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홍범도 연구 권위자’ 장세윤 교수-2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1회에서 이어집니다.>

‘홍범도 연구 권위자’ 장세윤 교수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 학계에서 구술사가 가지는 위치는 어떠한가. 구술사가 실증을 보증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 사실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근대 독일의 역사학자 랑케, 한국의 경우 서울대 교수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이병도 등의 이른바 ‘실증사학’ 학풍 영향을 받아 문헌 위주의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근래 근현대사의 경우 사건이나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 또는 관련자나 후손 등의 목격담이나 증언, 구술 등을 중요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구술사 방법론’이 자료 부족을 메워 줄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 중시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한국현대사의 경우 상당한 근거자료로 활용된 것도 사실이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되었던 사실을 ‘커밍아웃’ 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이 폭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구술이나 증언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동력(모멘텀)이나 근거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본군 위안부로 버마로 끌려간 문옥주 피해자의 증언이 미군의 심문기록과 일치한 경우를 들 수 있다. 미군의 1945년 11월 버마 위안소경영자 조사보고서에서 1942년 7월 10일 위안부 703명과 업자 약 90명의 부산항 출항기록과 문옥주 할머니의 부산 출발일자에 대한 증언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술이나 증언이 매우 중요한 ‘실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구미학계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홀로코스트)을 증언하는 강제수용소 수용 유태인들의 증언은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 등 박물관이나 기념관에서 유태인의 증언을 보여주는 영상자료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오히려 한국근현대사 연구, 교육에서 구술사적 방법론 활용이 저조한 편이다.

 

- 화제를 돌려보겠다. 과거 조선족이 독립운동의 중추역할을 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논문들도 다수 있다고 들었다. 원인이 무엇인가.

▲ “과거 조선족이 독립운동의 중추역할을 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논문들도 다수 있다”고 보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중국조선족’으로 주어를 바꿔야 한다. 최근 중국 역사학계나 중국 당국은 항일전쟁이나 항일무장투쟁, 동북항일연군 관련 연구를 강화하고 있는데, 20세기 전반기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중국내 소수민족의 활동’으로, 특히 ‘중국 조선족’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중국 조선족의 반일투쟁’ 또는 ‘중국 조선족의 혁명투쟁’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나 연변 당국, 학계 입장에서는 중국 동북(만주) 지역사나 소수민족 역사, 중국현대사의 일부로 간주하는 시각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 개념이 성립한 것은 1952년 ‘연변조선족자치구’,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하면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부터 한민족(또는 한인, 조선인)의 이주사와 독립운동사, 민족해방운동사, 항일투쟁사를 ‘중국조선족’의 반일투쟁사나 중국공산당의 혁명투쟁사로 정립하는 것은 오류, 또는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국 동북(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재만한인(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해 살던 한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이 시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전개한 우리의 자랑스런 독립운동사, 민족해방운동사, 험난했던 이주사 등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소홀히 한다면, 한국사나 한국근현대사, 독립운동사,‘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가 아닌 ‘중국 조선족’의 반일투쟁사나 이주사, 중국혁명사로 변형 정착될 우려마저 있는 상황인 것이다. 최근 모 방송사의 팩션드라마 ‘조선구마사’가 문제가 되어 불과 2회 상영 후 완전히 폐지된 사태가 있었다. 이는 한국 시청자들의 시각이나 역사의식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요소에 대한 과감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지금은 역사, 한국사, 독립운동사, 나아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한국적 색깔과 문화 등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식, 올바른 역사 인식이 중요한 소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시대이다.

 

- 이 상태로 가면 나중에 어떤 혼란이 올 것으로 예상하는지.

▲ 혼란이라기 보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싶다. 우리가 살아온 근현대사를 올바로 정리하고, 제대로 연구․교육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당위’가 아닌가 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흔적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놀라운 변화와 정보화, 국제화, 세계화시대에 오히려 우리는 누구인가? 한국인은 무엇인가? 한국은 어떤 나라인가? 한국 문화와 역사, 언어는 어떠한가? 등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국제사회에서 드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특히 우리 민족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가며, 특정 지배자나 지배계층이 아닌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 성장해가며 현재의 ‘민주공화제’ 대한민국을 수립, 발전시킨 사례를 생각해보면 한국근현대사는 정말 드라마틱하고 매우 흥미 있는 연구대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오히려 대한민국의 저력이 빛을 보고있지 않은가? 최근 소식에 따르면 한국의 경제규모가 세계 11위에서 10위로 올라섰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가 주인이 되어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종속체제’였다면 과연 가눙했겠는가? 우리가 우리를 제대로 알고, 자신을 사랑하며, 후세와 이웃들에게 올바로 알릴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연구․교육과 성과의 쇠퇴, 이러한 현상이 우려되는 것이다.

