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엉망진창 술 담그기
바보들의 엉망진창 술 담그기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1.04.16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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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길에서 사 온 누룩
길에서 사 온 누룩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뽕나무밭에 초보신선 내 친구 오형렬이가 술을 담근단다. 서울에 간 각시가 돌아올 날도 아직 멀었고, 여기저기 꽃이 피는 봄날을 맞이하고 보니 마음이 아마 싱숭생숭했던 모양이다. 일 년 전인가 이 년 전인가 하여튼 어느 하루 길거리에서 파는 누룩을 보고는 충동적으로 사 들고 왔었다. 누룩을 보는 순간 나도 술이나 한 번 담가볼까, 해서 사 온 것이었지만 집에 와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잊고 있었던 누룩이 그날 문득, 홀연히 떠올라왔다나 어쨌다나.

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술을 마시기만 했을 뿐 직접 담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짓을 한다고 하니 미더울 리야 있을까마는, 어쨌든 응원이라도 해 주자는 생각으로 달려갔다. 어떻게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나 보겠다는 생각으로 딴에는 부지런히 달려갔건만, 가서 보니 일은 벌써 시작되어 불을 때고 있었다.

마당 한쪽에 걸어놓은 아궁이에 솔가지 따위를 분질러서 불을 때는 모습이 정겨웠다. 정겨워서 한참을 넋 놓고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몸이 연체동물처럼 흐느적인다는 느낌이었다. 가슴에서는 무슨 시냇물이라도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 이런, 이런,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눈이 절로 사르르 감겨진다. 성산포의 시인이 그랬지 아마. 눈 감으면 보일 거라고. 그래, 눈 감으면 보일 거다. 그리운 사람이 보일 거다. 안 그리운 사람도 보이고, 나쁜 사람도 보이고, 안 나쁜 사람도 보이고 다 보일 거다.

 

2쌀은 모래알 같다
쌀은 모래알 같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초의 불꽃으로 한 권의 책을 쓴 바슐라르가 보인다. ‘어느 개의 죽음’과 ‘섬’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나를 한때 미치게 했던 장 그르니에가 보이고, 그의 제자 카뮈가 보이는가 하면 호롱불 앞에서 바느질을 하시던 우리 어머니, 지금은 어느 하늘 어느 별에서 빛을 내고 계시는지 도대체가 알 수 없는 어머니가 보이고, 어머니의 어머니까지도 보이고 다 보인다. 그리고 사라진다. 가슴에서는 여전히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불은 이렇게도 나를 울고 싶게 한다. 아궁이에서 타는 불꽃은 특별히 더 그렇다. 연기가 매워서 눈물이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서러워서 울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억울해서 울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럼 뭐냐고? 몰라. 이렇게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니다. 할 말은, 하고 싶은 말은 엄청나게 많다. 다만 입이 열리지가 않아서, 입을 열 수가 없어서, 그래서 말을 목구멍으로 깊이, 깊이 삼켜버리는 것일 뿐이다.

꽃이 핀다. 불꽃이 핀다. 아궁이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 속에 내가 있고, 굴뚝으로 빠져 나가는 연기 속에도 나는 있다. 타는 불꽃 속에서 어른거리는 나는 누구인가. 굴뚝으로 빠져 나가는 연기와 함께 춤을 추는 나는 또 누구인가.

“얀마, 너 시방 뭔 청승을 떨고 자빠졌냐?”

친구 녀석의 지청구 소리에 화들짝 현실로 돌아왔다. 솥뚜껑 사이로 모락모락 빠져나오는 수증기가 정겨워서 만져보고 싶어진다. 그새 술밥이 다 익었나 보다. 먹고 싶다.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맛을 모르는 까닭에 별 감흥이 없겠지만,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이 어떠한지를 아는 까닭으로 입안에 자꾸 침이 고인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술을 담그곤 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 어린 시절에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술 담그는 게 유행이었다. 이른바 밀주단속반이라는 게 있던 시절이었다. 그들에게 걸렸다 하면 벌금을 왕창 내야 하는 위험 속에서도 벌금은 벌금이요, 술은 술이다 하는 식으로 전통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

 

3아궁이에 불을 때고
아궁이에 불을 때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4김이 올라오지만
김이 올라오지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명절에는 명절이라서 제주를 담그고, 농사철에는 농사철이라서 노동주를 담그고, 명절도 농사철도 아닌 때에는 몸보신을 하자고 약주를 담갔다. 약주는 대개 팔목주라 해서 엉겅퀴 뿌리나 음정목, 골담초 등등 여덟 종류의 사람 몸에 좋다는 나뭇가지나 뿌리를 넣어서 담그는데 술이 익을 때는 그 향기가 좋았다. 알코올 도수도 높지 않아 아이들이 마시기에도 별 부담이 없었다.

술밥은 가난한 살림이라서 수수나 좁쌀로 지었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보기에도 깔끔한 흰쌀을 쓰기도 했다. 흰쌀로 술밥을 짓는 날은 아이들의 잔칫날이었고, 엄마에게는 매우 골치 아픈 날이었다.

흰쌀로 지은 술밥은 고들고들하고 졸깃졸깃해서 씹는 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그 맛을 아는 아이들은 엄마 몰래 그것을 한 움큼씩 집어 들고 달아나서 먹고 다 먹은 뒤에는 또 살금살금 다가와서 한 움큼씩 후딱 집어 들고 달아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요즘처럼 군것질거리가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는 그런 따위 거들떠보지도 않겠지만, 그 시절에는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무과자보다도 맛있는 게 술밥이었다.

