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박석무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박석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라는 40권의 책은 공자의『논어』를 새롭게 해석한 다산경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름 그대로 고금의 논어에 대한 주석들을 모아놓고 바른 해석이냐 그른 해석이냐를 따지고는 주로 ‘보왈(補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보충해서 해석하는 자신의 학설임을 열거해 놓았습니다. 『논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삼호(三乎)로 시작됩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인불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는 글에서 보이듯, 문장의 끝이 호(乎)라는 글자로 끝나서 ‘3호’라는 용어가 나왔습니다. 조선 5백 년 동안에는 대체로 큰 이론 없이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註)』를 정통 교과서로 여겨 주자의 주(註)를 진리로 여기며 공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산 또한 주자의 해석에 오류가 없는 경우는 그냥 그대로 따르며, 다른 해석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견해와 다른 해석에는 과감하게 반박하면서 보충의 의견을 제시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렸습니다. 창의적인 다산의 해석은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니, 그의 높은 학문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학이시습’이라는 구절을, ‘학소이지(學所以知)’라고 하며 학은 알기 위한 것이며 ‘습소이행(習所以行)’이라 해석하여 습이란 행하기 위한 것이니, ‘학이시습’은 ‘지행겸진(知行兼進)’ 즉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라는 해석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만 참다운 기쁨이 나오기 때문에 열(說)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노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습(習)은 연습하는 것이라는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풀이를 했습니다.

벗[朋]이라는 글자의 해석도 다릅니다. 주자는 벗이란 동류(同類)라고 해석했는데, 다산은 동문(同門)이나 동류가 아니라 ‘지동이합의자(志同而合意者)’ 즉 벗이란 뜻이 같고 의사가 합치되는 사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3호 중에서 어려운 대목은 마지막의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의 경우입니다. 여기에서 다산은 학문적 깊이와 탁월함이 나옵니다. ‘삼호’란 성기(成己)와 성물(成物)의 전체를 말해주는 문장이라고 말하고는, 배워서 행함은 성기, 자신의 인격을 이루는 일이고, 인격이 이룩되면 남들이 알아주고 자신을 따르기 때문에 즐거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먼 곳에서 벗들이 찾아오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겠느냐라는 뜻입니다.

문제는 마지막 성물(成物), 자신의 인격 이외의 모든 사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경우라면서, 남이 알아주지 못해 자신을 높여주지[宗我]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못하느냐는 그 권한이 나에게 있지 않고, 타인에게 그 권한이 있기 때문에 그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주자의 풀이대로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음은 역(逆)의 일이어서 어렵기 그지없으니 오직 덕을 이룬 군자만이 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대목입니다. 모든 다툼, 모든 불화(不和), 모든 대립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성을 내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고, 자기가 대접받는 재미로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정말로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바로 그 점입니다.『논어』의 3호를 읽으며 그 점에 접근해야 한다고 언제나 생각해도 미치지 못하는 제자신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