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심서』와 노사 기정진
『목민심서』와 노사 기정진
  • 박석무
  • 승인 2021.05.06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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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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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석무] 지난 28일(4월)에는 장성(長城)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다녀왔습니다. 본디는 29일이 음력 3월 18일의 중정(中丁)이어서 그날 가야 했지만, 코로나19 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사람이 모일 수 없는 처지여서, 서원의 춘향(春享)을 모시지 못하고, 전날 미리 고유제(告由祭)를 올리려고 하루 당겨 가야 했습니다. 고산서원은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서원이어서 간단한 소개부터 하렵니다. 서원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선생의 뛰어난 제자 여덟 분을 배향(配享)한 대단한 서원입니다. 제자 중에는 친손자로 선생의 학통을 이은 송사 기우만(奇宇萬:1846~1916)이 있습니다. 한말의 큰 학자이자 을미사변 후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했던 의병장이었습니다.

기정진은 조선 후기 호남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조선 성리학 6대가(六大家) 중의 한 분이면서 한말 위정척사사상을 최초로 주창한 애국자였습니다. 전라도 장성에서 거주하며 활동했던 학자였으나 명성이 높아 전라도 이외 경상도에서도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거대한 ‘노사학단(蘆沙學團)’을 이룬 당대의 대학자였습니다. 당시 산림(山林)으로 천거되어 호조참판이라는 고관에 오르고 사후에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까지 하사받은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저의 증조부 민재(敏齋:朴琳相)공은 바로 송사 기우만선생의 친자(親炙) 문인으로 의병에도 참여했던 학자였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저는 오래전부터 고산서원의 원장이라는 과분한 책임을 맡아왔습니다. 그런 책임 때문에 큰 행사는 치르지 못하고, 간략한 고유제로 대신하기 위해 고산서원을 방문했습니다.

노사는 다산보다 36년이나 뒤에 태어나 다산을 직접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강진에서 유배 살던 다산의 저서는 필사되어 호남에는 더러 전래 된 지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민심서』를 노사가 읽을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철종 말년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나라에서 민란 방지와 삼정문란의 해결책을 올리라고 했습니다. 1862년의 일인데, 기정진은 삼정문란과 민심 수습을 위한「임술의책(壬戌擬策)」이라는 대책문을 작성했습니다. 노사는 말합니다. 자신이 앞 전 임금의 신하였던 정약용의『목민심서』를 읽어보았는데 삼정문란의 해결책이 그 책 속에 들어있다면서, 임금은 하루빨리 그 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조정에 명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조치하라는 건의서였습니다.

당대의 성리학자로서 당파가 다른 남인인 다산과는 다른 생각을 지닐 수 있었는데 『목민심서』의 가치를 크게 인정한 노사의 안목은 높기만 했습니다.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들게 하는 이유와 나라를 좀먹게 하는 실제 내용이 그 책 안에 있다.(則其爲瘡於民 賊於國者 可得其實際矣)”라고 말하여 『목민심서』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좀먹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으니, 노사야말로 다산의 실학사상을 국가가 실제 행정에 응용할 수 있기를 바랐던 최초의 학자가 아니었나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 큰 제사는 올리지 못했지만, 관계자 및 몇 사람과 함께 노사선생의 신위(神位) 앞에 청주(淸酒) 한 잔 따라 올리고, 고유제문을 낭독하고 공손하게 재배(再拜)를 올리며, 오늘이라도 다산과 노사의 말씀에 따라, 『목민심서』를 제대로 활용하여 부패하고 타락한 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기만을 간절히 소망해 보았습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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