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멀쩡해 뵈는 양말보따리
멀쩡해 뵈는 양말보따리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이 나이에 설빔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고, 양말 선물을 보따리 채로 받았다. 벌크 양말이라고나 할까. 몇 켤레나 되는지 헤아려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양이다. 모두가 제각각이라서 짝을 찾는 일만으로도 아마 조금 과장을 하자면 하루는 족히 걸려야 할 것 같다. 살아오면서 이렇게도 굉장한 선물은 처음이고, 누가 어디에서 이런 방식의 선물을 받았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해도 입이 막 찢어진다.

그런데 이런 선물을 내게 준 사람은 엉뚱하게도 미안해하고 있었다. 포장도 안 돼 있고, 짝도 안 맞춰져 있고, 여기저기 코가 빠졌거나 어쩌면 구멍 뚫린 것도 있을 것이라고, 사실은 폐기처분해야 하는 건데 이렇게 가져와서 주는 것이라고, 주는 사람은 주는 기쁨이라도 누린다지만 받는 사람은 혹시, 혹시라도 입고 먹고 신을 것이 넘쳐나서 쓰레기를 대량 생산하는 이 풍요로운 시대에 허섭스레기 같은 것을 왜 내게 주는가 하고 기분 나빠하면 어쩔까 걱정스럽다고, 그러면서 몹시도 미안하다는 투의 웃음을 입가에 살짝 얹어놓고 있었다.

인천에서 작은 규모의 성냥공장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회용 라이터의 등장과 함께 성냥 수요가 급감하면서 공장운영을 포기하고 귀농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다. 이 양반이 성냥공장을 운영할 당시 알고 지냈던 중소기업가들 가운데 일부가 지금도 서울이나 부산, 인천 등지에서 양초 공장이라든가 봉재 혹은 장갑 등등의 소규모 공장을 운영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양말 공장을 운영 중이란다.

양말 같은 생필품은 대개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로 공장을 이전한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아직도 국내에서 고군분투하는 공장이 더러 있고, 그래서 품질관리에 더한층 예민하다 보니 약간만 흠집이 있어도, 중국이나 베트남 현지 공장에서 들여오는 제품과 비교하면 흠이라고 볼 수도 없는 티끌만큼의 하자만 있어도 인정사정없이 비품 처리하는데 그냥 폐기하기는 너무 아까워서, 그래서 모아두었다가 친밀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단다.

양말은 그저 양말이라고만 생각하는 무식한 내 눈으로 볼 때는 도대체 왜 비품처리를 당해야 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태반이다. 칠십여 켤레나 되는 양말을 일일이 한 켤레씩 손을 넣어서 뒤집어도 보고 신어도 보고, 한참이나 열심을 판 뒤에 겨우 한 켤레 구멍 뚫린 녀석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다른 데도 아닌 종아리 부위에 보란 듯이 뻥, 구멍이 뚫린 양말 한 켤레를 찾아놓고 보니 그 기분이 참 묘하다. 무슨 보물찾기 놀이 같은 데서 보물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아하, 요것이구나, 요것이야, 하면서 싱글벙글하고 있자니 느닷없는 풍경 하나가 쓱 지나간다..

그 순간 내 가슴에서 화약이 터졌다. 알싸하다. 사락사락 눈이 내리는 겨울밤이면 밤마다 호롱불 앞에서 새끼들 양말 뒤축을 꿰매시던 어머니의 실루엣이 나를 울린다. 아니다. 아직 울지는 않았다. 양말과 관련한 온갖 기억들이 나도, 나도, 하면서 마구 일어나는 바람에 울 틈도 사실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 개개인의 기억이란 아마도 요새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빅데이터에 버금가는 무엇인 것 같기도 하다.

 

양말 짝 맞추기
양말 짝 맞추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에 양말은 설날 아침에 한 켤레씩 나눠주는 설빔의 대명사이기도 했었다. 농사가 풍년이면 잠바도 사 주고 바지도 사 주고, 심지어는 장갑에 내복에 귀마개 등등 의복 일체를 새로 개비해 주기도 하지만 그런 횡재는 평생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였다. 야속하게도 농사는 풍년이 거의 없었고, 설빔은 언제나 바지 하나 혹은 잠바 하나에 그쳤다. 아예 하나도 없이 형이나 혹은 언니의 옷을 물려받는 행사로 끝나는 지옥 같은 설 명절도 부지기수였다.

그 어떤 경우에도 빠지지 않는 품목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양말이었다. 제아무리 흉년이 들었다 해도, 제아무리 살림이 가난해졌다 해도 양말 한 켤레 정도는 새끼들 발에 신겨야 한다는 강고한 의지가 그 시절의 부모들 가슴에는 마치 종교처럼 새겨져 있었다.

