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그 시절의 편지는 아니지만
그 시절의 편지는 아니지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설 명절 차례를 함께 지내고자 남동생 하나와 그의 각시 그리고 갓 대학생이 된 조카 둘이 왔다. 남동생 하나는 올까 말까 하다가 5인 이상 집합금지 정책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포기하고 새우 양식장을 가기로 했단다. 처가에서 새우 양식을 하는데 요즘이 엄청나게 바쁜 시기라서 일손을 돕기로 했다는 거다.

무슨 새우 양식이 벌써부터 그렇게도 바쁜가 해서 한참을 따져 보았다. 고창에도 새우 양식을 하는 데는 많고, 그동안 내가 보아온 새우 양식장은 이 계절에 바쁘기는커녕 사람 한 명 구경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상을 알고 난 뒤에는 아하, 하고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알고 보니 고창에서 하는 새우 양식은 관리가 어려운 유생기를 건너뛴, 사람으로 치자면 유치원생 정도까지 성장한 녀석들을 받아다가 기르는 양식이었다. 사람이 태어나면 갓난애라는 이름으로 젖을 빨고, 젖을 빨다가 암죽 같은 이유식을 오물오물 씹는 듯이 흡수하는 듯이 해서 유아기를 거친 뒤에 마침내 밥을 먹고 걸음마를 하듯이, 새우도 그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이다.

알에서 갓 태어난 새우 유생은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단다. 이게 새우인지 티끌인지 식별조차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자연 상태의 새우 유생은 티끌처럼 물속을 흘러 다니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 굴을 만나면 일제히 달라붙어 굴 특유의 미끈미끈하게 부드러운 살점을 빨 듯이 흡수해 들이지만, 양식을 목적으로 인공 부화를 시킨 새우 유생은 사람이 굴을 따다가 까서 드세요, 하고 바쳐야만 한단다.

굴을 한꺼번에 많이 잡아다가 까서 며칠분의 양식을 비축해두고 조금씩 주는 것도 아니다. 그때그때 날마다 식사 때마다 적당량의 굴을 따다가 정성껏 신선하게 까서 바쳐야지 한꺼번에 많이 아무렇게나 던져주면 죄다 폐사해 버린다나. 그래서 그 일은 아무나 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대부분의 새우 양식장은 유생기를 거친 유치원급 애들만 데려다가 키운다는 것이다.

새우가 유생 시절에 굴을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일까? 어쨌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장어가 생각났다. 일본의 장어 전문가들이 애를 태우고 있다는 장어. 인공부화까지는 성공했지만 유생 시절의 먹이가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해서 밤잠을 못 이룬다던가. 장어는 새우와 달라서 아주 깊은 해저에 알을 낳기 때문에 장어 어미를 잡아다가 회유 내지 고문을 해서 알아내지 한 현재로서는 깜깜 어둠 속에서 바늘귀를 꿰는 것만큼이나 오리무중이라는 거다.

새우와 장어를 생각하다 보니 또 엉뚱한 상상이 꼬리를 친다. 나는 아무래도 생전에 철이 들기는 틀렸나 보다. 만약에 사람을 식용으로 사육하고자 하는 외계인이 있다면 그들은 갓난아이를 어떻게 만들어낼까, 그리고 갓난아이는 밥이나 고기가 아니라 젖을 먹여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해서 알아낼 수 있을까.

 

