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2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1회에서 이어집니다.>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
전재진 우키시마호 폭침 진상규명회 대표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 일본은 어떤 태도였나.

▲ 일본 정부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닿아 촉뢰(觸雷)로 침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기뢰성상과 생존자증언, 현장정황을 분석해 본바 모두 허위다. 당시 미군이 부설한 기뢰는 감응(感應)기뢰다.

이 기뢰는 수압이나 전파, 음향의 영향으로 폭발한다. 당시 우키시마호는 항해를 멈췄기 때문에 수압도 없었다. 기관도 껐기 때문에 음향과 전자파 발생도 없었다. 그렇다고 기뢰가 배 밑으로 다가와 부딪쳐 폭발할 근거도 없다.

더구나 폭발소리가 2차례 있었고 기뢰폭발 때 생기는 물기둥도 없었다. 따라서 침몰원인은 대본영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 본다. 이에 따라 조선인 긴급소개(緊急疏槪) 명령을 오미나토 해군경비부가 주도했고, 출항 이전부터 기관실 옆 창고에 자폭장치를 달아 폭침시켰다. 미군 기뢰 때문이 아니다.

일본정부가 이를 반박하려면 한국정부와 한국의 진상규명회 측에 반박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모든 증거는 74년이 지난 지금도 마이즈루만 해저에 있다. 일본은 배를 조속히 인양 수습하여 그 증거들을 제시하기 바란다. 그 때 국제무대에서 혹독하게 따지겠다.

 

- 사망자 사후처리도 잔혹했다.

▲ 우키시마호 침몰은 타이타닉호 침몰과 그 정황이 질적으로 다르다. 타이타닉호는 대서양빙산과 충돌사건이지만, 우키시마호는 2차 대전 당시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이 해방을 맞아 귀국하던 도중에 일본군부가 의도적으로 자행한 외국양민계획적대량학살(Genocide)이다.

그럼에도 2차 대전 전후처리기구인 연합국총사령부는 이 사건을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단 1주일 만에 사건의 전말을 조작발표하고 마무리했다. 그해 12월7일 일본 조선인연맹 아오모리지부 손일 위원장이 GHQ(연합국최고사령부)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소했다. GHQ 법무국 검찰과는 ‘사건발생 증거불충분’이라며 소를 기각했다.

- 의도적 대량학살이라는 말인데.

▲ 일본 정부가 이를 반박하려면 한국 정부와 한국의 진상규명회 측에 반박자료를 제시했어야 한다. 그 증거는 74년이 지난 지금도 마이즈루만 해저에 있다. 일본 정부가 이를 인양 수습해 증거들을 제시해야 한다. 국제무대에서 혹독하게 따지겠다.

사건 해결과 사후처리도 부당했다. 우키시마호에는 해방을 맞은 조선인이 귀향 도중에 일본 대본영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부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자폭장치로 폭침시켰다. 즉, 외국양민계획•의도적 대량학살(Genocide)이다.

 

오마철도 공사장에서의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
오마철도 공사장에서의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 ⓒ위클리서울/ 제공: 전재진 대표

- 지노사이드(Genocide)는 무엇인가.

▲ ‘우키시마호폭침사건’(浮島丸爆沈事件)은 다른 말로 ‘마이즈루만 인간대학살’(舞鶴灣 人間大虐殺)이라 부른다. UN의 집단살해 방지와 처벌협약에 따르면, ‘Genocide’를 외국양민계획 또는 고의적 대량집단학살로 규정하고 있다. 우키시마호 피해자가 1만5천명이라는 연구도 있다.

지금까지 베일에 싸인 이유도 수없이 많다. 왜 서둘러서 조선인들을 배에 태웠으며, 침몰한 원인은 무엇인지 풀리지 않고 있다. 사후처리도 미스테리다. 미국과 일본의 야만적이고 차별적인 음모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미•일 정부도 문제지만, 74년 넘도록 희생된 우리국민의 유해를 지금도 봉환조차 하지 않고 있다.

 

- 명백한 인권범죄다.

▲ 미국은 나치 동맹국인 일본의 전범처리를 방기했고 2차 대전 전범인 독일에 대해서는 조사와 공개를 했다. 일본만큼은 철저히 비호했다. 특히 우키시마호 사건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후처리를 하지 않았다. 당시 연합국 대표국인 미국은 인권유린을 했고 그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 보상처리는 있었나.

▲ 마이즈루만에는 수많은 시신들이 선실에 가득했다. 우키시마호 마스트가 수면위에 나와 있었는데도 증거불충분으로 기각한 것은 미국의 양심이 얼마나 비겁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배를 즉시 인양하고 사망자 신분확인, 부상자와 실종자 조사를 해야 함에도 이뤄진 것은 없었다. 해안가에 밀려든 시신을 굴비처럼 엮어 바닷가에 매뒀다가, 타이라해병단 뒷산 골짜기로 옮겨 기름을 붓고 태워 매립했다. 고구마 밭에도 묻었고 인근 무인도 자연동굴에도 방치했다.

