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비난하는 사람들 없게 된 것 자체가 우리사회 큰 발전”
“전태일 비난하는 사람들 없게 된 것 자체가 우리사회 큰 발전”
  • 최규재 기자
  • 승인 2021.04.12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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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인터뷰]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1회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2001년 전교조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학교로 복직했는데, 휴직하고 다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2004년부터 맡게 되었다. 나중엔 민주노동당에 가입한다. 제 자그마한 꿈이 정년이었는데, 공무원의 정치활동은 허용되지 않아 학교에서 사퇴하고 이후 민주노동당과 함께 했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전교조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을 역임한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1974년 울진군 제동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해 1989년 전교조 결성에 앞장섰다가 해직될 때까지 서울 신일 중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전교조 합법화와 함께 10년 만에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복직, 33년 동안 교사로 살다 2008년 민주노동당 혁신재창당위원장직을 맡으며 퇴직했다.

두 번에 걸쳐 구속, 2년 여의 옥살이와 수년의 수배생활도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어선 한국노총, 민주노총, 경총, 상공회의소, 노동부가 참여하는 새로운 노사정 기구인 노사정 대표자회의를 구성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훗날 2기 서울특별시 교육위원을 지냈으며, 시민사회 운동을 꾸준히 이어왔다. 최근까지 전태일재단과 전태일기념관 이사장직을 맡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전태일이라는 말도 못 꺼내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전태일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 다만 그것만으로 상당히 사회가 발전했다고 본다. 우리세상이 좋아진 것은 맞다. 다만 우리가 전태일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는 데 있어 부족한 점도 많다. 그럼에도 전태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없게 된 것 자체가 큰 발전이다. 거기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게 필요하다. 그게 앞으로 우리사회의 과제다.”

전태일은 1965년부터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 재단사 등으로 일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 유명무실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 항거,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민주노조운동이 전개되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청계노조와 노동운동에 헌신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정부의 산업화과정에서 희생당하던 노동자의 삶이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학생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태일은 1970년대 이후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이 이사장은 “민주노총의 탄생은 곧 전태일 정신 계승이었다”며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전태일이 정신적 지주라는 말은 곧, 우리사회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그대로라는 얘기다. 전태일 정신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어떤 이들은 전태일을 박정희에 저항했던 장준하(독립운동가이자 고려대 전 총장)와 비교하기도 한다. 이 이사장은 “장준하가 정치적 저항을 했다면, 전태일은 자본주의 독점경제에 대한 저항을 했다. 국가가 모든 걸 장악하면서 경제적 독재를 했고 거기에 저항한 것”이라며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주의를 독점하면서 탄압하는 정권에 대한 저항이니 장준하보다는 전태일이 더 근본적인 투쟁을 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는 전태일 분신 50주년이었고 애니메이션 ‘태일이’ 제작 보고회가 있었다. 이소선 여사 서거 10주기이기도 한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배우 진선규, 박철민, 권해효 등이 목소리로 참여했다. ‘태일이’는 시민들과 노동자들의 모금 등을 통해 제작 지원이 이뤄졌다. 코로나19 사태로 영화 제작과 상영 환경이 좋지 않아 개봉이 늦어지고 있는 상황. 늦어도 올 상반기에는 극장에 걸릴 전망이다.

이 이사장은 “애니메이션 장르여서 어른에서 아이까지 또 여러 계층이 함께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한 표현이 감동을 더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태일 평전에 충실하면서도 감독 등 출연자들의 상상력이 최대한 발휘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음은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전태일 동상 ⓒ위클리서울

- 근황이 어떤가.

▲ 전태일재단과 전태일기념관을 맡아 운영하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이 많지만 작년 전태일 분신항거 50주년 사업을 무사히 잘 진행했고 올해는 이소선 어머니 10주기여서 여러 행사들을 준비하고 있다. 또 전태일기념관과 덕성여대의 업무협약에 따라 덕성여대 차미리사 교양학부의 노동 인권 강좌를 개설 겸임교수로 오랜만에 학생들을 가르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민주노총, 전교조 등 여러 기관에 있으면서도 바쁜 와중에 왕성한 집필활동을 해왔다. 이수호에게 있어 집필의 의미는.

▲ 저는 원래 국문학 전공의 국어교사였다. 읽고 쓰는 것이 나의 취미이면서 삶의 원동력이었다. 교육운동이나 노동운동 과정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읽고 쓰면서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 내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기회가 됐다. 특히 감옥에 갇혔을 때나 수배 중 혼자 숨어 지낼 때는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요즘도 틈틈이 읽고 쓰는데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하는 시간으로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

 

- 어떤 혐의로 수배-감옥 생활을 했나.

▲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해서 감옥에 갔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출소했고, 해직된 상태에서 전교조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90년 초에는 노태우-김영삼-김종필 합당인 민자당이 생긴다. 당시 진보진영에선 악재라 여겼다. 진보진영에서는 민자당 일당독재를 분쇄하기 위해 국민연합을 만들었다. 당시 저는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전국적으로 반대시위를 했다. 그러자 정부가 당연히 억압하고 저를 비롯해 김근태 등등 몇몇 수배령이 강하게 떨어졌다. 도망다니며 그 일을 했다. 주력은 전대협이었고 노동자들과 함께 했다. 그때는 민주노총이 처음 생길 무렵이었다. 당시 김대중의 평민당과 힘을 보태 투쟁했다. 수배 다니며 도망 다니며 계속 하다가 91년 4월에 명지대 강경대가 경찰에 쇠파이프 맞아 쓰러졌다.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강경대 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그 책임을 제가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 91년 5월과 6월 연세대에서 뜨겁게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장례를 치르고, 그해 6월에 감옥에 또 가게 된다. 5년형인데 2년 6개월 최종선고 받고 93년 3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취임 후 사면되었다.

 

- 돌이켜봤을 때 가장 의미 있었던 저작이 있다면.

▲ 수배 당하면서 만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쓴 동화집 ‘까치 가족’이 먼저 떠오르고 내가 일흔이 되면서 내 지난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쓴 회고를 겸한 내 삶의 반성문인 ‘하루를 더 살기로 했다’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 최근 준비 중인 책은 있는지. 간략히 소개하자면.

▲ 저도 이제 여섯 명의 손녀 손자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삶이 있는 생활동화집을 써보고 싶다. 그리고 ‘겨울나기’ 이후 간간이 써 온 시들을 모아 시집도 한 권 냈으면 한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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