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이 적어도 수심은 깊다
파동이 적어도 수심은 깊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1.02.08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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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강릉국제영화제 2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지난 1편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충분히 숙고했지만 갑작스럽게 연애를 시작했고, 그 다음날 바로 강릉의 영화제로 떠났다. 좋으면서도 혼란스럽고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소용돌이치는 상황을 유예하고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고작 연애 하나로 도피까지 행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친구를 사귈 때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레 한 사람을 마음에 들이는 나에게 연애란 늘 너무 빨라 체할 것만 같은 관계의 유형이다. 그럴 때 어느 도시에서 영화제가 열리고 있다면 그건 운명의 선물과도 같다. 영화제만큼 거북이에게 적합한 여행과 축제가 없기 때문이다.

 

ⓒ위클리서울/ 출처 강릉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위클리서울/ 출처 강릉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21세기를 살아가는 20대의 연애와 여행은

연인과의 모든 기념일을 자동으로 체크해주는 어플을 다시 다운받았다. 21세기 20대의 연애란 어플을 다운받는 데서 시작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기념일을 챙긴다는 건 서로의 만남에 중요한 날들을 기억하고 일일이 센다는 데서 오는 로맨틱 때문일 텐데, 우린 너무 바쁘니 기계가 알려주는 알림에 맞춰 맛있는 저녁을 먹고 선물을 주고받는다. 여기에 가끔 회의감이 들어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로맨틱은 챙기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어플을 다운받자마자 ‘Trip’이라고 이름 붙인 폴더를 열었다. 거기에 게스트하우스 예약 전용 어플부터 상세한 지도 어플까지, 여행과 관련한 모든 어플을 모아놓았다. 익숙하게 열차 어플을 열어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기차를 편도로 예매했다. 가끔 편도로 교통편을 끊을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어딘가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일 땐 일종의 해방감마저 든다. 거기다 단순한 여행이 아닌 영화제 탐방이므로 내가 원하는 만큼 영화를 양껏 볼 수 있다는 달콤한 장점도 있다. 여행으로의 교통편이든 예술을 즐기기 위한 티켓이든 간에, 예매는 늘 옳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받은 지도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게스트하우스에서 받은 지도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지도 없이 다닐 수 있는 동네

강릉에 도착한 직후의 심정은 지난 편에 다뤘으니 간단하게 넘어가려 한다. 놀랍게도 이번 영화제는 강릉에서 열린 첫 번째 영화제라서 연애(첫 연애는 아니다)를 막 시작한 나에게 큰 위로와 응원이 되었다. 어느 도시와 이방인인 내가 함께 첫 걸음마를 떼며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다. 사실 완벽한 이방인이라기엔, 강릉은 친숙한 곳이다. 20대 초반엔 비행기가 좋아 일 년에 몇 번씩 제주를 방문했지만, 중후반부터는 어쩐지 열차를 타고 강릉에 다니기 시작했다. 바다는 늘 보고 싶지만 점점 시간과 체력이 줄어든다. 서울에서 2시간이면 열차를 타고 당도할 수 있는 가장 멋진 바다, 강릉을 손쉽게 고르는 이유다. 조금 서글픈 변화여도 지도 없이 다닐 수 있는 동네가 하나 더 늘었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런 강릉이니까 영화제라면 대환영이다. 가끔 낯선 도시에서 영화제가 열리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곳을 돌아다녀보고 싶은 욕구와 영화를 보고 싶은 욕구가 충돌해 고민스러울 때가 많은데, 이제 강릉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관광지가 남아있지 않다. 영화만 보고 가끔 바다에만 가면 만사형통이다. 참 편안하고 안정적인 탐방기가 될 것 같지 않은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당연히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꼭 강릉 편의 끝까지 모두 읽어주시기 바란다.
 

ⓒ위클리서울/ 출처 강릉국제영화제 홈페이지
영화 포스터
ⓒ위클리서울/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위클리서울/ 영화 스틸컷

수묵화를 닮은 강릉, 그리고 영화제

이제는 영화 이야기를 해야겠다. 실은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동아리 친구와 연락했다. 그 동아리에선 강릉에 온 사람이 나를 포함한 세 명이 전부였다. 역시 처음 열린 영화제라 미리 알고 스케줄을 비우기도 어렵고, 11월은 비수기 중에서도 정말 비수기라서 여행 겸 떠나기엔 걸리는 구석이 많아 그랬을 것이다. 영화제를 즐겨 찾는 영화 동아리조차 이런 사정이니, 영화제에 사람이 적을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걱정은 현실이 되어 치열한 예매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도망치듯 떠나온 터라 영화를 하나도 예매하지 못했는데, 동아리 친구 둘이 보기로 한 영화를 뒤늦게 도전했다가 쉽게 성공했다. 무려 한국인이 사랑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인데도 그랬다. 이 영화, <원더풀 라이프>(2001)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다. 다큐멘터리로 시작한 감독의 초기 특성이 진하게 묻어난 작품으로, 잔잔하고 파동이 적지만 그만큼 수심이 깊어 영화를 보면서도 그립고 끝이 나기 전부터 여운이 남는다. 예매를 쉽게 성공했다지만 역시 인기가 많아 좋은 자리는 실패하고 목이 뻐근한 앞자리에서 보았는데, 자세가 불편해 괴로우면서도 무언가의 환영을 가까운 거리에서 올려다보는 감각이 영화의 정서와 닮아 더욱 아름다웠다. 관광지라기엔 한 편의 수묵화처럼 우직하고 고요한 강릉, 축제라기엔 잔잔하고 이지적인 영화제와 닮았다고나 할까.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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