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박재동 시사만화가-1회

[위클리서울=한성욱 선임기자] 예술은 현실과 문화를 비추는 거울이자, 시대적 ‘사고(思考)와 변화(變化)’의 산물이다. 예술가는 때로 시대를 읽는 선구자가 되기도 한다. 동서양 예술에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화가들은 민중이 살아가는 모습과 사회현상, 가치관, 철학 등을 반영했고 비판했다. 그것은 곧 현실을 고발하는 민중예술이 되었고, 민족과 국가를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역사는 문화예술이 없는 민족은 번영하지 못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박재동 시사만화가 ⓒ위클리서울/ 한성욱 선임기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예술은 과거 군사정권에 이어 보수세력이 장기 집권하면서 현실을 비판하는 예술가를 철저히 억압했다. 정권 차원에서 미술교육도 약자에 대한 고통과 아픔을 표현한 그림을 차단했고, 국정교과서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려는 시도도 있었다. 오로지 산업화와 자본주의 논리를 앞세운 기득권세력의 ‘국민 세뇌’ 정책이 난무했다.

 

한때 고등학교 미술선생으로 있을 당시, 학생과 함께 야외 미술교육 등 ‘일탈적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학교 당국에 의해 퇴직당한 박재동(68) 화백은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교과서 미술책을 보면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 추상화가 전부다. 농사일로 지친 농민이나 힘들게 사는 노동자와 여성, 장애인, 노인, 아이들의 현실 모습을 미술책에서 본 적이 없다. 교육 책임자들은 그런 그림을 ‘미술’로 여기지 않았다. 국민은 지금까지도 그것을 미술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세계적으로도 현실을 고발하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나 ‘한국에서의 학살’ 같은 전쟁 고발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런 작품들은 나라마다 셀 수 없이 많다. 피카소는 총칼로 무장한 군인 앞에서 처참하게 발가벗겨진 여성과 아이들의 공포와 분노와 대량학살의 잔혹성을 폭로한 반전(反戰) 작가다.

“1936년 스페인 좌파와 우파 간 정쟁 대립으로 일어난 내전으로 무수히 희생된 민중의 고통을 그린 게르니카는 1980년대까지 반미작품으로 낙인찍혀 국내 반입금지 예술품이었다.”고 전하는 박재동 화백을 종로구 인사동 ‘인사 아트플라자’ 화실에서 만났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로 시사만화를 시작한 박 화백이 25년 만에 인사동으로 다시 돌아왔다. ‘제2의 화업’을 재개한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예술과 현실비판, 군사정권에서의 미술교육, SNS 시대 시사만화의 미래, 민주화를 이끈 민중미술, ‘세상과 이야기하기 20202’, 경기신문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시사만평 등을 짚어 본다.

 

- 인사동에 ‘아뜰리에’를 오픈했는데, 이곳에 열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 지난해 7월 민족미술협의회와 옛 미술계 인사들이 모인 작품전을 위해 종로구 인사 아트플라자에서 모였는데, 그때 참석한 적이 있다. 나는 원래 인물 그리기를 좋아해서 행사 중에 가만히 있느니 옆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그려주었다. 그것을 본 인사 아트플라자에 근무하는 관계자들로부터 ‘우리 갤러리에서 그림 좀 그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의외의 제의를 받게 됐다.

그렇게 해서 인사 아트플라자 대표님과 여러 관계자의 재가를 받아 일사천리로 일이 진전되었고, 1층 오른쪽 입구에 작은 아틀리에 작업실 겸 화방을 ‘선사’ 받았다. 그분들이 책상과 의자, 컴퓨터 등 모든 집기까지 제공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오픈 한 지는 3개월이 넘었다.

 

- ‘제2의 화업(畫業)’을 재개했는데 소회를 말한다면.

▲ 그동안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업하지 못해 굳었던 손을 좀 더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내가 옛날에 한겨레신문에서 퇴직한 지도 꽤 오래됐고, 현재 이렇다 할 수입도 없다. 직장생활을 오래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로서 팔릴만한 그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사이에 사회 자체가 굉장히 힘들어져서 그런지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때 ‘일러스트’(삽화, illustration의 준말)도 했지만, 출판시장도 어려워진 데다 그림도 잘 안 팔리고 해서 우리 같은 화가들이 살아가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림을 팔기 위해 억지로 한다고 해서 갑자기 되는 일도 아니고….

그런 데다가 코로나 재난이 닥치면서 지금 같은 ‘비상시기’에 ‘거리의 화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까지 한 적도 있다. 그게 가장 정직하게 돈을 버는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다른 방도를 찾기도 어려웠고, 이게 평소 나의 생각이었다.

 

- 오랜만에 사람들과 대면 작업하는 게 생소할 것 같다. 화실을 찾는 사람들 반응은 어떤가.

▲ 심심찮게 사람들이 찾아온다. 앞서 말한 대로, 요즘 미술시장 불황에 돈 되는 그림을 금방 그려 낼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랬는데 묘하게도 지금 ‘점빵’(그는 가게를 점빵으로 부름)을 가지게 됐다. 오픈하면서 조금 큰 그림은 10만 원, 작은 것은 5만 원, 중학생은 2천 원, 꼬마들은 천 원씩 받는다.

