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양미의 ‘해장국 한 그릇’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위클리서울=김양미 기자]  내가 아는 동생이 하나 있다. 옥봉이라고.

그 아이는 예쁘고 시도 잘 썼다. 그런 옥봉이가 어느 날 노트 한 권을 남겨두고 자살을 했다. 거기엔 그 애가 그동안 쓴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 남자에 대한 사랑과 눈물이 고양이 털처럼 잔뜩 묻어 있는 그런 글들이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옥봉이 나에게 말해주었으니까.

옥봉의 아버지가 사업이 망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겨 외지로 떠돌 때 만나게 된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도 가족 모두를 잃고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했다. 다리를 다친 옥봉의 아버지가 우연히 그녀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러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같이 살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 여자는 딸을 낳게 되고, 그 아이가 바로 ‘옥봉’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다 죽는 바람에 남자는 옥봉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남자의 아내에겐 그 애의 존재가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자식이었으니까.

엄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옥봉이었지만 아버지가 사다준 수많은 책들 속에서 위안과 기쁨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던 옥봉은 대학에 들어가서도 계속 시를 썼다.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었고, 좋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옥봉 앞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는 옥봉이 다니고 있는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고 있었고 이름 난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나에게 해주던 날 옥봉은 말했다.

언니.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는 말 했다. 힘든 일이 많을 텐데 괜찮겠냐고.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은 플랫폼을 떠나버린 기차와 같아서 멈추기 힘들어 보였다. 옥봉과 그 남자는 서로를 미친 듯이 사랑했고 행복했다. 시인이었던 그 남자는 옥봉의 재능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했다. 옥봉 또한 그 남자의 글과 정신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늘 조심스러웠다. 옥봉에겐 그가 전부였지만 그 남자는 자기가 힘들게 쌓아올린 모든 것이 그녀로 인해 무너질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어느 날 현실이 됐다.

옥봉은 예쁘고 재능 있는 시인이었지만 약질 못 했다. 어느 가난한 시인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됐고 그걸 도와주기 위해 옥봉은 탄원서를 썼다. 문단의 뿌리 깊은 비리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탄원서로 인해 문제가 불거지자 ‘왜 그런 짓을 해서 나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거냐’며 그는 옥봉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말했다.

꺼져버려.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그 말이 옥봉에겐 사형 선고와도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가 돌아올 거라 믿었다. 영혼이 먼지처럼 바스라져버릴 것 같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옥봉은 참고 기다렸다. 그 사람은 옥봉의 시를 사랑했고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사랑했지만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의 야망까지 버릴 수는 없었던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옥봉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울면서 말했다. 얼마 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요사이 안부를 묻습니다. 어찌 지내시나요.
창가에 달빛 비치면 가슴속 한이 넘쳐납니다.
꿈속에 내 몸, 발자국을 남기게 했다면
그대의 집 앞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옥봉이 말했다.
언니, 이젠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그렇게 옥봉은 떠났다. 그녀가 쓴 시와 사랑을 남기고….

……………

장정희 작가의 소설 <옥봉>  ⓒ위클리서울/ 김양미 기자

장정희 작가의 <옥봉>이라는 소설을 읽고 그 내용을 현대판으로 고쳐 써 본 글이다. 소설 <옥봉>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중기이며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녀가 살아온 세상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생각해 본다. 500년이 지난 지금 내 곁으로 옥봉을 데려와 봤지만 여전히 가슴 아픈 이야기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시인 이옥봉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허난설헌과 황진이, 그리고 이옥봉은 모두 주옥같은 시를 남긴 조선시대 대표 여성 시인이다. 그중에서도 이옥봉은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여인이다. 가혹한 가부장제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옥봉이 가지고 있었던 천부적 재능은 오히려 형벌과도 같았다. 서녀로 태어나 소실의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옥봉은 누군가를 돕기 위해 썼던 자신의 시 한 편으로 인해 사랑하는 남편에게서조차 버림받는다. 바다에 몸을 던진 건 그녀의 선택이었지만 옥봉을 벼랑 끝으로 끌고 간 건 결국 수많은 ‘그들’이었다.

세상엔 내가 모르고 산다 해도 아무 문제될 게 없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책이고 예를 들면 <옥봉>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되고 나면 마음 한 편에 실금 같은 균열이 일어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책이고 예를 들면 <옥봉>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남았던 옥봉의 말 몇 구절을 옮겨 적어 본다.

‘일자무식의 부월보다 못한 것들이 잘난 척하며 세상을 휘어잡는구나. 허위와 위선. 그것이 문자 속을 들먹이는 먹물들의 정체이니라. 글쓰기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절대 나서지 않는 비겁함,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용렬함, 가진 것이 많으니 잃을까 두려운 것 아니겠느냐.’

‘얼굴에는 미소를 띠면서 등에 칼을 꽂는 족속 또한 먹물들이니라. 당파 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세상이 그것을 증명하지 않더냐. 세상을 망치는 주범이 자신들인 줄도 모르면서, 그 잘난 남자들이 하는 일이란 단순하다. 자신들만의 문자놀이가 지식을 뽐내고 영달을 도모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느니라. 온갖 풍류와 유희를 즐기는 자신들의 문자가 왜 낮은 자의 입이 되면 안 되는 것이냐.’

‘옥봉은 부월의 단순함이 든든했다. 고통도 슬픔도 더는 헤아리지 않는 것, 파고들지 않는 것, 눈앞에 닥친 현실만을 생각하는 천진함, 그것만이 자신들이 처한 고통과 슬픔을 이겨낼 힘이 되리라 생각했다.’

서점에 <옥봉>을 사러 나선 길, 수원역 지하상가 앞에서 허리가 기역자로 꺾인 할머니 한 분이 빈 바구니를 내밀며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한 푼만 도와주세요….”

할머니 곁을 바쁜 걸음으로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세상을 산다는 건, 누군가에게 한 푼을 빚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무심한 마음속에 살다 간 옥봉과 힘든 세상을 근근이 버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김양미 님은 이외수 작가 밑에서 글 공부 중인 꿈꾸는 대한민국 아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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