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독창적인 마늘과 함박꽃의 기이한 생애
매우 독창적인 마늘과 함박꽃의 기이한 생애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1.05.14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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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함박꽃
함박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그것은 어떻게 먹어도 식감이 황홀해서 나는 그 맛을 아름다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먹는 행위 자체를 예술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황홀지경으로 이끌어가는 그것을 나는 오래 전부터, 소년 시절부터 마늘쫑이라고 불러 왔었다.

마늘쫑을 컴퓨터에 입력하니 붉은 밑줄이 그어진다. 왜 이러나 의아해서 찾아보니 마늘쫑은 틀린 마리고 마늘종이 바른 말이란다. 종은 한자로 종자종(種}일 테니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착실하게 마늘종이라고 고쳐 썼는데 이게 뭐냐. 마늘쫑 특유의 식감이 영 안 느껴져서 실망스럽다.

나를 가르치고자 애 쓰는 컴퓨터의 정성은 가상하지만, 내가 느끼는 고유의 식감을 포기할 수가 없기에 그 가르침을 따르지는 못 하겠다. 마늘쫑을 마늘종이라 해야 한다는 교육은 마치 짜장면을 자장면이라고 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것만큼이나 교조주의 냄새가 너무 진하게 풍겨서 내키지가 않는데 어쩔 것인가.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마늘쫑이 쑥쑥 올라오는 중인 마늘밭에 물을 주던 중 문득 함박꽃이 피어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알았다. 한 송이 뚝 따서 입가에 대면 달콤한 것이 입안으로 금방 살살 녹아 들어올 것만 같은, 아득한 시기의 어느 한때 그토록 즐겨 손에 들고 다녔던 솜사탕을 연상케 하는, 빗방울 몇 개만 떨어져도 그 무게를 못 이겨 축축 늘어지는 함박꽃이 필 무렵이면 마늘쫑이 나온다는 것을 올해 처음 알았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야 그것을 알았을까. 어이가 없어서 한참을 어처구니없네, 어처구니가 없네, 하고 중얼거리며 하늘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한 번만은 아니다. 나는 아무래도 철이 제대로 들려면 아직도 멀었나 보나. 보면서도 못 보고 지나치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은 예전에도 가끔 했었지만 요즘은 거의 일상이 되고 말았으니 이게 뭔가.

나이가 찰만큼 차고 보니 별별 것들이 다 눈에 들어온다. 뿐만이 아니다. 예전에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잘못된 앎이었다는 부끄러운 발견에 이르기도 한다. 이게 혹시 죽음과 가까워졌다는 신호인가 싶어서 가끔은 쓸쓸해지기도 하지만, 사람이란 역시 죽는 순간까지도 배우고 탐구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존재로구나 하는 식의 이를테면 개똥철학에 한 발 다가섰다는 느낌이어서 뿌듯하기도 하다.

보면 그냥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지는 함박꽃은 역시 함박꽃이라고 불러야 제 맛이 난다. 이 꽃을 수국이라 불러놓고 나면 그 어감이 영 밋밋해서 뒷맛도 풍성하지가 않은 것이 마치 엄청 반가운 사람을 만났는데 상대가 하나도 안 반가워할 때의 그것과도 같은 머쓱함으로 귀결된다.

 

가까이서 본 함박
가까이서 본 함박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함박꽃 세부
함박꽃 세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함박꽃은 일단 피었다 하면 비가 안 내려야 한다. 한 송이의 함박꽃은 수백 개의 작은 꽃송이들의 집합으로 구성돼 있고, 이것의 전체적인 구조는 벌집과도 같아서 빗물이 구멍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면 꽃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고개를 떨어트린다. 꽃을 지탱하는 줄기가 단단한 것도 아니어서 비가 계속되면 떨어트린 고개가 축축 늘어진다. 그래도 비가 그치지 않으면 끝내는 꽃송이가 통째로 땅에까지 닿고, 줄기가 뚝뚝 부러져 버리기도 한다. .

무엇보다 햇볕이 쨍쨍거리는 날 함박꽃을 보면 메마른 내 마음이 청량하게 젖어든다는 느낌이어서 좋다. 그래서 날씨가 흐려지면 내 마음은 벌써 시무룩해지고,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면 우울해져 버린다. 그런데 마늘쫑을 쑥쑥 키워내는 마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계절은 비가 자주 내려줘야 한다. 겨우내 덜덜 떨어가며 비축해둔 에너지를 힘차게 발산하자면 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봐야 한다.

여기서 나는 나의 이중성을 본다. 마늘밭에 가 있으면 사흘에 한 번씩만 비를 뿌려주소서 하는 소원이 생기고, 함박꽃을 보고 있노라면 저 꽃이 다 지기 전에는 단 한 방울의 비도 안 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긴다. 그러다가 깜짝 놀란다. 도대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이 질문은 너무도 완고해서 빠져나갈 길이 없을 것 같지만, 감사하게도 인생이라는 이름의 훌륭한 경험세계는 내 안에 이미 답을 비축해 두었다. 이게 바로 양가적 감정이라는 거야, 하는 답을 말이다.

마늘은 좀 별난 데가 있는 식물이다. 아니다. 완전히 독보적이요 독창적인 식물이라고 한 계급 더 높여주고 싶다. 무엇보다 마늘은 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때가 되면 얼핏 꽃대처럼 보이는 대궁을 밀어올리기는 하지만 이것은 꽃을 피워내고자 함이 아니다. 대궁의 상층부에 복주머니를 연상케 하는 주머니를 만들어놓고 이 안에 새끼마늘을 꽉 채워 두었다.

