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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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석무] 얼마 전에 어떤 유튜브 강의를 들었더니, 강의하는 분이『동경대전』의 수운 최재우와 『목민심서』의 다산 정약용을 비교하여 말하면서 ‘목민(牧民)’이라는 책 제목만 보아도 다산은 수운에 미치지 못하는 학자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주장에는 민(民)을 피치자(被治者)로 여겨, 목민이란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위적인 용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목’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뜻으로만 해석한다면 그런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목민심서』의 서문에서 밝힌 다산의 주장이나『목민심서』내용에서 언급한 ‘목’에 대한 다산의 생각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고대 중국의 성군(聖君)인 문왕(文王)의 말을 인용하여 ‘목부(牧夫)’라고 했다면서, 목장에서 가축들을 양육해주는 사람처럼 백성들을 양육(養育)해주는 것을 ‘목’의 뜻이라고 설명하고는, “이로 미루어 보면 백성을 부양[養民] 하는 것을 ‘목’이라고 했던 것이 성현들이 남겼던 뜻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양로원(養老院)이 있는데 여기서의 양이라는 뜻이 ‘양민’의 양과 같아, 노인들을 다스리고 통제하는 뜻이 아니라 부양하고 돌봐주는 뜻이기 때문에 ‘목’을 ‘양’으로 해석한 다산의『목민심서』제목이 문제랄 것이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최근의『목민심서,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현암사』의 머릿 글에서, “모든 공직자는 옛날로 보면 목민관처럼 일반 백성을 보살피고[保民] 양육하는[養民] 관리이다.”라고 말하여 다산의 ‘목’은 보(保)·양(養)과 같은 뜻으로 백성을 주체로 놓고 그들을 보호해주고 길러주는 사람이 공직자라는 설명을 한 바가 있습니다. 다산은 더 직핍(直逼)하게, ‘목’의 뜻을 설명합니다. “토호들의 무단적 행위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승냥이나 호랑이와 같다. 승냥이나 호랑이의 피해를 제거하여 온순한 양 같은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아가게 하는 사람을 목(牧)이라고 이른다”[刑典·禁暴]라고 말하여 ‘목’은 승냥이나 호랑이 같은 사나운 짐승들로부터 온순한 양(羊)인 백성들이 편하게 살도록 보호해주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 명확한 표현이 있습니다. “온 세상에서 가장 천하여 호소할 데도 없는 사람들이 백성[小民]이지만, 온 세상에 가장 높은 산과 같은 사람도 백성들이다. 요순이래로 성현들이 서로 경계한 바가 요컨대 소민인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것이라, 이런 내용이 모든 서적에 실려 있고 사람들의 귀와 눈에 젖어있다. 그러므로 상사(上司)가 아무리 높아도 백성들을 머리에 이고 투쟁하면 굽히지 않을 사람이 없다”[奉公·文報]라고 말하여 ‘요보소민(要保小民)’의 표현에서 보듯이, ‘목’이 바로 보(保)임을 알게 해줍니다.

다산은 요순시대의 복원을 그렇게도 갈망했는데, 요순시대 정치의 핵심이 약하고 힘없는 백성을 보호해주는데 있었다면, 다산의 ‘목민’은 ‘보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목민의 뜻이 양민과 보민에 있다면, 그게 뭐 그렇게 권위주의적이고 백성들을 천시하는 의미로 풀이 할 이유가 있는가요. 양로원의 ‘양’의 뜻이 ‘목’과 같다면 ‘목민’이라는 용어 때문에 다산을 낮게 평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양민’ ‘보민’하는 사람들이 목민관임을 부인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요. 깊이 생각할 일입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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