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난 ‘똥개’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집 믹스 견을 나는 이렇게 부른다.

이름이 따로 있지만 나름 애칭이다. 이 개는 큰아들이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왔는데 이렇게 우리 집을 거쳐 간 애들이 수도 없다. 한번은 말만한 말라뮤트를 데려왔는데 털이 군데군데 빠져있고 인상이 사나웠다. 컹컹 짖는 소리가 아파트를 쩌렁쩌렁 울렸고 조그만 고양이들의 목을 물고 놔주지 않았다. 그걸 보자 내 눈에서 눈물과 불꽃이 튀었다. 발발 떠는 고양이를 가슴에 안고 방에 들어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저 새끼 당장 어디다 좀 갖다줘버려!!

유기견 센터에 데려다주면 얼마 못가 안락사 당할 목숨이었다. 큰애는 그게 안타까워 데려온 거였지만 우리가 그런 애들을 다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이 말했다. 좀 기다려보라고. 자기도 보낼 곳을 찾는 중인데 한두 번도 아니고 힘들다고….

다행히 시골에 사는 아는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키우던 개가 얼마 전에 명을 다하고 떠나는 바람에 허전했던 참에 잘됐다고. 그래서 말만한 말라뮤트는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떠났다.

 

큰아들이 유기견센터에서 데려온 아이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사실 큰애가 저런 행동을 하게 된 데는 내 잘못이 컸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온갖 종류… 그러니까 햄스터, 병아리, 거북이, 고양이, 토끼, 개 등등을 들고 들어왔을 때 별 말없이 키우게 해줬다. 아이가 처음 길고양이를 품에 넣어왔을 때도 그 마음이 예뻐서 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가르쳐야 했다. 하나의 생명을 책임지고 끝까지 키우는 게 순간의 연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엄마를 보며 생각했을 거다. ‘그래도 되는 거구나. 내가 끝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엄마 아빠가 어떻게든 해피엔딩을 만들어주는구나….’ 아이에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해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결과적으로 아이의 책임감까지 흐리게 만드는 꼴이 돼버린 거다.

요즘 ‘표창장 위조’ 문제로 말이 많다.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을 망치자고 나쁜 선택을 하겠냐 말이다. 내 아이가 더 잘 되고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부모가 만들어준 스펙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표창장이나 봉사활동 이력을 조금 고치는 게 형사처벌을 받아야 될 만큼 대단한 잘못이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선 아닐 수도 있다.

아이 둘을 대학 보내며 우리나라 입시제도 중에 ‘학종’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줄임말이라는데 학력고사를 보고 대학을 들어간 나에겐 너무나 낮 설고 골 복잡한 제도였다. 지금의 아이들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수시와 정시를 보게 되는데 그 중, 수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는 해당하는 학종과 학생부교과, 논술과 실기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거기다 특기자, 농어촌, 적성전형 등등 거기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전형들이 있었다. 수시에서 55% 정시45%의 비율로 아이들을 뽑으니 수시는 무시 못 할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겐 ‘학종(서류와 면접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방식)’이 정말 중요한데 서류에는 학생부와 자소서가 포함된다. 그리고 학생부는 다시 내신 성적과 여러 가지 비교과 활동이 들어간다. 거기다 내신등급도 숫자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대학 자체적 기준으로 평가를 한다. 비교과에서는 동아리, 독서, 봉사활동이 들어가는데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역량을 개발해 나가는데 이토록이나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하니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을 서류로 만들어내야 하니 남들보다 더 많이 더 폭 넓게 더 많은 점수를 첨가해야만 유리하다. 자, 그러니 어떻겠는가. 여기서부터 부모의 조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봉사점수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준다든지, 아이가 논문을 쓰는 데 참여했다든지 뭐 이런….

사실, 이런 것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는 부모. 예를 들면 나 같은 (먹고 살기 바쁜)부모는 별 도움이 되지 못 한다. 하지만 정보나 인맥이 많고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는 부모가 있다면 당연히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거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잘 되는 길을 돕고 싶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데 있다(정도를 넘어서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씀).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만든 ‘표창장 문제’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말하자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부모들을 그렇게 만든 건 우리나라의 이 말도 안 되게 복잡한 입시제도이니까. 그리고 그 문제를 걸고넘어져 한 가정을 파헤치고 까발겨내는 작금의 무섭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민감한 두 가지 사안. ‘군대와 입시’를 표적으로 삼고 어떻게든 걸고넘어지려고 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번 사태와는 상관없이 나는 이 나라에서 두 아이를 키우는 어미로서의 비애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몇 년 전에 일본에서 만든 공익광고 한 편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 출발점에 서있다. 출발 총소리가 울리고 일제히 달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열심히 달려 나가던 한 사람이 뭔가를 발견하고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 하나도… 둘도… 셋도… 코스를 벗어나 각자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 영상이 보여주고자 했던 건 그런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고. 각자가 만들어가는 길을 따라 열심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라고 말이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부모가 잘못을 하면 자식이 그걸 보고 배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잘못도 실수도 한다. 하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못했다고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 앞에서 독해질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날 선 비난보다 돈보다 명예보다 더 무서운 게 어쩌면 자식에게 보여주고 있는 나의 뒷모습이 아닐까….

좋은 스펙 만들어 좋은 학교 좋은 직장 가는 것도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다는 걸 말 해 줄 수 있는 부모, 정직하게 살며 다른 사람에게 상실감이나 피해주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부모가 더욱 필요한 세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인생의 행복은 결코 성적순이 아닌 거니까.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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