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던 사람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나
있었던 사람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나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1.04.30 10: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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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갓 꽃이 쓸쓸해
갓 꽃이 쓸쓸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새 벌써 한 달도 넘었다. 한 달더 전부터 기다려 온 사람이 오늘도 안 보인다. 가수 장사익씨의 노래가 듣고 싶어진다. 북한식 노래로 일가를 이룬 박정욱씨의 ‘서도소리’도 듣고 싶다. 가수 장사익이나 박정욱의 서도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저승에서 환생해 오는 사람이 보이는 것만 같아진다.

보일 때가 됐는데도 안 보이는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은 일 초가 한 시간 같기도 하고, 한 시간이 일 초 같기도 하다. 어떤 날은 순식간에 서너 시간이 지나 있어 버리고, 다른 어떤 날은 한 서너 시간쯤 흐른 것 같건만 겨우 삼 분여 정도밖에 안 지나 있기도 한다. 시간개념을 전복시켜놓는 이런 힘은 대체로 아무 생각 없는 ‘멍때림’에서 발현되기도 하지만, 나도 언제인가는 사라질 것이다 하는 시퍼런 현실인식에서 출몰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을 보고자 해서 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기다리고자 해서 기다려 온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를 두 마디 이상 나눠본 관계도 아니다. 흔히 하는 말로 하자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른다. 어느 하루 눈에 띄어서 보기 시작했고, 농사철이 왔다고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도 그들은 그림자도 안 보여서 기다려 온 것일 뿐이었다.

도시의 삶과 시골의 삶이 극명하게 다른 점을 들자면 아마도 사라짐의 징후를 예감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첫 손가락에 꼽아야 할 것이다. 도시에서는 옆집 사람이 죽었는데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지만, 시골에서는 옆집은커녕 집이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마저도 보여야 할 시간에 안 보이거나 있어야 할 때에 없으면 또 한 사람이 불려가는 모양이구나, 하고 눈시울을 붉히게 된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십 년도 훨씬 넘은 것 같다. 십 년도 훨씬 넘은 시기의 언제인가 홍수 피해 예방이 목적인 하천정비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됐었다. 멋대로 휘어지고 늘어진 하천을 정비하고 나니 자투리땅이 제법 나왔다. 군청의 관련 부서에서 이 자투리땅에 꽃밭을 가꾸기 시작했지만, 예산 부족으로 화초를 심기만 했을 뿐 잡초 제거 등 후속작업을 못 하고 방치한 까닭에 잡초 우거진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

이 황무지 풀밭이 어느 해인가 느닷없는 콩밭으로 변신해 있었다. 누가 어떤 인연으로 콩을 심게 됐는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무슨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던 탓으로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건성으로 누가 여기에 콩을 심었구나, 했을 뿐이었다. 콩은 여름 한철 무성하게 쑥쑥 잘 자랐다. 콩 잎이 마치 뽕잎처럼 크고 활기찬 것이 흡사 무슨 나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바람에 찢어진 비닐멀칭
바람에 찢어진 비닐멀칭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콩 잎이 지나치게 무성하면 알이 안 생긴다는 속설이 생각났지만 에이 설마, 하고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잊었다. 잊고 있었던 콩밭이 다시 눈에 들어온 것은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노랗게 물든 콩 잎이 뚝뚝 떨어지는 사이사이 하나씩 보이는 콩깍지들의 배가 홀쭉했다. 올챙이처럼 배가 불러 있어야 할 콩깍지 배가 홀쭉하다는 건 누구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영근 콩알이 거의 없다는 증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그 사람은 콩을 심기만 했을 뿐 수확 자체를 아예 포기해 버린 것 같았다.

수확을 포기한 콩밭의 콩대들은 겨우 내내 그대로 서서 보는 마음을 울적하게 했고, 가끔 하나씩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콩알을 먹자고 꿩이며 비둘기들이 날아들어서 그나마 생기를 느끼게 했다. 겨울도 가고 다시 봄이 왔을 때, 흉물스런 모습으로 방치돼 있었던 콩밭 옆에 어느 하루 퇴비포대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말끔하게 쟁기질이 돼 있었고, 또 며칠 뒤에는 다시 콩밭으로 변신해 있었다.

