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서영남 겨자씨의 집 대표(前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수사(修士))-2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1회에서 이어집니다.>

서영남 겨자씨의 집 대표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 갱생을 위한 공공시설이 필요하지만, 사회적 냉대와 홀대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출소자가 사회로 나와도 막상 일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출소자를 위한 '겨자씨의 집'을 만들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는데 소감이 어떤가.

▲ 말 그대로 겨자씨의 집은 출소자를 위한 집이다. 비록 집은 작지만, 이들에게는 육신과 마음을 쉬게 하는 소중한 쉼터다.

출소 후 이들은 마땅히 어디로 갈 곳이 없다.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과거에 25년간 몸담았던 수도원을 나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장기수였다가 출소한 10여 명의 형제를 위해 밥 해주고, 함께 지낼 ‘겨자씨의 집’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지금 있는 ‘민들레국수집’ 바로 옆이 그 집이다. 한때 단칸 월세방을 얻어 10여 명이 같이 지냈다. 처음에는 원래 수도원에 있을 때, 출소자들이 일시로 쉴 수 있는 ‘평화의 집’에서 이들을 돌보는 일도 했다.

그때 알게 된 안드레아라는 분이 나중에 출소해서 나를 찾아와 ‘갈 곳이 없다. 좀 도와달라’고 청원했지만, 당시 수도원을 갓 나온 나도 ‘코가 석 자’였다. 그런데 그 일 덕분에 지금까지 ‘겨자씨 역할’을 하게 됐고, 힘은 들었지만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그때 모인 10여 명이 오갈 데도 없고 마땅한 직업도 없다 보니, 생각한 게 집수리 가게였다. 적확한 사업이라 말하기 뭣하지만, 사실 이들이 어디 가서 막노동하려면 여건상 힘들다. 그래서 일감을 받아 일하면서 벌이를 하고 고생을 덜 하고 싶은 생각에서 시작했다.

 

- 개성이 다른 10여 명이 모여 사업하기 순조롭지 않았을 텐데.

▲ 말처럼 사업이 쉽지 않았고, 나중에는 다 말아먹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고 말았다. 잠시 한눈을 팔면 서로 싸우는 일도 많았다. 그때 느낀 점이 ‘사람이 바뀌어야 삶이 변한다.’라는 것을 절감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기가 가장 어렵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이런 형제들과 같이 살며 느낀 게 시쳇말로 ‘무자식 상팔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웃음)

그러다가 나중에 출소자들 밥이나 제대로 먹이자는 뜻에서 ‘민들레국수집’을 하게 됐다. 사실 일반인이 출소한 사람들을 보면 거부감부터 든다. 하지만 그들을 유심히 보면, 진짜 우리가 볼 수 없는 인간적인 ‘스릴’ 만점을 느끼게 한다.

 

- 교도 행정 중 가장 큰 문제점을 든다면.

▲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 교정정책은 일단 재소자를 외부로부터 ‘격리’ 한다. 완전 징벌적 격리다. 사람을 교화하는 행정이 아니라, 법적제재만 가할 뿐, 인권적 차원에서 사람을 바꾸는 일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교정정책이 이렇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립운동가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둘 때, 가족 면회나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통제했다. 이게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지금도 수형자는 사회와 단절된다. 이들을 외부 사회와 교류하고 소통하게 하면서 변화하도록 해야 하지만, 이게 어렵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보면, 교도관들은 적어도 대학교수보다 더 학식이 높고, 인성적으로 실력 있는 사람들이 돌봐야 한다고 적었다. 다 같은 우리의 소중한 동포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정성으로 돌보는 교정업무가 되어야 하지만, 바뀐 게 거의 없다.

 

- 재소자 권익이나 인권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 일제시대 때도 서대문 구치소에 한겨울이면 불을 때는 등 난방을 했다. 그런데 6.25 전쟁 이후부터 교도소는 완전 냉방이 됐다. 요즘에야 겨우 난방이 들어섰다. 수감자들이 밥을 맘껏 먹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그전에는 일본말이지만 ‘가다’ 밥이라 해서 거푸집(가다) 틀로 밥을 찍어내 1~5등급으로 죄수를 구분해 밥의 양을 다르게 배식했다.

죄의 질에 따라 사람을 등급으로 나눠 대우도 다르고 먹는 밥까지 차별한 것이다. 양심수 같은 사람들은 등외(等外) 밥이라 해서 아예 요기도 안 될 정도로 밥을 줬다. 밥을 퍼주는 봉사원도 조금 밖에 안되는 밥을 주걱으로 그마저 깎아 내 간다.

 

- 일반적으로 수도원은 계명과 율법에 따라 수행하는 곳이다. 수사를 포기하고 나와서는 ‘남과 경쟁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 내게 수도원은 혼자 편하게 지내려고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어 선배 대접을 받는 게 체질적으로 싫었다. 직접 자기 손으로 일도 하고, 벌어서 먹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경지까지 가려면, 나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마음을 가졌다. 절대로 넥타이 매지 않고, 남에게 잘났다는 폼도 잡지 않고 경쟁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켰고 지금까지 경쟁하지 않았다. ‘넥타이’는 경쟁의 상징이다.

보통 우리는 경쟁을 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경쟁하면 결국은 죽는 길밖에 없다. 그런데 만나면 서로 경쟁하려 든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경쟁한다. 세상에 가족과 경쟁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너무 경쟁, 경쟁하면서 지옥을 만들고 있다.

