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200년 전 다산 정약용의 생각은 오늘 우리들이 더 절실하게 느껴야 할 생각입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던 친구 한치응(韓致應)에게 송별사로 써준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계의 중앙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 아니라고 설명하고는 세계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고 호칭하는 이유는 “요순우탕(堯舜禹湯)의 다스림이 있어서 중국이라 부르고 공자·안자·자사·맹자의 학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성인(聖人)들의 다스림이나 학문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다 얻어내어 옮겨 놓아버렸다. 왜 먼 곳까지 가서 구해올 필요가 있겠는가(送韓校理致應使燕序)”라고 말해, 중국에서 그런 것은 배워 올 필요가 없고 다만 “전답에 씨 뿌리고 종자 심는 편리한 농법은 배워와야 하고, 문학이나 예술의 박아(博雅)의 능력은 배워와야 한다.”라고 말해 농업기술과 문학과 예술의 높은 수준은 배워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선배 이기양(李基讓)이 중국 사신으로 갈 때는 “우리 백성들을 위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도를 생각하여 만세토록 오래 혜택을 입도록 해주시오…”라고 말하여 중국에서 백성들의 삶에 도움을 줄 기술을 배워올 것을 주문하였습니다. 성리학만이 학문의 주조이고, 기술개발이나 기술 도입은 천시하던 때에, 비록 만주족인 야만의 국가이지만 우리보다 앞선 청나라의 기술문명은 기필코 받아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지녔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실천에 옮긴 사람을 우리는 북학주의자(北學主義者)라고 부르는데, 연암 박지원·초정 박제가 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다산 또한 그들과 생각이 같았음을 알게 해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자신은 정조임금때 규영부에서 교서(校書)일을 보면서『흠정고금도서집성』을 열람하였고 그중에서도 고공전(考工典)의「기기도설(奇器圖說)」을 연구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뒤에는 박제가의 저서『북학의』6권을 모두 읽었으며, 또 그 뒤에는 박지원의『열하일기』 20권을 공부했다면서 그런 책에서 중국의 기용(器用) 제도를 연구했노라고 말했습니다.(『경세유표』:이용감(利用監)조항) 이 점에서 다산은 경세치용의 성호 이익의 학문에 이용후생학파의 박지원 학문까지 종합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였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조시대에 다산이 기술관료로서의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것은 그런 정도로 기술에 관한 저술을 탐독하였고, 거기서 배운 지식으로 기중기·거중기 등의 기계를 개발하고 제작하여 화성 축조에도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요순만 노래 부르며 성리학에 매몰되어 가난에 찌든 나라를 염두에도 두지 않던 시절, 그런 실학자들은 기술개발과 도입에 그만한 정성을 들이면서, 부국강병의 나라를 만들려고 온갖 정성을 바쳤습니다.

21세기의 오늘, 세계는 참으로 놀랍도록 변하고 바뀌었습니다. 기술이 아니고는 세상은 유지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과거에 비하여 한국의 기술문명도 높은 수준에 이르렀지만, 우심한 경쟁의 세계에서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산의 생각보다 몇 배나 더 정성스럽게 기술개발과 도입에 철저해야 합니다. 반도체 배터리 등 미래 혁신산업 국제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해야 하고, 세계 최고수준의 IT기술력과 디지털 역량은 도약의 발판이 되고 있고, 뒤졌다는 문화예술도 이제는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지속적으로 이들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도 모두의 책임입니다.

더구나 후진국임을 면치 못하는 여러 분야에서도 약점을 보완해서,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에서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여야 합니다. 200년 전, 그런 어둡던 시절에, 기술개발과 도입만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드는 첩경이라던 다산의 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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