침몰한 우키시마호를 해저에 방치했다가 9년 만에 인양할 때도 조일우호협회에서 유해를 원형 그대로 인양할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했다. 또다시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해 버렸다. 9년 전에 죽은 사람을 산산조각 낸 것이다.

그 뒤로 일본 정부는 피해자와 진상규명회가 요구하는 지료를 단 한건도 제공하지 않았다. 피해자 원고단이 승소한 교토지방재판소 판결도 결국 오사카고등법원 항소심에서 피해자 패소로 끝났다. 일본 정부는 74년이 지나도록 사죄도 보상도 전혀 하지 않았다.

 

- 아직까지 진상이 밝혀지지 못한 배경이 무엇인가.

▲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의 전쟁지휘본부 대본영의 우두머리인 히로히토 천황을 살려야 했다.

미국 외 다른 연합국 조사관이 전범으로 히로히토를 제소하기 위해 관동군 731부대인간생체실험을 비롯해 난징대학살, 세계여성성폭행범죄, 조선인강제징용, 조선인강제노동, 아시아를 진공청소기처럼 약탈한 황금백합작전, 제노사이드(대학살) 등 진상조사를 벌였지만 미국이 방해했다.

A급 전범자 히로히토를 극동전범재판소에 회부하려던 연합국의 역할도 봉쇄됐다. 미국은 어떻게 하든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려 중국과 소련의 사회주의 팽창을 저지해야 했다. 당시 스위스 주재 일본 무관이던 ‘후지무라’ 중령과 미 국무성의 ‘알렌 달레스’ 간에 비밀공작이 오갔는데 일본이 미국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가 천황주권유지였고, 두 번째가 섬나라 일본이 배가 없으면 굶어죽으니 상선들을 그대로 남겨 둘 것, 세 번째는 대만과 조선은 일본의 식량조달지라는 논리를 들어 일본 영토로 인정할 것 등이었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던 일본 해군승무원 생존자의 증언대회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던 일본 해군승무원 생존자의 증언대회 ⓒ위클리서울/ 제공: 전재진 대표

- 한반도와 대만을 일본영토로 주장한 일본의 저의가 궁금하다.

▲ 당시 일본은 다양한 외교채널을 활용해 미국과 단독강화회담을 타진했다. 한반도를 자국영토로 삼으려는 야욕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겼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일본군 병사의 생명마저 존중하지 않던 일본군이 적국의 군대와 국민의 생명을 무시한 것은 당연했다.

일본군은 한마디로 천황의 군대였다. 천황의 1인 지배체제를 지키기 위한 군대일 뿐이다. 국민의 군대가 아니다. 명치유신 때도 자국민 생계와 생존을 위해 조선을 침략해 자원과 부를 약탈한 민족이다. 1853년 7월 미국의 통상압력에 굴복했던 역사를 정한론(征韓論) 즉, 침략론侵略論)을 만들어 조선을 정복했다.

정한론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등 군국주의와 전쟁론 자들의 손을 거쳐 구체화되었다. 이어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한일합방을 주창하면서 ‘침략과 정복’의 야욕을 달성했고 지금도 그 야욕은 버리지 않고 있다.

 

- 미국의 ‘천황수호’도 국제적 비난을 받았는데.

▲ 일본은 천황제 유지가 목표였다. 미국이 히로히토를 전범자로 처리하면 안 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기 전부터 히로히토를 전범 처리할 마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종전됐음에도 대본영의 군사조치에 따라 우키시마호 폭침 대학살을 자행했다.

초대형 제노사이드가 국제사회에 알려지면 히로히토 방패막이였던 미국이 치명타를 맞을 판이었다. 그래서 연합국총사령관 맥아더를 통해 이 사건을 덮었고, 74년이 지난 지금도 베일에 감춰져 있다. 미국이 외견상으로 일본민주화를 내세웠지만, 국제적 비난을 받았다.

천황제를 인정한 미국의 파렴치한 행위는 유사 이래 최악의 범죄였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945년 5월 스위스에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개된 ‘화평공작’이 우키시마호 폭침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 지상 최대 범죄역사로 기록됐다.

▲ 미국은 일본의 요구조건인 ‘천황주권 유지 인정’, ‘어선과 상선 보존’, ‘대만과 조선의 일본 영토 인정‘ 등 세 가지 조건에 동의했다. 이 조건 때문에 미국에 의해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이 철저히 묵살된 것이다.

우키시마호 진실이 밝혀지면, 히로히토 비호명분도 그만큼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상 최대의 해상 대학살극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덮어야 했고, 히로히토를 비호해야만 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1주일 뒤인 1945년 9월1일 조사도 인양도 사죄도 배상도 없이 역사 속에 묻혔다.

미국이 히로히토를 살리려한 그 자체가 지상 최대의 범죄행위였고, 국제적으로 중대한 문제라는 점, 미국의 비겁한 전후처리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검은 베일에 싸였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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