학교도 경쟁, 직장도 경쟁, 사회도 경쟁, 군대도 선착순 경쟁한다. 군대에 선착순문화만 사라져도 사람들이 얼마나 순해지는가. 그렇게 해서 꼴찌들이 대접받는 세상, 가난한 사람이 우선시 되는 세상, 예수가 말한 세상 하늘나라가 바로 그런 세상이다.

 

- 청와대에서 훈장을 받을 때도 ‘넥타이 매고 가지 않겠다’고 했다.

▲ 2011년 이명박 정부 당시의 일이다. 그때 국민추천포상제가 처음 있었는데 훈장, 포상,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등이 있었는데, 여기서 고 이태석 신부가 사후에 훈장을 추서 받았다. 나에게 훈장을 받으러 청와대로 오라고 했지만, ‘넥타이 매고 가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나중에 노타이도 괜찮다고 연락이 와서 부인인 베로니카와 같이 갔다. 수상이 끝나고 대통령과 함께 수상자들이 후한 음식을 대접받았다. 이 행사는 부부동반 모임인데 이상하게 웃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주위를 돌아봐도 베로니카밖에 보이지 않았다. 참석자의 배우자들 모두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면 남은 일은 돈 퍼줄 일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금전 문제로 즐거웠어야 할 시상식장에 웃음은 없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웃음을 베푼 사람은 베로니카 한 사람뿐이었다. 남에게 베푸는 웃음도 하나의 선행 아닌가.

 

- 우리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장기수와 노숙인들을 오랫동안 만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 힘없고 소외된 그들을 곁에서 많이 봐 왔지만, 처음에는 마치 딱딱한 호두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겉은 딱딱한 껍질인데 어느 순간 그 껍질이 깨지면 속은 진짜 야들야들하고 인간적인 놀라운 면을 보게 된다.

이분들이 호두같이 삶이 딱딱해진 사연을 보면, 대부분 가난한 집 출신에 제대로 못 배워 사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 사회적 약자로서 평생을 착취당하며 살았던 ‘한’이 가슴에 깊이 맺혀 있다. 착취는 어려운 사람을 늘 따라 다닌다.

민들레국수집으로 노숙인 형제들이 밥 먹으러 올 때면, 중간에 사기꾼들이 기다렸다가 이들을 ‘포섭’한다. 이들을 돈으로 유혹해 명의를 빌린 다음 사기를 치기 위해서다. 얼마 전에 10일 굶은 사람이 고시원에서 구운 달걀 18개 훔쳐먹었다고 1년 6개월 구형을 받았다.

옛말에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 사람이 의도적으로 도둑질하고 싶어서 했을까. 돈은 없고 배는 고프고…. 그런데도 신문에는 그를 보이스피싱과 상습절도범으로 혹평을 했다.

 

- 힘 있는 사람은 방면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사회다.

▲ 보통 보이스피싱은 나쁜 사람에게 이용당해 대포통장을 잘못 만들어 줘서 당한다. 사기꾼이 노숙인에게 접근해 대포통장 하나 만들어주면 5만 원을 주겠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그들에게 5만 원은 큰돈이고 유혹도 클 수밖에 없다. 어떤 노숙인은 통장을 10개까지 만들어 50만 원을 받는다. 그 돈으로 오랜만에 고기와 소주를 실컷 마시다가 경찰에 체포돼 대포통장 보이스피싱 범죄로 200~300원의 벌금을 맞기도 한다.

돈이 없으면 구류를 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반적으로 상습범을 보면, 큰돈도 아닌 단돈 몇만 원에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허다하다. 기껏해야 ‘몇만 원짜리’ 잡범이 대부분이다. 그 몇만 원 때문에 인생을 망가트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우스갯소리로 재소자 형제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니, 이왕에 할 바에 크게 한 건 해버리지!’, ‘몇 푼 훔쳐 잡히면 변호비용도 못 낼 짓을 하는 바보들’이라 말하기도 한다.

 

- 단단했던 그들의 마음이 어느 순간에 깨지는가.

▲ 그건 언제 깨질지 누구도 모른다. 어느 때 이들의 마음이 깨지고 부드러워진 것을 알지만, 문제는 행동으로 연결이 안 된다는 점이다. 실천이 없다. 수십 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가 나왔다 해도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다반사다.

20년간 감옥에 계셨던 고 신영복 선생의 글에도 ‘실천이 따르지 않는 마음의 회개는 소용이 없다.’는 글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 처음 만난 사형수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 요즘은 그런 경우는 드문데, 옛날에 처음 사형수를 만났을 때, 사실 긴장을 많이 했다. 가장 긴장했던 때가 광주교도소로 사형수를 면회하러 갔었을 때다. 보통 사형수를 만날 때는 교도관 입회하에 3명이 같이 앉는다. 세 사람이 있다가 갑자기 교도관이 과일 가지러 간다고 하면서 우리 둘만 남기고 가버렸다.

교도소를 처음 다니기 시작할 무렵인 데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과도도 앞에 있고. 그런데 우리가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사형수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게만 보지 말았으면 한다. 오히려 이들을 보면 놀랍게도 정말 순수한 사람으로 돌아가 있음을 발견한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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