초기에는 그게 새끼마늘인지 뭔지 구별조차 안 된다. 좁쌀보다도 훨씬 작은 알갱이들이 오글오글 가득 차 있는데 입에 넣고 깨물면 톡 쏘면서 알싸한 마늘 맛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어미마늘은 흙 속에서 새끼마늘을 만들었고, 그 새끼들에게 태양을 흠뻑 들이마시게 하고자 대궁을 따로 만들어서 밀어올리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이 대궁을 나는 마늘쫑이라 부르면서 맛있다고, 식감이 너무 좋아서 황홀하다고 생각하며 데쳐서도 먹고 볶아서도 먹고 날것 그대로 먹기도 한다. 생각하면 그게 또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대궁이란 어미마늘이 새끼마늘에게 영양소를 보내주는 젖줄이요 탯줄이며 파이프라인이 되는 것이니, 그 안에 품질 좋은 미네랄 등 각종 엑기스가 잔뜩 들어 있을 것은 불문가지.

 

우리집에 마늘밭
우리집에 마늘밭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마늘쫑
마늘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마늘이 흙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새끼마늘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벌도 나비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암컷과 수컷의 구별도 없으면서, 아무도 목격할 수 없는 흙 속에서 무슨 짓을 어떻게 해서 새끼를 만들어내 가지고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가 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구근식물은 새끼를 만들어서 함께 살아가지만, 마늘은 굳이 대궁을 따로 만들고 그 꼭대기에 복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서 새끼를 태워 지상으로 올려 보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왜?

도대체 마늘은 왜 그렇게도 복잡하게 힘든 생식 장치를 고안해낸 것일까. 굳이 대궁을 따로 만드느라 소모하는 에너지 플러스 새끼를 태워서 꾸역꾸역 지상으로 밀어 올리느라 소모하는 에너지의 총량이 얼마인지 계량할 수는 없다 해도, 어미마늘이 자신의 건강이나 안녕 따위는 고려할 시간도 정신도 없이, 그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죄다 쥐어짜서 새끼마늘에게 쏟아 넣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들은 마늘의 이런 특성을 잘 안다. 그래서 마늘쫑이 나오기 시작하면 쑥쑥 뽑아내거나 잘라 버린다. 새끼 때문에 어미마늘이 크지를 못 하고 영양실조 상태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어미마늘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끝까지 제대로 쑥 뽑히는 마늘쫑은 별로 없다. 어떤 것은 삼분의 일쯤 뽑히다가 끊어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거의 다 뽑혔다 싶은 순간 뚝 끊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미마늘이 통째로 흙속에서 튀어나와 버리기도 한다. 일단 뽑혀진 어미마늘은 다시 심는다 해도 살기는 살지만 제 기능을 온전히 다 수행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마늘쫑 뽑기는 함부로 막 해서는 안 된다.

뭐랄까. 낚시 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손맛 같은 거. 그런 어떤 예민한 감각을 마늘쫑 뽑기는 필요로 한다. 섬세한 감각에 부드러운 긴장감을 장착하고 어미마늘과 직선으로 연결된 대궁을 잡으면 손끝으로 전해지는 뭔가가, 이를테면 이것은 잘 뽑히겠다거나, 이것은 어렵겠는데 하는 뭐 그런 어떤 느낌이 온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미마늘의 감정을 너무 크게 건드리지 않도록 살살 달래고 어르는 기술을 마늘쫑 뽑기는 요구한다는 것이다.

 

새끼마늘 주머니
새끼마늘 주머니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뽑아놓은 마늘쫑
뽑아 놓은 마늘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이래서 마늘쫑 뽑기는 노동 중에서도 에너지 소비가 많은 노동이다. 나처럼 마당에 서너 평 남짓 마늘농사를 짓는 사람이야 마늘쫑을 뽑아서 맛있게 먹는다는 기쁨이 사전에 예약돼 있기에 노동이랄 것조차도 없지만, 수천 평씩 전문적으로 마늘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마늘쫑 뽑기 작업은 상당한 예산을 투자해야 하는 노동이다. 그래서 마늘쫑을 뽑을 때가 되면 공무원 노조나 민간 기업에서 자원봉사를 나가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마늘에게 직접 한 번 물어보고 싶어진다. 마늘아, 너는 어째서 이렇게도 복잡하게 독창적인 메커니즘을 고안해낸 거니?

독창적이기는 함박꽃도 마늘에 못지않다. 마늘은 그나마 새끼들에게 태양을 구경시켜 준다는 목적이라도 있지만, 함박꽃은 그것조차도 아니다. 어쩌자고 꽃송이가 그렇게도 큰 것인가. 씨앗을 맺지 않는 꽃들이 대개 크다고는 해도, 함박꽃은 간단하게 그냥 크다고만 말할 수 없는 어마무시한 크기가 있다. 땅이 척박한 곳에서 자란 함박꽃은 크기가 그리 크지 않지만, 거름이 넉넉한 곳에서 자란 함박꽃은 한 송이가 어지간한 사람의 머리통에 근접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함박꽃은 사실 꽃이 아니다.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꿀샘도 없고, 꽃가루를 만들어내는 수술도 없고, 심지어는 향기조차도 없다. 그저 하얗기만 한 것이 숭얼숭얼 열려 있는 것이니, 도대체 너는 뭐냐, 하는 질문을 안 던질 수가 없다.

혹시 이런 것은 아닐까? 아무 짓도 안 하고 그냥 보내기에는 생이 너무 허전하고 무미건조해서, 그래서 사람이 화려한 복장에 고깔을 쓰고 너울너울 춤을 추듯이, 푸닥거리를 하듯이 함박꽃이란 이름의 커다란 꽃 모양을 만들어놓고 날 좀 봐줘, 하는 것은 아닐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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