이번에도 콩 잎은 무성하게 쑥쑥 자라면서 여름 한철을 보내고, 가을이 깊어졌을 때는 배가 홀쭉한 콩깍지를 가끔 하나씩 매단 콩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콩을 심은 그 누구인가는 이번에도 수확을 포기한 채로 내버려두었다. 이쯤 되면 농사 자체를 포기하지 않을까 했지만, 봄이 돼서 농사철이 시작된 어느 하루 콩밭은 또 깔끔하게 쟁기질이 돼 있는 것이어서, 누구인지 참 대단하다, 두 번을 연거푸 실패하고서도 또 콩 농사를 지을 작정인 걸까? 의구심 섞인 감탄사를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아마 그 사람이 누구인지 부쩍 궁금해 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이 년 동안을 건성으로나마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뜬금없는 우렁각시 얘기가 생각나는 등 내 마음이 참 묘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보았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하전 갯벌 그 너른 벌판에서 체험학습을 나온 아이들과 어른들이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신호에 걸려 대기 중일 때 벌써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신호가 풀려서 이십여 미터쯤 전진하다가 작은 언덕 하나를 넘어 다리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천공사로 생긴 자투리땅
하천공사로 생긴 자투리땅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것은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즐겨 쓰던 말투를 빌리자면 “미친년 엉덩짝만이나 한 땅뙈기”에 사람이 무려 열 명 가까이나 몰려들어 있었다. 삼십 내지 사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두 명에 여자도 두 명, 열 살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또 세 명,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여자와 남자가 각각 한 명씩 있는데 한눈에 척 봐도 일가족이었다. 노부부의 아들이거나 딸이거나 혹은 며느리거나 사위가 아이들과 함께 와서 부모의 일손을 돕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나는 반가웠다. 어찌나 반갑던지 차를 세워놓고 달려가서 아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지만 누구 한 사람 받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고는 있었지만 저게 뭐냐, 하는 투로 눈이나 깜빡거릴 뿐 가벼운 목례조차 보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그만 무안해져 버렸고, 얼굴이 두껍지 못한 까닭에 더 이상은 무슨 말을 붙여볼 엄두도 못 내고 혼잣말이나 웅얼거리며 돌아서야 했다.

하릴없이 도로 차에 올라타면서야 고추 모종이 도로변에 늘어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갈아놓은 밭에 비닐 멀칭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두 번을 연달아 실패한 콩 농사를 이제 포기하고 고추 농사를 짓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노부부는 거의 매일 고추밭으로 출근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밖으로 쏘다니기보다는 집에서 꽃이나 보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에 노부부가 날마다 고추밭에 나온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해도, 적어도 내 느낌으로는 날마다 출근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아직 고추 열매가 익지도 않은 고추밭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다가가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뭐랄까. 노부부는 낯선 사람을 극단적으로 경계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고생하시네요, 하고 인사를 할라치면 노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쪽으로 고개를 힐끗 돌리고 예, 예, 짧은 응대를 하고는 금방 도로 하던 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 나는 매번 그들의 일을 방해했나, 하는 죄책감으로 금방 자리를 떠야만 했다.

그런데 왜?

 

잡초는 점점 자라고
잡초는 점점 자라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볼 때마다 내 마음에 물음표는 쌓여만 갔다. 이 물음표는 뜻밖의 자리에서 뜻밖으로 풀렸다. 농약과 종자와 비료를 취급하는 가게에서 주인과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노부부가 들어왔다. 그들이 고추 탄저병 약을 사 들고 나간 뒤에 농약 가게 주인이 혼잣말을 했고, 나는 얼른 혼잣말을 붙잡아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알고 보니 노부부는 가난을 직업처럼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문전옥답은 고사하고 그럴싸한 텃밭 한 뙈기 없이 소작농으로만 평생을 살아 왔다는 거였다.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은 소작도 못 하게 됐을 때 무슨 선물처럼 하천정비 사업으로 인한 자투리땅이 나왔다. 하지만 겁이 나서 대번에 얼굴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몰래 콩만 심어놓고 후딱 돌아가곤 했다. 공무원들이 나와서 당장 걷어치우라고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실패한 콩 농사나마 일 년, 이 년,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신감도 생겼다. 이렇게 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구나 하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노부부는 이제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러니까 노부부에게 그 자투리땅은 평생 처음으로 소작료 없이 지어보는 농사인 셈이었다. 그래서 딸도 아들도 사위도 며느리도 손주들도 모두 불러 그 나름의 축제를 벌였던 모양이었다.

