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창 버스 터미널
고창 버스 터미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설 명절이 돌아오면 나는 습관적으로 설렌다. 딱히 무슨 볼 일도 없으면서 장 구경을 나서는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가난하면서도 화려했던 추억 때문일 것이다. 시골의 추석 명절은 그때가 딱 농번기라서 그리 화려하지도 못하고 바쁘기만 하지만, 설 명절은 완전 농한기라서 급이 다르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금년에도 아마 고창의 오일장은 미어터졌으리라. 그놈의 마스크 때문에 안경에 자꾸 안개가 끼어 구경이고 뭐고 맛이 안 나서 하릴없이 버스 터미널 부근을 배회하던 중에 신박한 소리를 들었다.

“야 이년아. 네가 틀렸어 - 어.”

“이런 미친년이 시방 뭔 소릴 하는 거여 - 어.”

“오매 이런 잡년 좀 보소.”

등등 험악한 욕지거리가 거침없이 오가는데 그 목소리의 높낮이는 험악하지 않고 오히려 기쁨이 시냇물처럼 잘잘 흐른다는 느낌이다. 말꼬리가 길게 늘어지다가 휘어지는 것이 마치 무슨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가슴에 착착 안겨든다는 느낌이기도 하다. 이게 뭐냐. 얼마 만에 듣는 질박한 소리인 것이냐.

40대?

50대?

어쩌면 60대인지도 모른다. 그것조차 아니라면 30대 후반?

내 눈이 까막눈인지 나는 도대체가 사람의 나이를, 특히 여자의 나이를 가늠하지 못한다. 남자는 그런대로 자신의 나이를 얼굴이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낸다는 느낌이지만 여자는 그것조차도 아니다. 화장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진하면 나이가 좀 들었겠구나 싶어지고, 화장을 한 듯이 안한 듯이 엷으면 나이가 파랗구나 싶을 뿐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람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쨌든 나로서는 보물을 발견한 셈이다. 지금은 게을러 터졌기도 하고, 그런 에너지가 없기도 해서 시간을 내기 어렵게 되고 말았지만, 한때는 기차역 대합실이나 고속버스 혹은 시내버스 터미널, 여객선 대합실 같은 데를 호기심 많은 소년처럼 기웃거리고 다니기를 직업처럼 했던 적도 있다.

아무 하는 일도 없으면서 마치 바쁘게 무슨 일인가를 하는 것처럼 열심히, 부지런히 헤매고 다니다 보면 문득 귀에 잡히는 어떤 소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멈춰 서서 귀를 쫑긋 세우고, 한참을 그렇게 남의 얘기를 엿듣고 있다 보면 나는 어느새 바보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는 것이니,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책 한 권을 선 채로 다 읽었다는 뿌듯함이랄까, 뭐 그런 어떤 재미가 있던 것이다.

요즘의 시골 버스 터미널은 그런 재미를 누리기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할 만하다. 터미널 자체가 아예 기다림의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을도 많고 집은 많아도 사람은 없는 까닭에 버스 배차 간격이 시간 단위로 줄어버렸고, 그 바람에 타야 할 버스를 놓치면 기본적으로 한 시간 반은 기다려야 하고, 노선에 따라서는 서너 시간까지도 기다려야 한다. 타야 할 버스를 놓친 남자들은 기다리는 동안 막걸리라도 마시자며 술집을 찾았다가 술이 취하는 바람에 다음 버스마저 놓치고 결국은 택시를 타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이른바 수다 떨기로 넘쳐나는 시간을 활용하는 것이니, 나처럼 길거리 독서랄까 귀동냥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의 여건이 형성돼 있는 셈이다.

코로나19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린다 해도 설 대목은 역시 설 대목이라서, 장터는 옛날 같지 않다 해도 버스 터미널은 제법 붐빈다. 그 중에 한 팀이 내 귀에 장착된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거침없이 터지는 걸쭉한 소리에 와아 이거 대박이다. 혼자 실실 웃어가며 버스 시간표가 부착된 기둥에 등을 대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묘하다. 서로가 서로를 고모라 부르기도 하고, 너라 하기도 하고, 이년아 저년아 하기도 하니, 이게 대체 무슨 족보인가 어리둥절해서 한참을 계산해 보았다. 그러다가 딱 잡았다.

