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고스타 버스타’, ‘싱투게더’ 제작 박준철 PD 인터뷰-1

박준철 PD ⓒ위클리서울/ 우정호 기자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정확히 어떤 걸까? ‘나는 사람들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는 이 시의 마지막 문장은 성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부류는 ‘많이 밟고 지나간 길이 안전하다 하니까 순응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부류는 “덜 밟은 길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나?”하고 호기심을 표하고, 소수의 부류는 ‘뭐가 됐든 가면 그만이지’ 할 수도 있겠다.

유튜브 채널 ‘고스타 버스타(GoStar BuStar)’와 디스커버리채널 ‘싱투게더’의 제작자 박준철 PD. ‘덜 밟은 길’이 아닌 ‘누구도 밟지 않은 길’을 선택한, 운명이 바뀌는 삶을 만끽하는 행운의 사나이를 5월의 어느 오후, 반포 한강공원에 우뚝 서 있는 ‘고스타 버스타’ 버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고스타버스타_유튜브 채널캡처
'고스타버스타' 진행자 김태우와 게스트로 출연한 박진영 ⓒ위클리서울/ 유튜브 채널캡처

고스타 버스타(GoStar BuStar) : 지금 ‘태우’러 갑니다

‘GoStar BuStar’ 로고와 가수 김태우의 캐리커처 얼굴이 박힌 거대한 빨간색 버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인터뷰에 앞서, 박준철 피디는 별 6개짜리 호텔의 컨시어지보다 젠틀한 제스처와 목소리로 버스를 안내했다. 그는 “산타클로스를 상징하는 색인 붉은색과 흰색의 조합으로 외부를 장식했고, 김태우의 ‘태우’를 딴 ‘지금 태우러 갑니다’ 프로젝트 명을 써 넣었다”고 설명했다.

버스 내부는 360도 회전하는 리무진 시트와, 방공 무대며 메인 스튜디오와 레코딩 룸을 겸한 멀티 공간으로 나뉘어졌다.

박 PD는 “키친 룸의 2.2미터 소파의 경우 김태우 사이즈에 맞췄고, 이 중 어느 공간도 키 190센티미터, 거구의 전직 아이돌이 돌아다니는데 무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키친과 레코딩 스튜디오를 버스 안에 구현한 시스템은 세계 최초라고 자부한다.”

‘고스타 버스타(GoStar BuStar)-지금 태우러 갑니다’는 박준철 피디가 기획하고, 가수 김태우가 진행하는 웹 예능 프로그램이다. 유튜브 채널 ‘고스타 버스타’를 통해 선보이고 있으며, 다양한 게스트들과 함께 버스 안에 마련한 스튜디오에서 공연 위주의 컨텐츠를 만들고 있다. ‘고스타 버스타’라는 이름은 방송에 출연했던 가수·프로듀서 박진영도 “이름이 너무 천재적이다”라며 극찬한 바 있다.

특히, 버스 스튜디오 안에서 구현된 사운드의 퀄리티는 전문 녹음 스튜디오나 방송국 스튜디오 만큼 뛰어나 깜짝 놀랐다. 이를 언급하자 박 피디는 “버스로 갈 수 있는 곳이 어디든 소리 구현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시동을 끈 상태에서도 모든 게 돌아갈 수 있게끔 했고, 콘솔이나 기타 장비도 신경도 신경 썼고 마이크의 경우 ‘애스톤’ 사의 마이크를 지원받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많은 버스 내부 시스템이 태양광 에너지로 돌아간다는 점도 기발했다.

그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인터뷰에 앞서 음원 한 곡을 들려줬다. 현장의 소리가 거의 신체적인 진동으로 울릴 만큼 생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발랄한 기타 스트록으로 시작된 소리에 익숙한 안정감을 느끼던 사이, 조금 힘 뺀 듯한 김태우의 목소리가 가볍게 멜로디의 겹 위에 올랐다.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내는 펑키한 베이스와 함께 ‘지금 태우러 갈게’라는 후렴구가 나오는 지점에서 ‘아’ 하고 짧게 뱉었다. 마이클 잭슨의 ‘Rock with you’를 생각나게 하는 펑키함에 2020년대의 감성도 놓치지 않은 세련됨을 가진 노래.