생각하면 참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일인가. 내 나이 열두 살에 무단가출을 감행했으니 아마 열 살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추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뒤로 세월은 겁나게도 흘렀건만, 나는 아직도 술밥 맛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으니 이게 뭔가. 한편으론 신기해서 눈이 자꾸 깜빡거려지고, 다른 한편으론 훌쩍훌쩍 울어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어쨌든 설레었다. 열 살을 전후한 시기에 어머니 몰래 훔쳐 먹곤 했던 술밥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십 년을 훌쩍 넘긴 오늘날 다시 먹어보게 됐으니 이게 보통 사건이겠는가. 그런데 이상하다. 솥뚜껑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뿜어져 나온 지도 한참이건만 술밥 특유의 냄새는 별로 안 난다.

 

5모래알 같은 술밥을 일단 식히고
모래알 같은 술밥을 일단 식히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야 솥뚜껑 좀 열어봐. 뭘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하긴 인마, 솥단지 속에 물 넣고, 물 위에 바구니 얹고, 바구니 위에 무명천 깔고, 무명천 위에 쌀 얹고, 그리고 불 때고, 뭐 다른 게 필요하냐?”

글쎄,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술밥을 그런 식으로 지었던가? 하는 의문이 슬쩍 일어나긴 했지만 디테일한 기억은 하나도 없다. 그저 어머니가 해놓은 술밥을 훔쳐 먹었고, 그게 그렇게도 맛있었다는 기억뿐이니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으랴. 그래도 어쨌든 솥뚜껑을 열어보기로 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원자폭탄이 터졌을 때의 버섯구름처럼 확 쏟아져 나왔다. 그 정도면 쌀도 충분히 익어서 술밥이 완성됐을 법도 하건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희한하게도 쌀은 하나도 안 익은 것 같다. 쌀 포대 속에서 금방 꺼낸 것처럼 크기가 그대로이고, 부실부실해 보이는 것이 찰기도 전혀 안 느껴진다.

“야 이게 뭐냐?”

“난들 어떻게 아냐.”

원인을 놓고 한참을 설왕설래, 하다가 형렬이 녀석은 물이 적어서 그런가보다,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바가지로 물을 퍼다가 쌀 위에 좍좍 뿌리고 다시 불을 때기 시작했다. 한참 뒤에 이만하면 됐겠지? 하고 솥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놀라워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입에 넣고 씹어본즉 익기는 익었다. 하지만 술밥 특유의 그것은 아니다. 고들고들하지도 않고, 졸깃졸깃하지도 않은 것이 마치 모래를 삶아놓은 것만 같으니 이게 뭐냐.

 

6누룩을 섞어서
누룩을 섞어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다시 또 물을 뿌리고 불을 땠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 다시 솥뚜껑을 열어보았다. 이번에도 쌀은 원래의 크기 그대로였다. 귀신이 곡을 할 노릇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경우를 가리킴일 것이다. 서로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거리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실실 웃어대는 식으로 어처구니없음을 표현하던 어느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너 이거 혹시 생쌀을 그대로 올려놓은 거 아니냐?”

“그대로긴 인마, 씻었지.”

“불리지는 않고?”

“불려야 하냐?”

“그렇지 않을까?”

따져 묻기는 했지만 나도 아는 것은 없었다. 쌀을 불려서 쪄야 하는지, 아니면 채반 같은 것 필요 없이 그냥 밥을 짓듯이 하되 물의 양을 대폭 줄여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하긴 아는 게 없는데 어디서 무슨 생각이 날 수 있으랴.

결국은 그대로 술을 담기로 했다. 술밥도 못된 쌀알들을 바닥에 펴서 식히고, 식은 그것을 커다란 양푼에 담아 누룩과 섞어서 버무리고, 버무린 그것을 항아리에 쟁여 담고 있는 친구 녀석을 보고 있자니 홀연 떠오르는 문장 하나가 있었다.

 

7항아리에 담기는 했지만
항아리에 담기는 했지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노을, 딱 여기까지였다. 앞에 무슨 글이 있었는지, 뒤에는 또 무슨 말이 이어지고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구 같긴 하지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도 당연히 모른다.

하긴 누구인들 뭐 어떠랴. 내가 스스로 창작해낸 문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다. 기억이란 오묘해서 금방 본 것도 잊어버리고, 또는 잊어버린 것 같기도 하지만, 환경과 시간이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잊었던 것이, 잊었다고 여겼던 것이 나 여기 있었어, 하고 되살아나서 나를 감격스럽게 하는 것이니, 이런 맛에 산다고 하는 저 유명한 경구는 아마도 이런 때 써먹는 것일 게다.

익어가는 술과 저녁노을이 어떤 조응을 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제대로는 모른다. 누룩과 밥과 물이 뒤섞인 채로 서로를 건드리고, 삼투하고, 에너지의 총량이 늘어나면서 열이 나고, 마침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발산하는 어떤 냄새, 이 냄새를 아마도 술이 익는다고 표현하는 것일 텐데, 그런데 여기에 저녁노을이 따르는 까닭은 무엇인지, 의문이 생겨서 요모조모 곰곰 따져보았지만 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술의 시인으로 알려진 이태백의 시는 담백하고 정갈해서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그림이 자동으로 떠올라오고, 심지어 어떤 때는 술 냄새가 내 콧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조차도 있다. 반면에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노을’은 글이 감각적으로 잘 읽혀지기만 할 뿐 내 몸으로 파고드는 무엇이 느껴지질 않는다. 글을 애써 예쁘게 꾸미고자 하는 강박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술은 사랑스럽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담그는 술은 특히 더 사랑스럽다. 아주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술 담그는 모습을 보아오지 않았어도 이런 사랑스런 느낌을 내가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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