설 명절의 설빔이 고작 양말 한 켤레로 끝날 경우 아이들은 당연히 울고불고 난리를 친다. 그래서 엄마들은 대개 그 해의 설빔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극비에 부치곤 하셨다. 미리서 공개해버리면 새끼들이 몇날며칠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밥을 안 먹는다는 둥 학교를 안 간다는 둥, 심부름도 안 한다는 둥 각종 심통을 부리지만, 설날 당일에 공개하면 그날 하루만 울고불고 생난리를 쳐대면서 제사를 안 지내겠다느니, 세배를 안 하겠다느니 어쩌고 생때를 다 부리지만 그래봐야 그 순간뿐이다. 세배를 안 다니면 세뱃돈도 없는데 제까짓 게 세배를 안 다니고 배길 것인가 말이다.

엄마가 설빔의 종류를 극비에 부친다고 해서 모든 자식들이 다 모르는 것은 아니다. 집안의 큰아들이나 큰딸은 사정이 기르다. 새끼들 설빔과 제수 용품을 준비하기 위해 장에 가시는 엄마가 고추라든가 참깨, 팥, 녹두, 계란 꾸러미 등등 각종 돈 될 만한 것들을 가져가서 팔아야 하는데 당신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큰아들이나 큰딸의 힘을 빌리고자 데려가는 것이니, 큰딸이나 큰아들은 집안의 살림살이 규모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게 돼 있었다.

뭔가를 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다른 한편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 엄마는 큰딸이나 큰아들의 힘을 빌리는 것만은 아니다. 장에 도착하면 엄마는 일단 팥죽집에 들러 팥죽부터 한 그릇 안겨준다. 팥죽을 다 먹고 난 뒤에는 어물전을 들르고, 과일가게를 들르는 동안 엄마는 부지런히 조심스럽게 공작을 벌이신다. 올해는 농사가 어떻다는 둥, 집안에 돈이 없을 때는 집안의 기둥인 큰놈이 철없는 동생들을 봐서라도 참아야 한다는 둥, 들을 때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어리둥절한 얘기를 한참 듣다 보면 어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라, 하고 나서 보면 때는 이미 늦어 있다. 올해 설 명절은 일단 큰놈부터 아무것도 안 사준다는 얘기가 팥죽집에서부터 은밀하게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순간 명료하게 알아차리고 맥이 빠져서 시무룩해 하지만, 그러나 이미 알아버렸다. 설득당해 버렸다. 설득당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함정이었다는 것을 알고 억울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올해는 설빔이 양말 한 짝밖에 없단다, 하고 동생들에게 폭로하고 다함께 데모라도 하자고 선동하고 싶지만 이 또한 생각뿐이다. 엄마와 함께 장을 봤다고 하는 동지의식 내지는 공범의식이 가슴에 똬리를 틀어버렸고, 게다가 동생들은 아직 구경도 못해본 장터의 팥죽까지 허천나게 맛나게 먹어버렸는데 어쩔 것인가.

 

왜 비품처리 했을까
왜 비품처리 했을까.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렇게 저렇게 어떻게 설 명절을 넘기고 정월 대보름 행사까지 치르고 나면, 엄마는 이제부터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바느질을 해야 한다. 아버지의 양말은 같은 날 같은 시간부터 신었어도 아직 멀쩡하건만, 새끼들의 양말은 어찌 그렇게도 빨리 헤지고 구멍이 뻥뻥 뚫리는지, 엄마는 새끼들의 활동량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르겠다고 혼잣말을 해가며 바느질을 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한 마디 톡 쏘는데 그것이 저 유명한 “아따 느그덜은 발모가지에 까시가 붙었다냐?”이다.

그 시기의 어느 해인가 엄마들의 눈을 번쩍 띄게 하는 신상품이 등장했다. 요즘도 가끔 그 이름이 언급되는 낙하산양말이 그것이다. 들리는 얘기에 따르자면 낙하산양말은 실제로 낙하산을 소재로 썼다고 한다. 미국 공군들이 쓰던 낙하산을 사용연한이 다 돼서 민간에 매각 처리했는데 그것으로 양말을 만들어서 팔았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야 어떻든 낙하산양말은 질기기가 고래심줄 같아서 돌멩이 같은 것으로 비벼대지 않는 한 구멍이 뚫리는 일은 없었다. 그 대신 보온성이 형편없어서 발이 엄청 시렸다. 게다가 불에 약해서 아이들이 불장난이라도 하고 돌아올라치면 성한 데가 없이 오글오글 화상자국 천지였다.

