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늘 모험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늘 모험이 필요하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1.03.23 0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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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강릉국제영화제 5편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지난 1편에서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그 두려움에 강릉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사연을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동아리 친구 두 명을 만났고, 다음날 친구들과 헤어지자마자 또 다른 친구가 서울에서 내려왔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추고 홀로 마음의 채비를 갖추고 싶었던 때에 또다시 좋아하는 사람들과 잔뜩 있었던 것이다. 모순적인 내 모습을 돌이켜보다가, 이 모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탐방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제에서 무엇을 보고 경험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이럴 때 스스로를 가장 많이 탐색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을 탐방하고 탐색한 이 시간들을 계속 쓸 계획이다. 이번 편은 강릉국제영화제 탐방기의 끄트머리인 5편이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출처=강릉국제영화제 홈피 

그냥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밤이 있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만났던 동아리 친구들을 소개하고 싶다. J는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었고, P는 그저 영화제를 좋아해서 떠나온 사람이었다. 끈끈하지만 느슨한 동아리에서 우리는 많이 마주쳤고 적잖은 대화를 나눴어도 이렇게 세 명이 모인 건 처음이었다. 특이한 조합이라고 느낄 새도 없이 곧바로 친구들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를 함께 보고, 감자옹심이를 먹으며 영화를 이야기했다. 자세한 설명 없이 갑자기 이야기가 전개되어 당황스러웠다는 의견부터 그래도 역시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따뜻하다는 감상까지 다양한 대화가 오갔다. 요즘 어떻게 지냈냐는 근황 토크는 한참 뒤 펍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뒤늦게 시작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없거나 친밀하지 않아서 안부를 일찍 묻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은근하게 약속된 대화의 단계나 패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문턱이 낮은 사이라서 오히려 가능한 것이다. P는 술 한 잔을 시켰고, J는 음료수를, 나는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다양한 음료를 파는 펍에서 우리는 각자의 편안한 모습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자유로이 나눴다. 나도 모르게 사실은 어제 연애를 시작해버렸다는 고백을 털어놓았다. 물론 여느 20대의 연애가 그렇듯, 절대 깨지지 않으리라는 단단한 확신으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라서 바로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스스로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무조건 응원을 해주는 친한 친구들이나 경계부터 하고 보는 가족들과는 다른, 무언가 새로운 반응을 기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아직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을 슬쩍 꺼내보았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P와 J는 덤덤히 놀랐고,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나라면 연애를 시작했다는 고백에 떠들썩한 축하와 질문세례를 던졌을 텐데, 타인의 사생활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는 성숙함과 조심성이 느껴졌다. 그저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영화제로 떠나온 것은 조금 희한하고 재밌는 일이라는 뉘앙스로 조심스레 이유를 물어봤다. 나는 그동안 연애를 하지 않았던 기간에 삶의 만족도가 얼마나 컸는지, 그럼에도 휩쓸리듯 시작하게 되는 연애에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지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공감해줬다. 자기개발과 발전에 힘쓰는 20대가 많다던데, 고작 연애 하나에 이렇게나 떠들썩해지는 내가 유치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다음날도 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 J는 먼저 잠을 청하러 갔다. 아직 체력이 남은 P와 둘이서 자리를 옮겨 시원한 맥주와 함께 각자의 지난 연애사를 와르르 털어내고, 위로 아닌 위로와 응원을 해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출처=강릉국제영화제 홈피 

언제나 훌쩍 떠나고, 탐색하고, 탐방하고 싶다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아 조심성이 많아진다. 그만큼 늘어나는 고민과 불안을 해결해야 하는 날들도 더해진다. 그럼에도 시작을 주저하지 않는 건, 소중한 것이 생기기도 전에 지레 포기해버리는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다. 마치 모험처럼 훌쩍 떠나 낯선 공간에 당도하고 당연하지 않은 사람과 처음 해보는 대화를 나누는 이런 시간들이 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떤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20대로 돌아간다면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렸던 그 술자리들에 나가지 않고, 자신을 탐구하거나 발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겠다는 이야기였다. 덜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과 꼭 함께 있을 필요는 없고 혼자 있어도 충분히 괜찮다는 좋은 메시지였겠지만, 나는 그 작가가 이런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마저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좋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누군가와 함께 할 때 내 세계는 그만큼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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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그때, 홀로 마음의 채비를 갖추고 싶었음에도 영화라는 컨텐츠가 가득한 공간에서 또다시 좋아하는 사람들과 잔뜩 있었던 내 모순을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온전히 홀로 벽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고민하다가는 무언가를 망쳐버릴 게 분명했고, 내 세계를 넓혀줄 수 있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이렇게 정리를 마칠 수 있던 데에는 한 편의 수묵화처럼 우직하고 고요한 강릉, 축제라기엔 잔잔하고 이지적인 영화제, 끈끈하지만 느슨한 친구들을 만난 덕이 크다. 이제 영화제는 정말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영화제를 가고 싶어 일상을 떠나버리기도 하고, 일상을 떠나고 싶어 영화제를 가기도 한다. 언젠가는 영화제를 가는 것 자체가 일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늘 탐방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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