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푸쉬카르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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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불가에 모였다

불 앞에 모여 앉는다. 초원에서 사막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 쯤에 있는 푸쉬카르의 겨울밤은 적당히 쌀쌀해서, 밤이 되면 사람들은 길거리 이곳저곳에 불을 피워 쬐었다. 작은 간이 트럭에서 향초나 기념품을 팔고 있던 레비의 가게 주변에는 근처의 상인들이나 그들의 지인들이 모여 앉았다. 나는 어쩌다보니 작지만 유명한 마을 푸쉬카르에 머무는 동안 레비의 가게를 함께 지켜주게 되었고, 사실 별 다른 할 일이 있던 것도 없었으므로 그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잠깐이나마 마음 붙일 곳이 생겨 그런지 마음이 편안했고 이 마을은 가만히 있기에 충분히 작았으며 그렇기에 무언가 충만했다.

그날 밤 레비는 어디에선가 싸구려 위스키를 구해왔다. 푸쉬카르 역시 바라나시와 같은 힌두교의 ‘성지’라 음주가 원칙적으로는 금지되어있지만 이곳의 현지인들은 술을 금방금방 구해온다. 성지에도 사람은 살고 사람은 술을 마신다. 경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위스키를 매대 밑에 감추고 짜이와 번갈아 마시는 동안 말이 많던 레비는 어느새 허공을 보고 있었고, 옆 매대에서 조각상을 팔던 번티는 다른 쪽 불가에, 이십대 초반의 일본인 여행자인 요시타카는 점점 취기가 올랐다. 어느덧 내 옆에는 하얀 제사복을 입은 마누가 나와 함께 불을 보고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이곳 사람들은 서로를 이미 다 안다는 듯 인사하며 지나쳐 갔다. 지나던 이 중 한 명이었던 마누는 일본인인 요시타카와 내가 함께 앉아있는 것을 보고 인도에서 한일 양국의 평화가 이룩되었다며 한 소리 붙이다가 끝내 자리에 앉았다. 물가에 사람들이 모이듯이 불가에도 사람들은 모였고 그럴 때면 언제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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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누는 불 앞에서 우는 것에 익숙할까?

처음에는 지적이고 세련된 느낌의 중년이었던 마누는 금세 다른 인상이 되었다. 그는 준비가 되면 어디서나 울 준비를 마친 사람이 된 듯 보였는데, 붉은 장작불 앞에서 그의 눈이 일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신에게 직접 말을 걸기 시작했다. 힌두교도들도 신에게 말을 거는구나. 놀라울 것도 없는 게 새삼 떠올랐다. 어느 종교에서든 믿음 있는 자들에게 신은 입 무겁고 잘 들어주는 말동무가 된다. 정확히는 말동무가 아니라 무언가를 토로할 수 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 대나무 숲, 혹은 아무리 쳐도 너무 단단해서 한참을 때리고 헉헉대며 안고 있어야하는 샌드백? 힘에 부칠 때 우리는 신(들)에게 이유를 묻는다. 왜 내가 아파야하죠. 왜죠. 왜죠. 마누의 말은 조금씩 커져가다 웅변 투가 되어갔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나지막한 절규에 가까워졌다. 내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그는 마치 성경의 욥처럼 말했다. 그는 어느 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을까? 이 모습이 그렇게 낯설진 않은 듯 주위에 있던 이들은 각자의 잔을 들고 불을 바라보거나 다른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다 이혼을 하고 두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빼앗긴 사람. 그런 사람이 이 마을에 다시 돌아와 사제가 되었다고 할 때 그의 하얀 제사복은 어떤 이유와 사연을 얻는다. 그 이유는 사람을 울리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제 우는 것에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우는 쪽으로 베테랑. 줏대 있고 지적인 사제의 모습과 울음을 삼키고 있는 얼굴. 다르지만 같은 얼굴. 나는 왜인지 그가 계속 그러한 균형과 긴장 속에서 살아갈 것만 같았고, 그게 그가 살아가는 일종의 기술처럼 느껴졌다. 마누는 삶을 화려하게 한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자리를 찾아냈구나. 누구나 자신의 고통에 대해 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다만 나는 마누가 울 때 그의 울음에 감화되어 따라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가 아주 세련되게 울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위해 울며,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마누가 싫지 않았는데 그저 그가 그렇게 울 수 있는 무대에 가끔 가만히 끼어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무엇보다 추운 밤 불가는 따뜻했다. 한밤에 불을 쬐며 일주일 전만해도 전혀 몰랐던 타국의 사람들과 이렇게 있구나. 이 생각은 낭만적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보다는 어떤 이상한 위화감을, 안전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아서 묘하게 위태로운 기분을 불러 일으켰다. 당신들은 결국 누구지. 이렇게 서로 불에 기대 울다가, 다음날 돈을 훔쳐 사라질 수 있는 게 여행임을 나는 안다. 당신들을 믿기에 이 불가에 앉아있지만 강렬한 믿음이 깊은 믿음과 완전히 같은 것일 수는 없다. 불가의 기분은 그래서 슬프고 기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물론 푸쉬카르의 사람들은 끝까지 나를 환대해주었다. 우리는 일주일 간 함께 했고 그 시간은 사람을 알아가기에 충분한 동시에 전혀 충분하지 않았다. 기쁜 의미에서도, 묘한 의미에서도 일주일은 너무 짧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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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사람 대하는 일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행은 새롭고 낯선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의 허물에서 벗어나 격 없이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타지에서 경계 없이 사람을 만나다보면 큰 일 당하기 십상이다. 얼마나 믿고 얼마나 믿지 않아야할까? 어쩌면 그 경계를 아는 게 진짜 기술일 것만 같다. 여행의 기술. 여행지에서 사람에 관련된 사기나 사건에 아예 휘말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람들을 전부 안 믿으면 된다. 여행에서 사람을 믿지 않는 것은 비교적 쉽고 간단하다. 그러면 속 아플 일이 없다. 그런데 그러면 여행을 왜 가나?