인물을 그릴 때 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참 좋아하는데, 대화를 안 하면 사람이 아닌 ‘사물’을 그리게 된다. 사실 대화를 안 하면 그림을 그리는 나로서는 편하다. 대상이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좋지만, 그러면 인물 표정이 굳어버린다. 나는 대화하는 인물 그림에 숙달됐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편이다.

그때 얘기를 건넨다. 어디 사느냐, 무슨 일 하느냐 등등 이런저런 것을 물으면, 굳었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림에 ‘핏기’가 흐르고 ‘스토리’가 담겨진다. 그러면서 그림은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만남이 되고 기념이 된다. 그때 ‘아, 이거 참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 다양한 고객들이 찾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참 재밌는 사연도 많고, 꽤 의미 있고 유익한 경우도 많았다. 그중에 한 가지 소개하자면, 어떤 한 분은 사람들과 상담을 하는 ‘카운셀러’인데, 이분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항상 수평적 대화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 말을 듣고 느낀 게 많았다.

우리는 보통 ‘나는 잘 알고 넌 몰라’ 식으로 일방적 대화를 할 때가 많은데 이러면 소통이 어렵다. 어떤 말이 됐든지 상대방에게 맞장구쳐주고, 그 사람과 같이 간다는 생각이 필요하다. ‘당신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은 피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여태껏 그렇게 하지 못했었네’를 깨달았다.

나는 평소의 성격이 남에게 항상 ‘저건 아닌데’ 하면서 즉각 말해주고 싶었고, 그런 유혹이 강해 오히려 이야기가 얽혀버린다. 솔직히 지금도 상대방이 내 마음에 안 들더라도 내 입이 간질간질할 때가 있고, 불필요한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분을 떠올리며 상대방 입장에 서서 얘기하면, 굉장히 말하기 편하고 풍부한 것을 얻어 낼 수 있음을 경험했다.

 

- 사람을 통한 ‘인생 담론’이 더 깊어진 것 같다.

▲ 내가 이것을 잘 활용해서 사람 사이에서 많이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내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상대방 편이 돼서 노력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이것이 나에게 더 나가서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사물과도 대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나무가 있으면, 여태까지 ‘너는 나무고 나는 사람이야’라는 항상 나는 우위에서 생각했고, 나무를 친구처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분 이야기를 통해 ‘사물과의 수평적 대화’를 생각하게 됐다. 꽃을 보면 ‘얘, 너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니?’, 나무 보고 ‘나무야 괜찮아?’하고 물으면 나무도 내게 말을 하겠죠.

사물을 친구처럼 수평적으로 보면서 가니까 세상이 너무나 풍요롭게 보인다. 그림을 단순히 멋있게만 그릴 게 아니라, 사물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려야겠다는 것을 다짐한다. 그러면서 가끔 또 까먹을 때도 있다. 그러다가 ‘아차’ 하면서 기억을 다시 하기도 한다.

 

- ‘사람과 사물이 하나’라는 수평적 철학을 깨달았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 나에게 그런 깨우침을 준 그분의 ‘철학’이 내 그림에 담기면서 지금도 카톡으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보내주기도 한다. 여러 좋은 말이 있지만, 나에게 가장 강렬하게 와 닿은 말은 ‘사람을 수평적으로 보자’는 거다.

사실 우리 인류문명과 문화를 들여다보면, 옛날에는 모든 시스템이 수직적인 구조였다. 최고 위에는 황제가 군림했고 그 밑으로 왕과 귀족, 평민, 노예 제도를 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전횡을 휘둘렀다. 온갖 갑질에 인권도 없었고, 그보다 밑에 있는 여자와 짐승들은 말할 것도 없다.

몇천 년 동안 수직적 구조로 되어 있던 질서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면서 역사는 진보해 왔다. 과거에는 백성이 임금을 뽑는다는 것을 상상 못 했지만, 지금은 강아지도 한 식구처럼 함께 지내는 시대로 바뀌었다.

 

-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10만 원권 가상지폐에 넣어 이슈가 됐는데.

▲ 현재 친구들과 모여서 온라인에서 ‘말하고 싶다’라는 기획전시를 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로 온라인상에서 10만 원 권을 발행했다. 지금은 5만 원권만 있는데, 내가 가상의 ‘재동은행’ 총재 명의로 해서 창안한 작품이다.

돈에 그린 세종대왕이나 퇴계 이황, 신사임당 그림도 좋지만,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어 가거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고 어려움을 타개해 나가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또는 나름대로 영웅적 인물들을 그렸다. 그중 한 사람이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다.

이런 분을 10만 원권에 넣어도 되지 않겠나. 사람들도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앞으로도 200달러 지폐를 만들 예정이다. 여기에 이미 고인이 됐지만, 미국의 경찰 무릎에 죽임을 당한 흑인 ‘로드니 킹’이나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로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이 함께 있는 백두산 그림도 넣고 싶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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