노부부가 농사를 짓는 방식을 보고 있노라면 땅을 사랑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 들곤 했다. 아직은 고추가 크지도 않아서 별로 할 만한 일도 없을 텐데 어쩌자고 저렇게 날마다 출근을 하는 걸까, 하는 내 의구심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고추밭을 에워싸는 형국으로 각종 농작물이 싹을 내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고추밭과 도로 사이 한 뼘도 채 안 되는 땅에 옥수를 심고, 도라지도 심고, 대파도 심고 그야말로 온갖 것들을 촘촘하게 마치 소꿉놀이라도 하듯이 심어놓은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여름 가뭄이 들었을 때는 바로 옆의 하천에 모터를 설치해놓고 그 흔한 스프링클러도 없이 고무호스를 길게 늘여놓고 아내는 고추 포기가 다치지 않게 정리하고, 남편은 포기마다 하나씩 일일이 물을 주고 다니는데 그 장면이 그림처럼 정겹고 숭고미까지 느껴져서 밀레의 어떤 그림이 떠오르기조차 했다.

고추 열매가 붉은 물이 들었을 때의 장면은 또 어떤가. 열 살 미만의 아이들이 고추밭 옆의 하천과 고추밭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며 깔깔거리고, 어른들은 고추밭 고랑에서 고추를 따느라 구슬땀을 흘리는데 아마도 매 주말마다 그렇게 부모님 일손 돕기 작업을 나오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요즘 농촌 들녘에서는 눈을 씻고 보고자 해도 볼 수 없는 아이들의 뛰어다니는 모습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생동감 그 자체였다.

 

주인은 어디에
주인은 어디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런 정겨운 풍경이 매년 반복되었다. 마치 우리 집 동백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꽃이 피었다가 지고 다시 꽃봉오리가 맺히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풍경은 내 안으로 스며들어 왔고, 나는 해마다 때가 되면 그 노부부 가족을 다시 보게 된다는 설렘, 까지는 아니더라도 하여튼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그런데 올해는 안 보인다.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올해가 아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작년 늦가을에 이미 했었다. 해마다 고추 수확이 끝나면 뒷정리를 깔끔하게 했다는 기억이 내게 있었다. 고춧대를 남보다 일찍 뽑아서 햇볕에 말리고, 다 마르면 남보다 일찍 불에 태워서 밭을 깔끔하게 정리해놓는, 그야말로 땅을 애지중지하는 습관이 그들 노부부의 몸에 배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작년 늦가을에는 보이지 않았다. 고춧대와 비닐 멀칭이 땅에 박힌 채 겨울 나고 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서도 나는 건성으로 그냥 지나쳤다고 할까, 아니면 올해는 이 양반들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여겼던 것일까, 하여튼 별다른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 생각이 엄청나게 게을렀던 것이다.

관리자를 잃어버린 고추밭의 비닐 멀칭이 바람에 찢어져서 펄럭이는 장면은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뒤의 그것 같다. 그 사이로 이런저런 온갖 풀들은 또 어찌나 그렇게도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그 속에서 별나게 눈에 띄는 게 있으니 한 포기의 갓이다. 입에 넣고 씹으면 기분 좋게 톡 쏘는 맛을 내는 갓.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갓 한 포기가 한 달 전에는 보이지도 않았건만 어느새 일 미터도 넘게 키를 키우고, 그리고 노란 꽃들을 피워내서 꿀벌을 불러들이는데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이 참말로 쓸쓸하기만 하다.

그나저나 누구일까. 아내일까? 남편일까? 설마 두 양반이 다함께 아파버린 것은 아니겠지? 올해 고추 농사야 어차피 때를 놓쳤다 해도, 내년에는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빌어본다.<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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