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고독을 즐기던 수컷
고독을 즐기던 수컷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한쪽 날개의 길이가 백 리에 이른다는 장자의 붕새 이야기를 생각하며 뒹굴고 있을 때 밖에서 애앵, 하고 애처로운 소리가 들렸다. 낯선 고양이 손님이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섰나 보다. 퍼뜩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정말이다.

그런데 너무 크다. 사람으로 치자면 사춘기에 접어든 청소년 급이다. 못 먹어서 빼빼 말라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 커버린 녀석은 사람이 내미는 먹을 것이나 친절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도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고양이가 먹을 만한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 집은 대문도 없고 울타리도 변변찮은 까닭에 고양이가 가끔 찾아온다. 세상 경험이 없는 아주 어린 녀석들은 이리 와 쭈쭈,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손을 까불면 경계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지만, 사춘기급 녀석들은 오히려 뒤로 한 걸음 물러서거나,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서 나를 주시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면 무슨 게임이라도 하자는 듯이 저도 움직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 하면 그대로 휙, 번개처럼 달아나 버린다. 이런 경험을 십 년도 넘게 하면서 나는 고양이의 행동양식과 노자 혹은 장자의 철학이 여러 면에서 일치하지 않나 하는 신박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든 새로운 생각이나 발견이 그렇듯이 나는 나의 그런 신박한 발견에 감탄했고, 그리고 차츰 빠져 들어갔다. 노자나 장자를 뒤적거리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퍼뜩 고양이가 떠올라 오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고양이의 하는 짓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퍼뜩 한순간 노자 혹은 장자의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은 물처럼 흐를 때 물다운 법이다. 저기 있는 산을 여기로 옮기고자 헛되이 애쓸 필요는 무엇인가. 저 산이 좋다면 거기로 가서 소요하라.

 

달아날까 멈출까
달아날까 멈출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린 마음에 시골이 지겹다고 도시로 떠났던 내가 다시 도시를 지겨워하며 시골로 돌아온 까닭은 아마도 노자와 장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의 세계관을 제대로 깊이 깨우쳤다면 무엇인가 다른 삶의 방식을 창안해 냈겠지만, 서당 개 십 년이면 풍월을 노래한다는 수준 이상은 못 되고 보니 도시를 떠나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을 생각해보기는 어려웠다.

시골 살림을 새롭게 시작한 이후 고양이를 새롭게 알았으니 이보다 큰 소득이 뭐냐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해본다. 머리에 리본을 꽂고 귀족 행세를 하는 고양이는 당연히 내 관심사가 아니다. 너무 먹어서 살이 뒤룩뒤룩 금방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다 관절염까지 걸려 있는 그런 고양이는 고양이로서의 품위와 자존감을 압류당한 고양이 인형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소란을 떨어대던 고양이 여섯 마리가 한 마리도 없게 돼 버린 지도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기가 막히게도 녀석들은 한 달 남짓한 동안에 싹 다 사라지고 말았다. 찾아온 고양이가 두세 달 혹은 일 년 남짓 함께 살다가 인사도 없이 사라진 경우야 뭐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심지어는 새끼를 낳아놓고 떠나버린 녀석도 있긴 했었지만, 여섯 마리가 거의 동시에 사라진 경우는 처음이어서 내 가슴에 뚫린 망연자실이 제법 컸었다.

굳이 원인을 찾아보기로 하자면 아마도 어렵게 새끼를 낳은 뒤로 성격이 영 까칠해져 버린 암컷 고양이와 나의 대립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녀석은 새끼 낳기를 고통스럽게 해서인지 나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새끼 고양이가 귀여워서 만져보고 싶고, 품에 안아보고도 싶건만 어미는 내가 손을 내밀면 캬악, 하고 적대적인 소리를 내며 발톱으로 할퀴거나 입으로 깨물어대곤 했다.

어미가 나를 거부하니 새끼들도 그 모양 그 꼴이어서 나만 보면 날카로운 소리를 질러대며 도망치기 일쑤였다. 기가 막혔다. 열심히 밥을 주고 물도 주고, 가끔은 우유도 주고 생선도 주고 있는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하루는 울컥 짜증이 나고, 서럽기도 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다 나가. 여기는 내 집이야. 꼴도 보기 싫은 녀석들 같으니라고.”

