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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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망쳐버렸다 하더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면 최악의 엄마는 아니다.”

지난번에 쓴 글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 문장에는 세 개의 단어가 나온다. ‘망치다’, ‘포기하다’, ‘최악’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엄마’다. 망치고 포기하고 최악이라 할지라도 엄마이기 때문에 놓지 못하는 끈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예전에 쓴 글 중에 ‘철없는 부모, 자식에게 쫓겨나다’라는 글이 있었다. 그걸 Daum에 있는 ‘브런치’라는 공간에 올려놓았더니 이런 댓글이 달렸다. ‘안전 불감증이다’, ‘제 정신이 아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등등. 조금 가볍게 글을 쓰긴 했지만 그 시절, 아이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고 지쳐 있었는지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무책임하고 철없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했다. 모름지기 부모라면 최소한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변명 같지만 부모도 사람이다 보니 놀고 싶을 수 있고 자식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소매를 걷어 붙이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부모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내 행동은 ‘비정상’의 범주로 분류됐다.

‘비정상’이라는 단어를 써놓고 보니 지난번 글에 이어 우리 아이 이야기를 계속 해야 될 것 같다.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유별나게 예민했던 첫째는 내가 생각할 때 정상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더 비정상이었던 것도 같지만 그때만 해도 스스로를 지극히 정상인 엄마라고 생각했다. 폭탄을 품고 살얼음 위를 걷고 있는 엄마, 까딱 잘못하다가는 아이도 나도 터져버릴 것 같이 위태로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게 자식이라는데 아이와 눈만 마주쳐도 아파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하는 아내를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 심정 또한 편했을 리 없다. 내가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혀를 쯧쯧 차며 한심해 하겠지만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는 글귀를 누군가가 내 머리에다가 정을 갖다 대고 망치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잠시도 나를 쉴 수 없게 만들고 잠도 편히 못 자게 했으며 한 번 열이 올랐다 하면 해열제 따위는 듣지도 않았다. 이틀 이상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아토피가 심해져 엉덩이부터 원숭이처럼 시뻘겋게 부어오르고 숨이 꼴깍 넘어가도록 울어댔다. 그런 아이를 안고 서울에 있는 소화 아동병원 까지 한 달음에 달려와 입원을 시키곤 했다. 걸어 다니기 전까지는 그나마 편했다. 아장 아장 걷기 시작하면서 부터 아이는 잠시도 병실에 누워있지 않고 밖으로 나가겠다며 떼를 쓰는 바람에 링거 병을 매달고 병원 복도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듯 끝도 없이 걸어야만 했다. 손에 바늘을 꼽을 때는 그 조그만 몸에서 어떻게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껴안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나는 주사실에서 쫓겨나고 병원에서 힘 좀 쓴다는 남자들이 달려들어 아이를 제압하고 주사 바늘을 꽂았다.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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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장 아장 걷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두다다다 뛰어다니는 단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링거꽂이를 끌고 다녀서 될 일이 아니었다. 들고 뛰지 않으면 따라 잡을 수도 없었다. 학창시절 100미터를 24초에 뛰던 나였지만 그때만큼은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다녔다. 병원에서 새우잠을 자고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을 원양어선에 태워 보내는 심정으로 아득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측은했던지 남편은 가끔 휴가를 내고 아이를 봐주기도 했는데 그때는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았다. 낮잠을 한 숨 잘 수도, 다른 보호자들과 커피 한 잔을 뽑아 마시며 수다를 떨 수도, 화장실에서 맘 졸이지 않고 볼 일을 볼 수도 있었다. 그거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첫째가 3살이 될 무렵, 유별나게 잠이 쏟아지던 어느 날 오후, 화장실에서 나는 비현실적인 작대기 두 개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인생 완전 끝났네 x발.’ 죽어도 낳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이 달래고 졸랐다. 딸일 수도 있잖아. 딸은 편하대. 딸 하나 가져보는 게 내 소원이야 여보. 나는 남편의 귀에다 대고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소원이면 니가 낳아 키워!!!”

지난 2년 동안 나는 100살은 먹어버린 것처럼 지치고 시들어 버렸다.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면 깜짝깜짝 놀랐다. 헉. 뭐야 저건! 내가 봐도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살은 디룩디룩 찌고 머리는 산발이 된 데다 불어터진 두부처럼 탄력을 잃은 여자 하나가 거울 속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의 내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데 또 아이를 낳으라고? 그럼 지금보다 두 배쯤 더 망가져버린 나를 봐야 된다는 거잖아.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아빠들 육아휴직 뭐 그런 것도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남편이 일을 쉴 만큼의 형편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엄마라고 찾아온 소중한 생명체를 그냥 외면할 수도 없었다.

 

엄마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은 필요하다. 어느새 봄이네. 어느새 가을이 되어버렸네.. 라고 말하며 살았다. 이제 봄이 오겠네. 다음 주면 단풍이 예쁘게 물들겠네..라고 말하며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엄마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은 필요하다. 어느새 봄이네. 어느새 가을이 되어버렸네.. 라고 말하며 살았다. 이제 봄이 오겠네. 다음 주면 단풍이 예쁘게 물들겠네..라고 말하며 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그렇게 어찌어찌 둘째가 태어났다. 딸이 태어나길 간절히 바랐지만 결국 또 아들이었다. 이제 다시 2년 전의 생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쇳덩이 돌덩이 납덩이를 죄다 가슴 속에 쓸어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둘째가 좀 이상했다. 배가 고플 때만 살짝 눈을 뜨고 모기소리로 앵앵 거리다 배가 부르면 다시 잠을 잤다. 너무 신기해서 자는 아이를 살짝 건드려 보았다. 기저귀를 갈아 보았다. 텔레비전을 틀어 보았다. 창문을 열어 물건 파는 트럭의 소음이 방 안까지 들어오도록 내버려 뒀다. 그런데도 둘째는 계속 잠을 잤다. 첫째를 키울 때 그토록 부러워하던 슈퍼 울트라 캡짱인 아기가 내 눈 앞에 누워있었다.

엄마가 동생을 너무 사랑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게 질투가 났는지 큰애가 장난감을 던지거나 이유 없이 심술을 부렸다. 온종일 자기에게만 관심을 쏟고 집중해주던 엄마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기분이 좋을 리 없었을 거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리고 미숙한 엄마였다. 자고 있는 동생을 이유 없이 엉덩이로 깔아뭉개고 밥 대신 이유식을 먹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첫째가 미웠다. 처음에는 좋게 타이르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엉덩이를 팡팡 때리며 혼을 냈다. 울다가 잠이든 아이를 보면 내가 너무 심했다 싶어 눈물 흘리며 후회를 했지만 다음 날이면 또 다시 아이를 혼내고 벌을 세웠다.

“많은 것을 망쳤다 하더라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면 최악의 엄마는 아니다.”

이 글의 첫 문장이다. 아이를 키우며 엄마로서 참 많은 잘못을 했다. 그 중에 하나가 ‘편애’에 대한 이야기이다. 최악의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나름 노력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이 되길 바라며 다음 편에 계속 이어서 쓰려고 한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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