 

기다림
기다림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아아 그렇구나. 오빠를 교환한 것이로구나. 날아가는 새만 봐도 웃음이 터지던 시절에 너는 내 오빠를, 나는 네 오빠를, 하는 식으로 교환한 것이 틀림없어.

아주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그 방면으로 전혀 아는 게 없었다면 아마 그런 추론은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언제인가 하면, 언제인지 햇수도 기억나지 않는 시절에 여자후배 한 사람이 자신의 친구를 데려다가 자기 오빠에게 소개했다. 친구가 너무 좋다고, 마음씨도 좋고 재주도 좋고 다 좋다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보내는 건 너무 아깝다고, 등등 수많은 이유를 대서 오빠를 회유했다.

일이 잘 돼서 오빠도 그녀의 친구를 마음에 들어 했고, 마침내는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일 년이 채 안 돼서부터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렇게도 친하던 그녀들이, 그렇게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밤잠까지 설치는 원수지간이 될 줄이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 앞에서 사람들은 어리둥절해 했고,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재미있다고 킬킬대며 틈만 나면 그들을 술자리 안주로 소환해내곤 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도 간단해서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너 왜 우리 오빠한테 함부로 해? 너 왜 우리 엄마한테 고분고분하지 않고 대들어? 등등 근거도 딱히 대지 못하는 이유로 시누이가 눈에 불을 켜고 덤비면 올케는 내가 뭘? 너 왜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지랄이야? 하고 응대를 한다. 그러면 시누이는 어따 대고 반말이야 반말이 하고 꽥꽥 소리를 질러대고, 그러면 올케는 내가 네 오빠 아내이니 너보다 계급이 높다고, 그러니 오빠를 대하듯이 대해야 하는 거라고 엄숙하게 충고한다. 그러면 시누이는 네까짓 게 무슨 올케씩이나 되느냐고, 올케 자격은 하나도 없다고 대들고, 그러면 올케는 헤어지라는 거냐? 이혼이라도 하라는 거야? 하고 대드는 방식으로 싸움의 이유는 끝도 없이 늘어나는 것이었다.

 

대기중인 버스들
대기중인 버스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싸움이 누적되던 어느 하루는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보다 못한 오빠가 따로 방을 얻어 나가면서 대충 수습이 되긴 했지만, 그 뒤로도 명절이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시누올케가 서로를 노려보거나 흥흥, 코웃음을 치는 방식의 티격태격 싸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노려본다고 했지만 사실은 시누이 쪽이 먼저였다. 싸움을 거는 사람은 언제나 시누이였다. 오빠를 친구에게 내주고 나니 손해 본 느낌이서 그렇게도 친구가 미워 보이는 걸까? 만약에 서로가 서로의 오빠를 남편으로 두게 되었다면, 그래서 나는 너의 올케도 되고 시누이도 되고, 너 또한 나의 올케도 되고 시누이도 되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면 손해 본 느낌 같은 건 없을 테니 싸움도 없었을까?

아니다. 그날 터미널에서 발견한 두 친구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다는 여실한 증거를 내게 보여주고 있었다. 요컨대 시누올케라고 하는 거, 그 관계 사이에는 인간 감정의 모든 희노애락이 다 녹아들어 있어 있는 것이어서 누구도 함부로 멋대로 규정지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날 터미널에서 발견한 그들이 서로를 고모라 호칭하면서도 이년, 저년, 소리를 거침없이 입에 올리는 표면상의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내 남편이 되어 있는 네 오빠가 미워죽겠다는 거, 그래서 친구인 너도 밉다는 거.

미운 이유도 복잡하지 않았다. 한쪽 남편은 친구가 너무 없어서 밉고, 상대편 남편은 친구가 너무 많아서 미워죽겠다는 거다.

 

드디어 차가 왔다
드디어 차가 왔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친구가 없는 남편은 친구가 없는 탓으로 집에서 온갖 말썽을 다 부린다. 친구가 많은 남편은 거의 매일 밤마다 친구들을 데려와서 함께 놀자고 떼를 쓴다. 그래서 친구가 없는 남편을 둔 아내는 “내 오빠가 많은 친구를 두고 있으니 너는 복에 겨운 거다”고 핀잔을 주고, 친구가 많은 남편을 둔 아내는 “내 오빠가 친구 따위를 두고 있지 않으니 너는 얼마나 한갓지고 좋겠느냐”고 역시 핀잔을 준다.