 

새끼를 두고 사라진 검은고양이
새끼를 두고 사라진 검은고양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정말로 꼴도 보기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녀석들이 정말로 집을 나가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물론 해보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씩은 오겠다는 약속을 남겨놓고 엄마 곁으로 간 내 옆의 그녀가 여섯 달 동안 딱 한 번밖에 안 왔다는 데서 오는 우울도 아마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내 마음이야 어떻든 사나흘쯤 뒤에 녀석들은 정말로 죄다 사라져 버렸다. 달랑 한 마리 남아서 내 뒤를 졸졸 따르는 수컷을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안 믿을 이유도 없었다.

혼자 남게 된 수컷은 외로움이 깊었다. 외로움은 녀석의 천성이 아니었다. 외로움이기보다는 고독이이라고나 해야 할, 고독을 즐긴다고나 해야 할 뭐랄까, 느긋한 기품 같은 것이 녀석에게는 있었다. 암컷과 새끼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앵앵거릴 때도 녀석은 그저 바라보기나 할 뿐 함께 몰려다니는 법이 없었다. 그랬던 녀석이 암컷과 새끼들이 사라진 뒤로 확 변했다. 외로움이 사무쳐서 고독을 즐길 수도 없게 돼버렸다고나 할까 뭐 그런 형국이었다.

동료 고양이들과도 뭐 그리 살갑게 친하지 않고, 사람을 봐도 응 너 사람이구나 하는 투로 무덤덤하던 녀석이 나만 보면 곁으로 바싹 다가와서 만져 달라고, 쓰다듬어 달라고 앵앵거리다가 반응이 없으면 아예 바짓가랑이에 얼굴을 대고 비벼대는데 그것 참, 처음에는 신기했다. 신기해서 함께 놀아주기도 제법 했었다.

문제는 녀석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싹 붙어서 졸졸 따라다닌다는 점이었다. 어찌나 바싹 붙어서 따라다니는지, 하루는 마당에서 잡초를 뽑던 중에 그만 녀석의 몸을 통째로 밟아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찢어지는 소리를 질러대며 뛰었고, 그 순간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이런 써글놈이, 따라다니 좀 마 이놈아.”소리가 터져 나왔다.

쏜살같이 뛰어 달아나던 녀석은 사람 걸음으로 여서일곱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우뚝 멈췄다. 선 채로 뒤를 돌아보는데 그 표정이 이게 뭐야? 저놈이 미쳤나? 하는 꼭 그런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녀석은 나를 더 이상은 따라다니지 않게 되었다.

친근감을 드러내며 따르기는 하되 바싹 붙지 않았고, 밥을 줄 때도 얼른 뛰어와서 칭얼대는 소리를 내던 예전의 습관을 버리고 일이 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다가오곤 했다.

 

신기하당
신기하당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러기를 한 달쯤이나 했나 두 달쯤이나 했나, 하여튼 어느 하루 녀석이 안 보였다. 이제 곧 보이겠거니 했지만 두 시간, 세 시간, 다섯 시간, 해가 지고 있는데도 안 보였다. 이게 뭔 사건이냐 하고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어디에서도 녀석을 볼 수는 없었다.

사라진 수컷 고양이를 다시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다섯 달이나 지나서였다. 살아 있는 고양이가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했다. 날이 추워져서 장작난로를 피우고자 장작창고를 들어갔는데 느낌이 뭔가 좀 이상했다.

낯설지 않은 색깔이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고 할까. 보았다고 할까. 하여튼 장작만 들고 나오기는 석연찮은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들었던 장작을 도로 내려놓고 여기저기 살피기를 얼마나 하다가 마침내 보았다.

