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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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오늘도 나는 커피 잔을 쏟았다.

늘 있는 일이라 남편은 이제 놀라지도, 잔소리를 하지도 않는다. 수건이나 휴지를 던져줄 뿐이다. 결혼 초에는 내가 그릇을 깨뜨리거나 뜨거운 냄비에 손이 데이면 나보다 더 화들짝 놀라 차가운 물에 손을 담가 주며 속상해 했는데 말이다. 깨진 그릇을 다 치울 때 까지 옆에 오지 말라며 쓰레받기로 한 번, 청소기로 또 한 번, 그러고도 물휴지로 바닥을 몇 번이나 닦아냈던 사람이다. 칠칠맞은 내가 발에 유리라도 박힐까봐.

하지만 이런 훈훈한 풍경은 이제 물 건너 가버린 지 오래다.

유리잔을 깨거나 냄비에 손을 데는 일이 지금도 종종 일어나지만 남편의 반응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달라진 것이 어디 남편뿐이랴. 결혼 초에 나는 더부룩한 배에서 새어나오는 방귀를 남편 앞에서는 차마 뀌지도 못하고 대문 밖까지 나가서 해결하고 들어오곤 했다. 뭐 아무튼 이런 긴장감이 사라진 지금. 좋은 의미로 보면 서로가 더 없이 편해지고 숨길 게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일 테고. 나쁜 의미에서 보면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잘 보이고 싶은 것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돈 문제, 아이들 문제, 시댁과 친정 문제 등을 공유하며 칸막이 없는 부부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를 속속들이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겉과 속 사이에 또 다른 제 3의 표피층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포스터 ⓒ위클리서울

요즘 방영되는 것 중에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있다.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는 편이라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니다. 한가한 저녁에 어쩌다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내가 좋아하는 김희애가 나왔고 처음엔 그녀 때문에 보게 됐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자는 똑 부러지는 성격에 능력 있는 의사에다 얼굴까지 예쁘다. 인생을 다 걸고서라도 잡고 싶은 여자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결혼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어느 날, 남자의 눈에 딴 여자가 들어왔다. 젊고 예쁘고 부잣집 딸이다. 아내 몰래 둘은 사랑을 한다. 그러다 임신을 하게 된 젊은 여자는 남자에게 이혼하고 자기에게 오라고 말한다. 남자는 그러겠다고 약속하지만 아내에게 말하진 못한다. 말하기 전에 들켜버린다. 아내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를 떨면서도 자식 때문에 갈등한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삼류 통속드라마가 따로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런 식상하고 결말이 뻔한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일까. 어쩌면 진짜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바로 우리 옆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두 가지 버전의 '부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남들에게 보여 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부 둘 만이 아는, 아니 어쩌면 여기서도 아내의 이야기와 남편의 이야기가 각각 따로 일지 모른다. 남들 눈에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곪은 상태인 사람들도 있고. 쿨하게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며 기대를 내려놓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울타리를 매 순간 손봐가며 가정을 튼튼하게 지켜나가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전생에 나라를 구하거나 조상이 덕을 많이 쌓은 덕분에 하늘이 내린 인연을 만나 서로에게 매 순간 사랑과 고마움을 느끼며 사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1%의 행운이 허락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가까운 지인 중에 이런 부부가 있었다. 남편이 문제가 많았다. 여자 문제에 돈 문제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아내는 너무 힘들었지만 참고 살았다. 남편과 이혼을 하면 아이들에게서 아빠를 뺏는 것 같아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기다려주면 예전의 남편으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기대는 번번이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망설였다. 이혼은 신중해야 되니까 섣불리 할 수 없다고 했다. 옆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갈라서는 게 맞다고 했지만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생이 된 큰아이가 말했다. 엄마가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용기를 내서 행복해지는 게 우리가 바라는 거야.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사실,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다보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힘들고 미운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연의 끈을 싹둑 잘라내기도 쉽지 않다. 같이 힘들게 버텨온 세월도 있고. 자식을 낳아 키우며 함께 쌓아온 정도 있고. 별 탈 없이 잘 살기만을 바라는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짓도 하고 싶지 않고. 헤어져본들 뭐 대단히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 외에도 이유를 꼽자면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발목을 잡는다. 머릿속에 생겨난 작은 혹 하나를 떼어낼 때도 수많은 핏줄과 신경이 뻗쳐 있어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듯 말이다. 하지만, 불행한 얼굴로 힘들게 버티며 살고 있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게 아이들은 더 괴로울 지도 모른다. ‘우리가 헤어지는 것은 역경 때문이 아니라 성장했기 때문이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이 말처럼, 자식이나 부모님도 소중하지만 제일 중심에 놓고 생각해야 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누군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이 내 불행을 대신 짊어져 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내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삶은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예전에 내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참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결혼 생활 망치려면 이렇게 해라’ 뭐 이런 지침이 있다면 딱 내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남편에 대한 나의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연애하던 시절, 장미꽃을 바케스 통째로 사들고 와 내 무릎에 얹어주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삿대질을 해댔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도 참 힘들었겠구나 싶다.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런 게 그냥 다 싫었다. 사랑하면 함께 있어야 하고 퇴근하면 둘이 같이 저녁밥을 꼬박꼬박 먹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으니 결혼 생활이 평탄할 리가 있나. 세상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으로 내 불행을 자초하며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차고 철이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가 되는 게 부부라고는 하지만, 1+1은 결국 1이 될 수 없다. 나는 네가 될 수 없고 너도 내가 될 수 없다. 부부는 결국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이걸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내가 볼 때 부부 생활백서 90%는 마스터 한 거라고 본다.

 

ⓒ위클리서울/ 사진작가 스티브

누군가가 찍은 노부부의 사진 한 장을 오래토록 들여다보고 있다.

‘참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꽃보다 아름답다. 오랜 시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오며 서로가 닮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한 세월을 함께 걸어온 그림자 같기도 하고, 인생이라는 숙제를 잘 마치고 이제는 마음 편히 놀러 나온 친구 사이 같기도 하다. 모든 부부의 이야기가 이처럼 아름다운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삶이라는 버거운 짐의 양 귀퉁이를 맞잡고 발 맞춰, 마음 맞춰 걸어 나가는 길이 꽃길이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 부부의 연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주어진 길을 열심히 걸어왔고 수많은 갈림길 앞에서 오늘도 열심히 걸어가고 있노라고 말하자. 그냥 그렇게 오늘도 살기로 하자. 저 사진 속의 아름다운 두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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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 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문정희 시집 <다산의 처녀 中> (민음사 2010)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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