친구가 없는 남편이 부리는 말썽이라는 것은 가정경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아내의 속이 다 타서 지금은 숯검뎅이 됐을 거란다. 이를테면 이 세상의 공구란 공구는 모두 사 들여서 집안이 온통 무슨 철공소 내지는 카센터 꼴이 되고 말았다는 거다. 작은 공구는 수백 개도 넘어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고, 큰 공구는 산소 용접기와 전기 용접기가 각 한 대씩 있고, 콤프레샤도 큰 것과 작은 것이 각 한 대씩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다 쓸 데는 하나도 없는 장식품에 불과한 것들이란다.

명분은 좋아서 농사용 트럭이나 트랙터에 이상이 생겼을 때 손수 고친다는 것이지만 무슨 특출한 기술이 있어서 그런 장담을 하는 것도 아니다. 트럭이 고장 나면 여기저기 몇 번 두드려보다가 결국은 카센터로 달려가니 이게 뭐냐는 거다. 심지어는 남들이 트랙터 앞에 불도저용 삽날을 달고 다니는 게 부러워 보였던 것인지 자기도 그것을 세상에, 멀쩡하니 두 눈 뜨고 있는 아내와는 의논도 없이 이백 만원씩이나 처들여서 달고 말았다. 그런데 달아놓고 보니 쓸 데도 없으려니와 운전에 방해가 돼서 그만 뜯어내고 말았는데 또 한 번 세상에나, 이백 만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까지 하더라는 것이었다.

친구 없는 남편을 둔 아내의 이런 문제제기에 친구 많은 남편을 둔 아내는 기가 막혀 죽겠다는 듯이 코웃음을 몇 번이나 치다가는 “우리 오빠가 결혼 전부터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쪽으로 관심이 많았었는데 지금도 역시 그렇구나. 너는 복 받은 거야 이년아. 불쌍해 죽겠네 그냥. 이런 바보 같은 년을 마누라로 두고 있는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쩔까.”하고 짐짓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웅성웅성
웅성웅성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이어서 그녀는 자기 친구의 오빠,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얼마나 못된 짓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에 대한 흉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한 가지에 집중해서 전문성을 길러야 미래가 보이는 것이거늘, 그제는 볼링 클럽의 멤버들을 데려오고, 어제는 등산모임의 친구들을 데려오고, 오늘은 낚시회 회원들을 데려온다고 하더니 내일은 배드민턴 클럽이 예정돼 있다 하고, 이제 곧 골프를 배우겠다고 설쳐대고 있으니 이게 뭐냐는 거다. 무엇보다 기가 막힌 것은 그 모든 수발을 아내가 들어야 하고, 손님 명색으로 찾아오는 이들은 과일 바구니나 한 개 들이밀고 말지만 술이며 안주며 각종 비용을 집 주인이 다 감당해야 하니,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그만 죽자는 것도 아니고 이 무슨 퇴행적인 퇴폐 짓이냐는 거다.

친구가 많은 남편을 둔 아내의 이런 푸념에 친구가 거의 없는 남편을 둔 아내는 촌각의 망설임도 없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사람이 세상을 산다는 게 뭐냐. 나와 내 가족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며 마시고 먹는 재미 이상의 무슨 재미가 따로 있다는 거냐.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웃고 떠들고 마시다 보면 활력이 생기고, 아드레날린이 솟아나서 건강에도 좋은 건데 그게 왜 나쁘다고 강짜를 부리는 것이냐는 거다.

오빠를 교환한 두 친구의 티격태격 싸움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이어졌다. 새로운 소재는 없었다. 각자가 앞서 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도돌이표가 한참을 이어지다가 겨우, 간신히,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아이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즈음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 이야기를 엿듣다 보니 문득 한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란 역시 답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로구나. 아니다. 어쩌면, 어쩌면 이런 식의 티격태격한 싸움이야말로 인생이란 이름이 갖고 있는 참맛인지도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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