“김태우가 직접 만든 ‘지금 태우러 갈게’라는 곡이다. 우리의 ‘대표 송’이랄까.” 박 피디가 노래를 음미하는 표정 뒤에 회한이 비쳤다. “이 노래 들으면 고스타 버스타를 처음 시작할 때 생각도 많이 난다. 벌써 일 년이 됐다. 작년 5월 29일 고스타버스타 첫 방송을 했고, 일년이 지나가는 사이 점프하듯 진화하고 있다.”

버스 스튜디오로 이동하면서 라이브를 펼친다는 참신하고 도전적이고 무모한 발상. 무엇이 그를 이 스케일 큰 프로젝트로 이끌었을까?

그는 “남들과 똑같은 걸 하지 않겠다는 생각, 가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다는 게 첫 번째였다”고 했다. “안정적인 회사에서 음악 PD로 일하다 그걸 그만두고 나왔을 때, 하던 대로 인력 꾸려서 지하 스튜디오에서 사람들 불러서 찍는 걸 똑같이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예상 가능한 꽉 막힌 길은 이제 안 가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전에 기획했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차 안에서 노래하고 요리하는 컨텐츠였다. 회사에서 기획 안으로 냈지만 ‘너무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구현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자주 보던 필리핀의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버스 안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는 걸 보고, ‘아, 그럼 버스 안에서 스튜디오 라이브도 할 수 있겠다’ 하고 생각했다.

자칫 무모한 아이디어로만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겐 무모한 기질과 현실 인식을 동시에 가진 조력자들도 있었다. 사실, 무모하지 않은 역사란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면 이 반도에선 여전히 다섯 살부터 사서삼경이나 외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김태우 에게 이 아이디어를 얘기했더니 ‘너무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단 버스가 있어야 될 거 같아요’하더라. 그래서 투자자를 구해야 했는데, 때 마침 우연한 기회로 미디어에 관심 많은 멋진 투자자를 알게 됐다. 그를 만나 아이디어 설명을 했다. ‘스튜디오를 가진 버스가 있어요. 누군가 태우러 가요. 어디든 가서 버스 안에서 공연도 해요….’ 진지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핸드폰을 힐끗힐끗 보고 있더라. ‘건성건성 듣나?’ 하고 있는데 설명을 마치자마자 그쪽에서 ‘버스 제일 큰 거 사자’고 했다. 알고 보니 얘기 들으면서 이미 버스 가격을 알아보고 있었던 거다.”

‘노력하는 자는 하늘이 돕는다’는 상투적인 속담과 ‘될 놈은 된다’는 요즘 말이 반반씩 머리를 스쳤다. 박 피디는 투자자와 미팅 이후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버스를 구입하게 됐다고 했다. 그의 기획에 맞는 디자인을 실재화 시킨, 키친과 버스 스튜디오를 갖춘 ‘세상에 없는’ 버스가 탄생했다.

“이제 프로그램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태우에게 가서 ‘자 버스 왔어’ 했더니 정말 깜짝 놀라는 거였다. 그렇게 금방 뚝딱 만들어 가져올 줄 몰랐나보다. 바로 ‘인 할게요’하는 대답을 들었다, 작년 3월부터 불과 두 달 동안 추진력 있게 진행 돼 5월 첫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버스 내부- 박준철 PD 제공
버스 내부 ⓒ위클리서울/ 박준철 PD 제공

‘음악을 듣다가 죽을 수도 있는’ 음악 PD, 박준철

그를 만났던 첫 인상을 기억한다. 몸에 감기는 수트와 셔츠, 포인트를 준 넥타이, 그리고 바이커 캡. 영화 ‘와일드 원’의 말론 브란도가 쓴 바이커 캡이 클래식한 야만성을 내뿜는다면 박준철 피디의 바이커 캡은 젠틀하지만 어딘지 모를 마이너함을 드러냈다. 경인방송 라디오 PD와 카카오M 제작PD를 거쳐 고스타 버스타를 만든 그의 행보는 충분히 와일드하지만.

