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탐방기] 강릉국제영화제 3편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강릉국제영화제다. 첫 날,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친구와 같은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친구 한 명을 더해 총 셋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를 감상했다. 우울과 불안의 시대에 ‘코로나 블루’까지 쌓인 요즘, 인생의 소중한 기억을 영사하는 영화를 되돌아보며 마음의 기지개를 펴보려 한다. 이번 3편은 강릉국제영화제에서 감상한 영화 ‘원더풀 라이프’의 이야기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인생의 마지막에서 고르는 단 하나의 기억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원더풀 라이프’는 인생의 경이로움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정확히는, 보여주는 영화다. 배경은 죽은 자들이 천국으로 가기 전 일주일 동안 머무는 중간역 림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고 이를 바탕으로 직원들이 만든 짧은 영상을 본다. 오로지 그 기억만을 가지고 천국에 가게 된다니, 신이 내린 마지막 선물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디즈니 영화 ‘소울’(2020)이 태어나기 전 세상의 모습을 그려내며 거꾸로 현실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역설한 바 있다. 두 영화 모두 삶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짙게 채색하며 공기처럼 당연하고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선사한다. 우리는 끝없는 욕망과 권태를 지닌 존재라서 일상을 잃어버리거나 미처 누리지도 못한 이전으로 돌아가야 그 소중함을 복귀시킬 수 있나보다. 그 아이러니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행복을 쉽게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이 진리를 미리 발견하고 잊지 않은 누군가가 만든 영화를 보며 은은한 깨달음을 느끼는 것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아닐까 싶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면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처럼 다채로운 기억을 하나씩 고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예 선택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일상이 너무나 소중해서 단 하나를 고를 수 없는 사람도 있고, 특별한 삶을 원했지만 너무 평범하게 살아 고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며, 어린 딸이 크는 모습을 보고 싶어 완전한 죽음을 유예한 채 직원으로 지내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주인공이지만 좀 더 초점이 맞춰진 모치즈키(이우라 아라타)와 시오리(오다 에리카)는 소중한 기억이 없어서 고민을 끝내지 못한 쪽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직원으로 살아가며 다른 이의 삶을 듣고 소중한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주지만 정작 자신들의 선택은 내리지 못한다. 단 하나의 기억만 지우면 모든 게 괜찮았다는 어떤 사람처럼 암울하거나 분노에 가득 차지도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하다. 마치 영화 ‘소울’에서 삶에 대한 의지와 자신이 없어 탄생을 미루고 있는 영혼 22(티나 페이)처럼 텅 비어 보인다.

그런 모치즈키는 선택을 어려워하는 할아버지 와타나베를 만나게 된다. 그를 돕기 위해 그의 인생 전체를 녹화한 테이프를 보여주는데, 우연히 약혼녀 쿄고가 자신의 죽음 뒤에 와타나베의 부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치즈키가 전사(戰死)한 후 약혼녀인 쿄고가 어쩔 수 없이 와타나베와 결혼했던 것이다. 쿄고는 모치즈키를 깊이 사랑했고 와타나베 역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기 때문에 부부는 살아생전 진실한 마음을 주고받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 테이프를 본 와타나베 할아버지는 부인 쿄고가 좋아한 영화를 함께 보던 날을 고르며 마지막에야 마음을 연다. 그리고 쿄고가 오랫동안 모치즈키를 잊지 못하고 기일마다 묘지에 다녀갔다는 편지를 남겨둔다. 이 모든 사실을 몰랐던 모치즈키는 괴로워하다 동료 시오리의 도움으로 쿄고가 고른 마지막 기억을 보게 된다. 그녀는 모치즈키가 전쟁터에 가기 전에 함께 벤치에 앉아있었던 장면을 골랐었다. 50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치즈키는 후련한 마음으로 마지막 기억을 고른다. 바로, 동료들과 함께 누군가의 행복했던 기억을 영상으로 만들어 상영했던 나날들이다.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 ‘원더풀 라이프’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난 너를 잊지 않을 거야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 에피소드는 그동안 제각각의 삶으로 등장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세 명이 얽힌 이야기였다. 전쟁에서 죽은 약혼자를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지 못한 사람,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결혼해 평생 마음을 열지 못했던 사람, 자신이 그토록 사랑받았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이었다. 이 인연이 살아생전엔 비극이었지만 중간역 림보에서는 끝까지 사랑한 사람과의 기억을 간직한 채 천국으로 가게 된 사람, 평생을 함께 한 부인을 비로소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 사람, 자신이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행복해진 와중에 모치즈키를 좋아했던 동료 시오리는 그가 림보를 떠나 완연한 죽음에 이르는 것을 환영할 순 없다. (단 하나의 기억을 고르면 나머지 기억은 모두 잊게 되므로) 이곳에서의 기억을 잊기 싫어 선택을 미루던 그녀는 모치즈키가 자신을 잊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또한 약혼녀 쿄고와의 기억을 고르리라 예상하고 절망하지만, 모치즈키는 동료들과 함께 했던 림보에서의 일상을 고른다. 중간역 림보와 시오리를 포함한 동료들을 모두 잊지 않은 채 마지막 여정을 떠나기로 한다. 결국 마음이 엇갈렸던 네 사람 모두가 각자의 소중한 기억을 품은 채 마지막까지 행복해진다. 모치즈키는 시오리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내가 선택하기로 결심한 건 이곳에서 생활하며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나는 절대로 이곳을 잊지 않을 거야. 난 너를 잊지 않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기억으로 누군가와 함께 했던 순간을 고른다. 개인적인 행복 같아보여도 자신의 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거나 좋아하는 사람의 가방에 달린 방울 소리를 기억하는 경우들이다. 우리가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유는 부재를 넘어선 소멸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함께할 수 있는 날이 소멸된다는 것, 이전에 함께했던 기억이 소멸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했던 순간을 잊지 않고 마지막까지 기억한다는 것은 소멸에 반대하고 종국엔 죽음을 이겨내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면 내가 내릴 마지막 선택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어떤 기억을 고를 것인가, 영원히 머물고 싶은 순간이 있는가. 아직은 확실한 답을 내리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그 선택이 누군가와 함께한 일상에 가깝기를 바라본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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