그 뒤로도 몇 번 더 흰 고무신을 보았지만 역시 그냥 보기만 했다. 왜 검정 고무신은 안 보일까 궁금해 하면서도 묻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구 아무나 데리고 가서 검정 고무신은 왜 없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런 바보 멍텅구리 같은 짓을 어떻게 할 수 있으랴.

그토록 우유부단하게 머뭇머뭇하는 세월을 얼마나 보낸 뒤에, 내 옆의 그녀가 내 옆으로 온 뒤의 어느 하루 해리 장날에 장 구경을 가자고 나왔다가 우리는 다함께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울긋불긋에, 알록달록에, 형형색색에, 도무지 말로는 표현을 수 없는 그 초라하게 화려한 모습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라고 지금은 기억하지만, 그때는 다만 어리둥절하고 신기했을 뿐이었다. 초라함도 어느 정도가 있어야지, 다 합해봐야 백 켤레도 채 안 될 것 같은 신발류를 좌판에 늘어놓고 있으니 저게 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었다.

한심할 정도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 모양과 색깔은 가히 장관이라 할만 했다. 사람이 신는 신발의 모양과 색깔이 그렇게도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선 놀라웠다. 애들만 색깔 있는 신발을 신고 다닌다고 여겼던 내 자신의 편견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무신은 한 켤레도 안 보였다. 왜 없지?

“아 있지라우. 왜 없어.”

내 질문에 주인은 그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는 투로 큰소리를 치면서 옆에 서 있는 스타렉스 자동차의 뒷문을 열더니 사이즈를 묻는다. 사이즈를 말해주니 이것저것 들었다 놓기를 되풀이하고, 드디어 고무신을 내놓는데 흰 고무신이다. 검정 고무신은 없느냐고 다시 물으니 지금은 없다고, 예약을 하면 다음 장날에 가져오겠단다.

예약이라는 표현이 우스워서 기어이 웃어대고 말았다. 그러자 주인도 같이 웃어준다. 그 웃음을 매개로 우리는 친구 비슷한 사이가 되었다. 나는 이것저것 물어대기 바빴고, 그는 내 질문에 답을 하느라 호객행위를 못 하게 되었다.

 

금방 산 고무신들
금방 산 고무신들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발에 잘 맞나, 예쁘나
발에 잘 맞나, 예쁘나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신발 장사에 바친 그의 청춘과 영광 그리고 애환이 그날 고스란히 내게로 스며들어 왔다. 그랬다. 그가 신발 장사인 게 아니라 내가 신발 장사인 것 같았다. 감정이입이란 이렇게도 훌륭하다. 만약에 그가 젊거나 최소한 중년 아니 장년 정도만 됐어도 감정이입이 그렇게도 신속하게 이뤄지지는 못 했으리라. 어쨌든 그의 이야기에 나는 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십 년이란다. 일이십 년도 아닌 자그만치 오십 년이란다. 파릇파릇한 청춘의 시기에 시작한 신발장사 오십 년 동안 고창과 장성 그리고 영광의 오일장을 다람쥐 챗바퀴 돌리듯이 찾아다녔고, 그동안 각 장터마다에 가게도 하나씩 열었지만, 지금 그 가게는 거의 사용을 안 하고, 혹은 못 하고 창고로나 쓰면서 장날이면 스타렉스에 신발을 싣고 와서 거리에 작은 좌판을 깔아놓고 운수가 좋은 날에는 열 켤레 이상, 운수가 별로인 날에는 열 켤레도 못 팔고 파장을 한다.

그날 내가 특히 주목한 것은 오십 년이란 햇수였다. 오십 년이라면, 내가 어린 시절에 신었던 검정 고무신 가운데 최소한 한 켤례 정도는 이 양반한테서 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오래 전에 헤어진 피붙이라도 만난 듯이 그 얼굴을 보고 또 보고, 자꾸 보게 되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소 과장을 하자면 신발 콜렉터가 되어 갔다. 검정 고무신은 물론이고 흰 고무신도 사고, 또 사고, 도대체가 신을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은 플라스틱 슬리퍼도 사고, 장화도 사고, 심지어는 털신까지도 샀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고무신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갔다. 무엇보다 고무신은 신어도 신은 것 같지 않게 가볍다. 가벼워서 발바닥에 와 닿는 느낌을 오롯이 음미할 수 있다. 할 걸음 떼었다가 내려놓을 때 밟히는 작은 돌멩이의 느낌은, 그것은 명백하게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니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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