“음악을 이렇게 좋아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정말 좋아했다. ‘나 음악 듣다 죽을 뻔했다’고 말한 적 있을 정도로 정말 하루에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대치로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카카오 M시절, 하루에 들은 곡을 세워본 적이 있는데 800곡 정도였다. 직업상 필요한 식으로 중요한 부분을 듣고 넘겨가며 듣는 방법을 포함해.“

그가 죽도록 음악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태어난 부산에서, 아버지가 콘센트를 만드는 공장을 하셨는데, 집과 공장이 같이 있는 구조였다. 늘 기계로 프레스 찍는 소리가 리듬처럼 들리는. 수십 명의 직원들이 얼마나 지루했을까. 공장에 항상 아침부터 퇴근까지 항상 MBC라디오를 틀었고 ‘김기덕의 두 시의 데이트’가 나왔다. 애기 때부터 라디오를 듣고 자란 혜택을 누린 덕에 처음 산 자전거를 탈 때 퀸의 ‘Bicycle Race'를 들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려서부터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과, 다 커서 어떤 인지를 갖추고 음악을 받아들이는 건 분명 다르다는 걸 분명히 체감할 수 있었다.”

공장지대인 영국 리버풀에서 비틀즈가 꽃 피고, 미국의 자동차 산업 도시 디트로이트에서 모타운 소울과 엘라 피츠제럴드, MC5나 이기 팝이 태어난 걸 생각하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라디오의 혜택을 넘치게 본 그는 위성 DMB방송의 피디 겸 디제이를 거쳐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됐다. 공중파 방송에서의 리포터 경험조차도 그가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을 깨닫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0대에 뭘 할까 하다 아나운서가 되면 멀티 엔터테이너로 MC도 하고 라디오 진행도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러면 음악과도 가까이 있을 기회가 있으니까. 그러면서 잠시 공중파 방송의 어느 아침 생방송에서 리포터를 했다. 어느 날 강원랜드 옆 탄광촌의 한 가족을 인터뷰를 갔는데, ‘아버지가 광부라는 사실이 어때요? 하니까 ’너무 좋아요‘ 하면서 아이가 아버지가 광부라는 사실을 충분히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좋았다. 그랬더니 피디가 “컷!” 하면서 그럼 그림이 안 나온다고 광부라는 직업의 부정적인 모습을 계속 부각시켜 아이에게 질문하더니 결국 애를 울렸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 상황이 불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집을 나오면서 주머니에 꼬깃꼬깃 가지고 있던 돈을 걔 저금통에 넣었다.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천성이 나랑 같이 있는 사람이, 혹은 나의 파트너가 행복해야만 내가 행복한 사람이구나. 혼자서만 행복할 수는 없는 사람. 이게 엔터테인먼트의 본질인 거였다.”

이토록 이타적인 성격으로 메인스트림의 수많은 소모적인 프로그램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분노하게 하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게 하고. 백분 토론이 아니라 백년 토론을 해도 답 없이 싸우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을.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이 더 들었다. 리포터란 직업도 아나운서라는 것도 피디가 시키면 그냥 해야 되는 것이라는 걸.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둔 자식에게 ‘아빠 부끄럽지 않아요?’ 이런 얘기해야 하고. 그래서 그 때 ‘그럼 나 이거 안 할래’하고 경인방송 특채로 프로듀서가 됐다.

그토록 좋아했던 음악, 그리고 라디오 프로그램. 라디오 PD의 꿈을 이룬 박준철 PD는 돌이켜보면 행복하면서도 ‘과중했다’고도 말했다. “라디오에서 피디의 역할은 프로그램을 하나 맡아서 음악을 선곡하고, 진행자를 데리고 쇼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지방 방송국 라디오는 그렇게 피디가 한 프로그램을 맡을 수 없고, 서, 너 개 씩 맡아야 스케줄을 채울 수 있다.”

“분명 업무가 강도가 상당히 높았지만 티 안내고 다 해내고 싶다는 오기가 있었다. ‘어떻게 하게 된 피딘데 보여줘야지’하면서. 남들보다 많이 일을 맡고, 그러면서 방송사 주최 음악 페스티벌도 맡아 기획, 연출, 진행까지 맡아 했는데 ‘음악’이니까 즐거웠다. 음악 피디는 진짜 음악을 좋아해야만 지치지 않고 커리어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힘들다가도 ‘아 나 음악 진짜 좋아해’하면서. 거울보고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러면서 해왔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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