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바라나시2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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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을 생각하지 않기

새벽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에 도착한 아침, 우중충한 날씨 속에 자전거나 세발오토바이로 사람을 옮기는 릭샤꾼들의 호객을 헤치며 바라나시의 구도심에 도착했다. 끊임없는 경적 소리로 꽉 찬 오디오와 어디에나 가득한 사람들, 이미 콜카타에서 겪었던 북인도의 풍경을 지나 도착한 올드타운은 역사에서 가장 오래 남은 도시라는 누군가의 말답게 미로 한 가운데 놓인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힌두교의 신성한 동물인 소들이 아무 방해도 없이 좁은 골목을 휘휘 걸어 다니고, 아무렇게나 퍼져있는 소나 개의 똥을 자연스럽게 피해 가는 사람들, 골목 사이사이 노점과 음식점에서 사모사 같은 간식들이 팔리고, 사람의 음식을 얻기 위해 바삐 눈치를 보는 원숭이들. 여행자들을 위한 거리에는 각종 기념품들이, 악기나 요가를 배울 수 있는 수업 내용이 현란한 글씨로 적힌 벽들로 가로막히듯 이어졌다.

갠지스는 인도 북부부터 인도 남서쪽의 방글라데시까지 흐르는 그야말로 넓고 거대한 강인데 사람들이 죽음과 제의를 위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바라나시다. 그들이 왜 여기를 택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종교적 의미가 있다고 들었던 것도 같은데 확언할 수는 없다. 강변으로 바로 접근하기 쉬운 지형에 놓여 있기도 하고, 근방에서 합쳐지는 지류들이 성스러운 의미를 더해 놓았을 것이다. 내가 바라나시에 있는 동안 줄곧 걸었던 강변에 이어진 계단, 가트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구불구불한 미로 같은 골목과 집들이 바로 바라나시의 올드타운이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골목은 근대 난개발의 흔적이 아니라, 아득히 긴 시간동안 사람들이 다녔던 자국같이 느껴져 묘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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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바라나시를 삐딱하게 바라봤었다. 도시가 아니라 도시에 대한 이야기들을. 사람을 태운 재를 흘려보내고, 덜 탄 시체들이 강변에 보이기도 한다는 소문 같은 말들, 화장되는 시신들과 머리 높이 쌓인 장작들을 끝없이 옮기는 인부들을 보며 죽음에 대한 통찰과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들을 신뢰하기 힘들었다. 그 말들은 마치 갠지스와 바라나시를 영적 체험을 위한 알리바이나, 여행객들의 안전한 깨달음을 위해 준비된 예쁜 장소처럼 만들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여행사에서 준비한 항목에 끼어있을 것 같은 느낌. 오늘의 일정: 바라나시에서 죽음과 삶의 무상함에 대해 고민하기. 그 안에는 강에서 시체를 한 번 보고 싶은 욕망도 몰래 끼어있다. 그래서 난 괜히 삐쭉한 마음으로 바라나시에서 절대 죽음에 대한 헛생각을 하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콜카타의 테레사하우스에서 봉사를 하다 만난 스페인 사람이 바라나시는 정말 마술적인 도시라고, 너도 가보면 알 거라고 했을 때도 별 생각 없었다. 거기가 뭐라고 다들 호들갑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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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을 생각하기

빽빽한 미로 같은 골목들을 헤치다 어느 순간 강변으로 내려갈 수 있는 골목길이 눈에 띈다. 갑자기 환하게 빛나는 작은 문처럼. 그 길을 따라 내려가면 강변에 줄지어 이어진 계단, 가트가 있다. 여행자들에게 호객하는 상인들의 좌판, 생활의 빨래를 하고 신성한 강의 효험을 믿으며 강에 몸 담그는 사람들의 모습. 모든 가트에서 장례가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긴 이름이 있었던 것 같지만 다들 주로 메인가트로 부르는, 저녁마다 있는 푸자라는 힌두 의식을 거행하는 곳 근처에서 장례가 가장 많이 진행된다. 그곳으로 향하면 매캐한 연기가 느껴지고, 사람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있는 장작더미들을 볼 수 있다. 돈이 있는 자들은 좋은 목재 위에서 불타고, 돈이 없을수록 메인가트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뒤 쪽의 작은 화장장에서도 시신을 조금씩 태운다. 가진 것이 아예 없는 부랑자의 시신은 먼 화장장에서 전기로 태운다고 했다. 그래도 갠지스에서 죽을 수 있어 그들은 축복받은 것일까.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만 어쩔 수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일상의 일부가 된 죽음을. 바라나시는 거대한 장례식장이 아니다. 불 위에 놓인 시신들이 여기서 태워질 수 있어 일종의 축복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가혹한 반대말이 아니라 삶과 생활의 일부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화장장에서 우는 이 하나 없다. 죽음이 삶의 종언이 아니라 삶의 완성처럼 이해되어 그런지. 아내의 시신이 타는 것을 바라보는 어떤 남편은 근처에 있던 나에게 진심으로 흡족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바라나시에서 내가 줄곧 느꼈던 무언가 차분하게 짓눌린 분위기는 삶의 일부로서 반복된 죽음이, 아니 정확히는 끊임없이 불태워지며 다시 반복된 삶이 아주 오래간 바라나시에 슬어놓은 먼지의 더께 때문인 것 같았다. 오래된 카페트를 털 면 묵은 먼지들이 분분하는 것처럼, 바라나시를 털면 몇 백 년의 먼지가, 사람들의 삶이 분분할 것 같은 느낌. 이 묵직한 분위기는 한 번 몸에 익숙해지면 편안하다. 그 반복이 꼭 인간의 원래 모습인 것 같아서였을까. 나는 그저 그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가트와 미로 같은 골목들을 자주 걸었고, 그것만으로도 마냥 편안하진 않지만 사람을 나른하게 누르는 아득함을 느꼈다. 넓고 거대한 강이 유유히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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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연 날리는 걸 좋아했다. 그 후로 인도 곳곳에서 연 날리는 것을 보며 연을 좋아하는 것이 여기 뿐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바라나시의 연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가트에서도, 올드타운의 옥상에서도 많은 이들이 연을 날렸다. 하늘에 망연히 떠 있는 연들을 바라보며, 왜 이곳에서 여행자들이 오래 머물곤 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테레사 하우스의 스페인인이 왜 바라나시를 마법 같은 도시라고 했는지도. 그곳에 있으면, 어떤 거대한 시간 속에 담긴 느낌이 든다.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오늘이 된다. 바라나시는 죽음에 놀라워하거나 슬퍼하는 도시가 아니라, 죽음을 끌어안고 영원히 반복되는 삶으로 남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직 지상에 매인 연은 하늘 아래로 흔들리고 있다. 바람의 움직임이 자신의 태도라는 듯. 우기에 접어들지 않아 강 반대편에 드러난 모랫벌 위에 사람들은 빠르게 흐르는 강의 유속과 흔들거리는 연의 움직임을 번갈아 바라본다. 두터운 안정감이기도, 어쩔 수 없는 체념이기도, 드러나지 않는 불안함이기도 한 눈빛으로. 연의 입장에서 연은 다시 지상으로 되돌아오거나, 끊겨 날아가거나 둘 중 하나다. 지상으로 돌아온 연은 다시 하늘에 날려질 것이지만, 끊겨 날아간 연은 어딘가에 떨어져 천천히 썩어갈 것이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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