 

- 이런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한 학계의 움직임이 있다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독립기념관, 한국연구재단 등 정부 기관이나 공공단체 등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 독립운동사 등에 대한 연구와 지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사 연구지원과 한국사 능력검정시험, 관련 자료의 제공과 활용을 위한 DB시스템의 구축과 활용,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대규모의 ‘한국학진흥사업’을 주관하고 있으며, 국내외의 한국학 진흥을 주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업과 관련된 각 지역별 ‘향토문화대전’사업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독립기념관은 기본적으로 독립운동사 연구와 전시, 교육사업에 매진하고 있는데, 최근 주목되는 사업으로는 ‘독립운동가 인명사전’ 발간사업이 있다.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명, 무명의 독립운동가 발굴과 현양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한다.

 

- 홍범도 장군 전문가다. 몇 해전 ‘봉오동 전투’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자문역할을 했다.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어떤지.

▲ 독립기념관 재직시부터 3권의 홍범도 전기물(1992, 1997, 2006)을 냈다. 아쉽게도 일반 국민들에 사랑받는 책에는 이르지 못했다. 추후 좀 더 완성된 모습의 홍범도 장군 전기를 내려고 한다. 봉오동 전투영화야 당연히 작가나 감독, 제작사가 감당할 몫이지만, 상당히 아쉬웠다. 작지 않은 의미가 있고 많은 성과도 거두었지만, 단순한 전투 위주 영화가 아니라 좀 더 품격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영화로 만들어져 몇 차례나 그것을 봤다. 물론 ‘전쟁과 평화’ 영화와는 스케일이나 비용 등을 생각하면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시대적 상황 묘사와 아울러 전쟁(전투)과 인간, 그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상 등 휴머니즘적 시각이 다소 부족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 아쉬웠다.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 홍범도, 과거엔 그저 싸움꾼이고 일자무식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어떤 인물로 평가할 수 있나.

▲ 흔히 알려진대로 ‘일자무식’은 아니었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 군대에 나팔수로 입대해 수년간 복무했고, 금강산의 절에서 1년 동안 행자승을 지내기도 했다. 따라서 한글은 물론, 상당한 수준의 한자나 한문도 알았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문서보관소에 남아있는 편지를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홍범도처럼 국가나 사회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국가나 사회, 민족이 위기에 처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자면 ‘파멸의 시대’에 아무런 사심 없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희생시키면서 독립운동, 아니 민족해방운동과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죽음을 각오하고 헌신했다는 점일 것이다. 저는 아직까지 (이순신을 제외한다면) 홍범도 장군처럼 극찬을 받아야 할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 여긴다.

 

​-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한다. 가장 가까운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당장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고민이 많을 것 같다.

▲ 과거를 살피다보면 현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고, 미래는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사실 한 개인, 연구자로서 현실적으로 나설 수 있는 분야나 역할이 매우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학 강의나 시민 대상 강연 등에서 한국사, 독립운동사를 강의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현실 문제의 해결 모색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영향력은 행사할 수 없고, 선거철에 성실히 투표에 나섬으로써 민주시민의 역할을 다하고자 할 뿐이다.

 

-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견해는.

▲ 최근 일부 경제사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 식민지 통치시기 약간의 부수적 발전을 과장․미화하면서 우리 민족 스스로의 주체적 발전의지와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 시각을 대변하는 저술을 간행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우리 민족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무의미한 저항운동으로 폄하되기 쉽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없었더라면 우리 스스로 개혁하고 자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가 거쳐온 발전과정을 되돌아보면 이 문제는 자명해진다. ‘독립’과 ‘자주’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우리의 안목으로 해결할 때 문제가 해결되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위 일제 강점기에 자본주의의 기반이 마련되어 경제성장이 가능했고, 당시 조선인들의 생활수준도 나아졌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리체계는 크게 보면 근대 이식론, 양적 성장론, 인적자원 성장론이라는 세 범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근대이식론에 대해서는 소위 ‘근대적 제도’를 누가, 무었을 위해, 왜 만들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또 양적 성장론은 성장의 내용과 결과를 치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누구를 위한 성장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인적자원 성장론 역시 그 내용과 일제강점기는 물론 그 전후 시기를 연계해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데, 최근 검토결과 식민지 치하 ‘조선인’ 등 인적자원의 성장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이 논리의 허구성이 밝혀졌다. 일부 사회․경제적 근대화, 식민지 ‘조선’ 거주 일본인들과 일부 친일 한국인들만의 성장으로 식민지 ‘조선’ 통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일제 강점기에 ‘근대화’가 추진되었다고 해도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인들과 무관한 것이었다. 일본의 한국 지배와 수탈의 기본성격은 명확하다. 즉 식량 및 원료·값싼 노동력의 공급지, 상품 판매시장, 과잉인구의 배출지, 그리고 1930년대 이후의 경우 잉여자본의 투기지와 군수공업 기지로서 역할하며 대륙침략의 교두보와 일본 방위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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