사람을 믿는 것은 더 어렵고 힘든 일이다. 잠시 곁을 주어도 될 사람인지 알기 위해 평소보다 더 많은 기술(혹은 잡생각)이 필요했다. 이 사람을 믿을 수 있을지, 같이 있어도 될지. 다른 나쁜 의도를 교묘하게 숨기고 있는 티가 나지는 않는지. 여행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무턱대고 다가오는 현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타국의 여행자들, 심지어 한국의 여행자들에게까지, 일종의 경계는 필요하다. ‘믿었다가’ 사기를 당하고, 돈과 물건을 도둑맞고, 주었던 마음은 절대 되찾을 수 없고, 오로지 바보같이 믿은 자신을 탓하면서 속만 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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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나가 아프면 서럽다고 했던가. 타국에서 마음이 아프면 곱절은 서럽다. 내 마음을 쉽게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종의 장벽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술과 눈치가 필요하다. 나는 여행이 좋았고, 여행에 익숙해져 어느 정도 사람을 나누었지만, 내가 세워놓은 사람 거르기 레이더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장벽을 높이고 혼자 풍경을 구경하면 마음은 편하지만 공허하다. 장벽을 낮추고 다가오는 이들을 쉬이 믿다가는 다 털려 울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여행은 내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을 느슨하게 허물 수 있는 시간임에 동시에 어떤 때보다 그 벽을 높게 세우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지금 특히 인도 여행 중에 내가 가장 믿었던 두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마누가 울고 있는 장면 바로 옆에 같이 앉아 있던 레비, 다른 하나는 인도의 마지막 도시 첸나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아슈윈.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은 시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나는 그들과 길어야 일주일 정도를 보냈고, 레비는 그 시간동안 신뢰를 지켰으며 아슈윈은 결국 내 돈을 털어 먹었다. 이 두 인물의 차이를 레비는 착하고 아슈윈은 나빴다고 간명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헤어지며 레비와는 덕담과 포옹을, 아슈윈에게는 sns로(물론 그는 나를 차단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인 욕 - 신을 위해 네가 이마에 찍는 반점은 너의 신이 너를 겨냥하고 있는 과녁이다 - 을 했지만, 나는 둘 모두를 신뢰했고, 그 짧았던 기억은 내게 무척 기분 좋은 것으로 남아 있다. 레비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었을까? 내가 여성이었다면 레비는 어땠을까. 네팔에서 만난 사람 참 괜찮았던 씨커르처럼,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길고 긴 일상의 사람들과 다르게 더 짧게 빛나지만, 그래서 더더욱 함부로 말하기가 어렵다. 그들과 보낸 기억들이 갈무리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 어렵다. 하긴 평소의 사람들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여행은 단지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짧고 강하게 경험하기 좋은 시간일 뿐이다.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늘 알아가고 있고, 너도 그러할 것이다. 이 말을 끝내 다 지워지지 않는 의심으로 읽을 수도 점차 쌓아올려지는 신뢰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같은 말이다. 우리는 알아갈 뿐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여전히 알고 싶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또한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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