양말에 관한 그런저런 추억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었던 게 인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열다섯이던가, 열여섯이던가, 하여튼 아직 어른도 아니었던 시절에 나는 서울 거리에서 양말 행상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세세히 캐들어 가자면 저 악명 높은 국민교육헌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덮어놓고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외우라고 하는데 나는 그 짓이 영 재미가 없어서 안 해버렸다. 선생님은 그런 내가 얄미웠던지 무지막지한 폭력행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선생님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인지 욕지거리를 마구 뱉어내고 학교여 안녕, 해버리고 말았다.

열두 살도 초반의 나이에 광주의 무슨 극장 영사실 조수 노릇을 시작했고, 석 달도 안 돼서 키가 너무 작아 안 되겠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 누나의 꾐에 빠져 이발 기술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이발소 ‘꼬마’ 노릇을 시작했고,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서 누나를 희롱하는 동네 꼰대들 꼬락서니가 너무 보기 싫어서 이발소도 그만두고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딴에는 보무도 당당하게 서울 입성을 했지만 글쎄 뭐 어디 오라는 데가 있나. 이문동 천변 똥물이 줄줄 흘러가는 개천 옆으로 주욱 늘어선 가내수공업 공장 몇 곳을 전전하기도 하고, 시내버스 안내양과 운전기사가 담합해서 ‘삥땅’치는 것을 감시하는 짓을 그것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뛰어들었다가 실체를 알고는 기함해서 그만두기도 하고, 등등 어쨌든 굶어죽지는 않고 빌빌거리던 어느 하루 꽤나 친절한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나를 한 번 쓰윽 훑어보고 나서 대뜸 말하고 있었다.

돈 벌고 싶은 생각 없느냐?

듣느니 희귀한 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상을 내 멋대로 훨훨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재미에나 취해 있었을 뿐으로, 딱히 돈을 벌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돈을 벌어보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듣고 나니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귀를 기울였던 것인데, 그것이 하필 양말 행상일 줄이야. 며칠이 지나서야 알았다. 나한테 돈 벌 생각 없느냐고 물었던 사람이 양말 도매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하자는 이런 것
하자는 이런 것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청계천에 양말전문 도매상이 한 블록을 꽉 채우고 있었다. 사람 셋이 나란히 서서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다란 골목에 아침이면 양말 행상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어떤 사람은 여행용 대형 가방에 이런저런 각종 양말을 잔뜩 담아서 들고 나갔고, 또 어떤 사람은 가방 따위가 무슨 필요냐는 듯이 골판지 박스에 가득 양말을 쟁여 담은 다음 커다란 보자기로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서울 시내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며 양말이요, 양말 사세요, 하고 외쳐대는데 보기 보다는 제법 팔리는 것 같았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제법 팔리는 것 같다는 거, 이것은 나도 그렇게 제법 팔 수 있을 거라는 추론으로 이어졌고, 이 엉터리 추론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일종의 깨달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거, 그러니까 매우 중요한 의문을 생략한 채로 나는 양말 행상에 뛰어들었던 셈이었다. 나 같은 사람도 양말 행상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심각하게 했어야 했는데 나는 건너뛰었고, 실패가 예견된 양말 행상을 무려 석 달 동안이나 하고 난 뒤에서야 나는 아니구나, 이러다가 굶어죽겠다,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양말은 다방이나 미용실 혹은 접대부가 있는 술집 같은 데서 잘 팔렸다. 그렇다고 무조건 다 팔리는 것은 아니고, 각종 너스레와 우스갯소리 등 잔재주에 능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잔재주는커녕 미용실이나 술집 혹은 다방 같은 데는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를 못했다. 겨우 어떻게 들어갔다 해도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여자를 보면 즉시 고개가 절로 푹 숙여져서 말 한 마디 꺼낼 수가 없었고, 겨우 어떻게 양말 사세요, 소리를 했다 해도 안 사요, 한 마디면 그냥 돌아서서 도망이라도 치듯이 나와 버린다.

내가 즐겨 찾는 곳은 복덩방이나 동네슈퍼 혹은 철공소 같은 작은 공장들이었다. 이런 데서는 나도 제법 큰소리로 양말 사세요, 소리를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나 바빴다. 복덕방 사람들은 장기나 바둑을 두느라 바빴고, 동네슈퍼는 끊임없이 드나드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바빴고, 작은 공장들은 점심시간이 아닌 한 의무적으로 바빠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 많이 팔면 대여섯 켤레, 못 팔면 한 켤레나 겨우 팔았으니, 하루에 우동국수 두 그릇 먹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배운 것은 있었다. 사람이 신는 양말의 종류가 그렇게도 많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판탈롱이니 스타킹이니 심지어는 팬티스타킹까지, 내 생애 어쩌면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여성용 양말을 수도 없이 만져보았으니, 여러 말 할 것도 없이 진귀한 공부를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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