우리 동네 우체국
우리 동네 우체국

‘만약에’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이 수천, 수만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면, 오늘 갑자기 한꺼번에 생겨났다면 어떻게 죽지 않고 생존해 나갈 수 있을까. 산과 들과 바다에 즐비한, 수많은 먹을 것들 가운데 무엇은 먹어도 괜찮고 무엇은 먹으면 즉시 죽음에 이른다는 무서운 사실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차례상 앞에 무릎을 꿇고 향을 피우는 순간 아하, 하고 일종의 깨달음이 왔다. 우리가 특정한 날을 정해놓고 매년 그날이 오면 차례상을 차리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죽음으로 빠지는 길과 삶에 이르는 길을 어렵게 알아내서 전해준 선인들의 노고를 치하함과 아울러 감사를 표하는 행위였던 거야 차례라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뭔가 없던 것이 새로 생겼다는 기분이다. 뿌듯하기도 하다. 예전에는 명절에 차례만 지내고 말았지만, 금년 설날은 날씨도 좋고 하니 내친김에 성묘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그런데 조카 녀석 하나가 내내 말이 없더니 차에 올라타서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어디 아픈가 했더니 아니다. 요즘 날마다 밤에 잠을 안 자고 뭔가를 하다가 아침이 오면 잠자리에 든다는 거다.

“하긴 그 나이가 그런 나이다.”
한 마디 하고 나니 문득, 내 나이 스무 살 이전 시절의 일이 판타지 영화처럼 떠올라 온다. 고요한 밤이 아까워서 잠잘 시간도 낼 수가 없었던 그 시절, 겨우 십여 분밖에 안 지난 것 같은데 어느새 날이 새버렸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해 했던 그 시절, 그 시절에 나는 편지 쓰기에 빠져 있었다. 아니 미쳐 있었다.

아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는 아니었다. 완전 생면부지의 소녀에게 쓰는 편지였다. 한 소녀에게만 집중적으로 쓰는 편지도 아니었다. 거의 매일 편지를 쓰지만 어제 쓴 편지의 수신인과 그제 쓴 편지의 수신인이 달랐다.

그게 가능한 시절이었다. 그것을 펜팔이라고 했다. 거의 모든 잡지가 펜판란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나이와 신분을 적은 종이와 함께 우표를 열 장 내지 스무 장 동봉해서 보내면 다음호 잡지에 그것이 그대로 실린다. 그러면 한 달 이내에 적어도 한두 통 정도의 편지가 온다.

잡지사가 펜팔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표를 열 장 내지 스무 장 요구하는 까닭이 무엇이었는가를 지금 생각하면 너무너무 깜찍하고 발칙해서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이다. 하긴 오늘날의 우표 값과 그 시절의 우표 값은 그 무게감이 달랐다. 우표를 한꺼번에 열 장 또는 스무 장씩 사서 보내는 돈이 아까워서 며칠씩이나 신청을 할까 말까 고민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달랑 한 줄 실어주는 광고료 치고는 비쌌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펜팔 신청을 내가 직접 했던 기억은 모호하지만 두 번을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렇게 하면 정말로 누군가가 내게 편지를 쓸까? 하는 의구심 내지 호기심에서 보냈던 것이니 일종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실험을 세 번 네 번 계속 할 필요는 없었다. 잡지를 펼치면 맨 뒤에 두세 장 정도의 펜팔란이 있고, 거기에 무슨 사전처럼 빽빽하게 한 사람당 한 줄씩 펜팔을 희망하는 사람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데 굳이 우표를 낭비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펜팔을 목적으로 잡지를 직접 산 경우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잘해서 두세 번 정도? 열심히 발품을 팔면 잡지 정도는 그리 어렵잖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잡지를 통째로 가지고 나오는 것은 아니고, 종이와 연필을 들고 가서 마음에 드는 이름을 골라 적는 방식이었다. 종이와 연필이 없는데 마음이 급할 때는 펜팔란 페이지 한 장 정도를 남몰래 슬그머니 찢어내는 굉장한 모험을 감행하기도 했으니, 그 시기의 나는 아마도 부끄러움이라든가 양심 같은 것을 꽁꽁 싸매서 밀봉해두고 있었으리라.

현실적인 부끄러움은 사실 다른 데 있었다. 도대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것도 여자에게 편지를 쓰면서 무슨 말로 인사를 삼을 것이며, 무슨 말로 본문을 삼을 것이며, 마지막 인사는 또 무슨 말로 할 것인가 말이다.