장작더미 맨 꼭대기에 엎드린 자세로 죽어 있는, 수분은 죄다 증발되고 털과 뼈만 남아서 장작에 엉겨 붙어 있는, 그것은 보고 또 보아도 무엇인가의 공격을 받아서 죽은 모습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무엇인가의 공격을 받고 큰 상처를 입은 채로 거기까지 애써 올라간 것인가 여부는 알 수 없다 해도, 그것은 분명 거기에서 죽을 결심을 하고 올라간 것이라 여겨졌다. 그러니까 녀석은 사지가 멀쩡한 채로 애써 장작더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바싹 엎드린 채로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왜 거기까지 올라가서 죽고자 했던 거야? 나한테 얻어들은 욕 한 마디가 너무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에이 설마.

팔 개월 여가 지난 오늘까지도 나는 확실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가끔 생각했고, 코끼리가 죽음의 시간이 오면 스스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가끔 생각했고, 노장철학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집착 혹은 사랑의 감상에서 멀어지기 같은 명제들이나 가끔 생각해봤을 뿐이었다.

 

얘들은 지금 살아 있을까
얘들은 지금 살아 있을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새로운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와서 애앵, 소리를 낸 것은 수선화 꽃대가 막 올라오기 시작하는 2월 초순 무렵이었다. 지난날의 수많은 고양이가 그랬듯이, 이번에 들어온 녀석도 털이 누더기처럼 엉겨 붙었고 피골은 상접해서 먹을 것을 주면 냉큼 받아먹을 것 같았지만, 그러기에는 녀석이 너무 컸다. 완전 새끼가 아닌 사춘기급의 이런 녀석과 친교를 맺기로 하자면 최소한 한 달은 지극정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뒤에, 나는 나의 어리석음과 시건방짐을 한탄해야만 했다. 나의 예상을 크게 꾸짖기라도 하듯이 녀석은 거리를 조금도 좁혀오지 않았다. 마치 인간과의 거리두기 사오 미터라는 원칙이라도 정해놓은 것처럼, 사오 미터쯤 떨어진 곳에 처량한 자세로 쪼그려 앉아 애앵, 하고 애처로운 소리를 내면서도, 막상 먹을 것을 들고 다가서면 즉각 뒷걸음질을 치면서 카아, 카아, 공격적인 소리로 태세 전환을 하는 것이어서, 그동안 학대를 많이 당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달? 아니면 석 달?

나는 그렇게 기한을 대폭 연장해서 녀석과의 친교 맺기 프로젝트를 나름 정성껏 수행했지만, 이 또한 보기 좋게 깨지고 말았다. 석 달이 훌쩍 지났어도 녀석은 여전히 애앵, 하는 애처로운 소리로 먹을 요구하고 있었고, 내가 먹을 것을 들고 다가서면 뒷걸음질을 치고, 밥그릇에 먹을 것을 두고 돌아서면 슬금슬금 다가오기는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한은 먹지도 않고 사주경계를 한다. 내가 완전히 방안으로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먹을 것에 입을 대는데 어찌나 게걸스레 후딱 먹어치우는지 그 소리가 방안에서까지 들릴 정도였다.

 

새로 들어온 녀석 놀란 건가 위협하는 건가
새로 들어온 녀석 놀란 건가, 위협하는 건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먹을 것을 다 먹어치운 녀석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시 나타나서 앵앵거린다. 내가 미처 그 소리를 듣지 못할 때는 문 앞에까지 바싹 다가와서 앵앵거린다. 빨리 밥 안 주고 뭐하냐고 꾸짖는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문을 열면 번개처럼 휙, 달아나서 사오 미터쯤의 거리두기를 한다.

“이놈 참 웃기는 놈일세.”

아마 백 번도 넘게 그 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녀석은 놀고먹자 주의 철학을 완성한 것 같기도 하다. 마당 여기저기에 쥐구멍이 더러 보이기도 하건만, 잡을 줄을 모르는 것인지 잡는 법을 아예 익히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가 쥐를 잡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앞발을 살금살금 내딛으며 뭔가를 찾아다니는 고양이 특유를 자세를 취하는 법이 없다.

하다못해 어디서 죽은 새라도 한 마리 물어다가 토방 위에 내려놓고 나 어때요 잘했죠? 하고 의기양양해 하던 예전의 고양이들과는 완전 급이 다른 녀석을 멀리서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창끝처럼 날카로운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뚫는다.

아, 이 녀석이 어느새 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구나.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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