자, 여기 한 여자의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을 보고 또 본다.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계속 보다 보면 뭔가 느낌이 생긴다. 이 느낌을 소재로 편지라는 것을 쓴다.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얼굴이 확확 달아오른다. 가슴도 팡팡 뛰어대고, 눈앞은 캄캄해서 무슨 쥐구멍에라도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어쩔 것인가. 그때까지 쓴 편지를 와락 구겨버리고, 구겨버린 뒤에도 부끄럼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으면 다시 펴서 짝짝 찢어버린다.

무슨 말을 썼기에 스스로도 부끄러웠던가는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편지 쓰기의 실패가 누적되면서 지혜랄까, 기술이랄까, 편법이랄까, 따지고 보면 더 깊은 부끄러운 방식을 채택했다는 기억은 아직도 부끄럽게 남아 있다.

내 말에 자신이 없어서 유명한 시인이나 소설가 혹은 에세이스트의 문장을 인용하거나 변용하거나 아예 통째로 옮겨 쓰는, 이를테면 남의 말을 내 말처럼 쓰면서도 그때는 부끄러운 줄도 몰랐던, 부끄럽기는커녕 그런 방식의 편지 쓰기를 고안해낸 나 자신이 훌륭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니 아이구야, 무지렁이도 이런 철면피한 무지렁이가 지구상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어쨌든 뭐 그때는 그랬다. 남의 말을 내 말처럼 쓰기 위해서 책을 새로 사기도 했다. 책을 읽고 싶어서 책을 사는 게 아니라 편지를 쓰기 위해서 책을 사는 그런 우매한 짓을 하느라 내버린 돈도 아마 꽤 될 것이다. 그리고 잊었다. 잊는다는 생각도 없이 잊었던 그 시절의 그 책들이, 그 기억이 ‘나 여기 있어’ 하고 찾아올 줄은 당연히 꿈에서도 몰랐다.

 

부끄러운 기억들
부끄러운 기억들

몇 년 전이던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청계천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서울 시민이었을 때는 그렇게도 많았던 헌책방이 다 사라지고 몇 개 안 남아 있는데 이게 뭐냐. 낯익은 디자인의 케케묵은 책 꾸러미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거였다. 한눈에 그냥 봐도 ‘촌티’가 잘잘 흐르는 디자인에 제목조차도 낯간지럽기 한이 없는 그 책은 도대체가 나와는 아무 인연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언제인가 본 것만 같아서 한참을 서서 뒤적거려 보았다.

오매 이것이 이것이었네, 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순식간에 스무 살 이전 시절로 돌아갔다. 감개가 무량했다. 부끄러움도 촌스러움도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때 했나 어쨌나. 하여튼 그 책들을 모두 사서 들고 왔다. 사서 들고 오긴 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읽지도 않을 헌책을 왜 사 들고 왔는가는 지금도 모른다.

“그렇게 펜팔을 해서 결혼까지 한 경우도 있었을까요?”

나의 펜팔 시절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제수씨가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제수씨의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한순간 멍, 해져 버렸다.

결혼?

결혼이라고?

결혼을 목적으로 밤을 꼬박 새워가며 편지를 썼던 것일까?

결혼 같은 것을 생각해본 기억은 없다. 전혀 없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연애는커녕 둘이 따로 만날 생각 자체를 아예 해보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그런 욕망을 갖지 말자고 해서 안한 게 아니라 그냥 없었다.

달리 무슨 목적이 있어서 밤을 새가며 편지를 쓴 것이 아니었다. 요즘의 세계관으로는 아마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편지를 쓰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온 몸에서 끓어오르는, 넘치는 에너지를 어떻게 소진시켜야 할지, 그 방법을 몰라서 허둥거리다가 발견한 것이 편지 쓰기였던 셈이다.

그 기간이 아마 삼 년은 넘고 사 년은 채 안 됐었으리라. 삼년 남짓한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쓰기도 하고 이삼일에 한 번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세 통 혹은 서너 통 이상씩 쓰기도 했으니 단순계산으로만 봐도 천 통은 넘는다. 그 많은 편지를 받은 그녀는, 그녀들은 누구일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지금 새삼스레 그것을 궁금해 하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 왜 그것이 궁금한 것일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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