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김지혜 작가 인터뷰-1

김지혜 작가_김지혜 제공
김지혜 작가 ⓒ위클리서울/ 김지혜 제공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아날로그’라는 단어가 아직 일부 세계에서 부유하던 2010년대 초였다. 유흥가가 아니라 예술의 메카라고 불리던 홍대 근방의 어느 공간에서 청년 뮤지션과 미술가들이 모였다.  

가볍고 진지한 주제, 소재, 단어, 음악들이 난무하던 그날 파티에서, 주최자에게 인격체로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날 모임 제목은 ‘김지혜 없는 김지혜 파티’. 주최자만 없는 파티는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고조되자 자리를 잠시 빠져나와 습관적으로 공간을 탐색했다. 기분 좋은 유화물감 냄새가 나는 쪽으로 향하자, 살짝 열린 문틈으로 어른의 키만큼 큰 사이즈의 그림들이 보였다. 그것이야말로 아주 미스터리한 주최자의 작업 공간이었다.

신부 없는 고해소의 거룩한 원천을 훔쳐보듯, 얼굴 모를 주최자의 색채를 탐미했다. 서로 다른 질감의 블루와 그린이 향연을 펼친 페인팅과 이젤 위 캔버스에 펼쳐진 블랙과 화이트, 거친 질감의 레드와 강렬한 옐로우는 압도적이랄까, 일종의 공격성마저 느꼈다. 공격은 자연스럽게 호기심으로 변형될 것이다.

시간이 조금 흐른 어느 날, 어느 자리에서 김지혜 작가를 만났다. 누구보다 직관적인 색의 향유자를. 압도감은 날카롭고 위압적인 인상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는 강인하고 따뜻한 눈을 가진 작은 소녀 같았다.

거품, 45.553.0cm_2020 ⓒ위클리서울/ 김지혜 제공

작품세계의 한 시기를 정리한 개인전 'pickles'

습기가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기라도 낼 것 같았던 7월 어느 날, 서울 외곽의 한 작업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첫 손님이나 다름없다”면서 며칠 전 이사한 탓에 정리가 덜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업실은 첫눈처럼 청결한 공간이었다. 어느 건축가가 직접 디자인해 살고 있었다는 공간은 층고가 높은 데다 다층적이라서 독특한 안정감을 주었다.

“최근엔 작업실을 일산에서 이쪽으로 옮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공식적인 활동은 작년 말 음악가들과의 라이브 퍼포먼스 협업, 그 이전에는 ‘예술공간 서:로’에서 했던 전시가 있었어요.”  

그녀는 코로나19로 문화예술계 행사들이 취소되는 상황에도 쉼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년 5월 당진문화재단 주최로 당진문예의전당에서 열린 김지혜 1인전 'pickles(피클스)'. 1, 2층 전체를 작품으로 채웠던 전시는 그녀의 작품세계의 한 시기를 총정리하는 듯 보였다.

“전시 기획하시는 쪽에서 ‘옛날 작업부터 전부 꺼내보자’는 제안을 먼저 하셨죠. 아무래도 옛날 작품들과의 스타일 차이도 있고, 너무 산만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스로 들었는데 학예사 분이 ‘이런 작가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힘을 얻었어요.”

그리고 그녀는 전시 타이틀 ‘피클스(pickles)로 지은 이유를 설명했다.

“여러 재료를 사용해 피클을 담그고 맛을 내듯이, 전시에서 드로잉과 영상 등의 매체를 다뤄서 작품을 작업하는 과정이 피클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지은 이름이에요.”

그 전시를 통해 그녀가 유년기를 보낸 충청남도 당진이라는 도시의 색감, 여백, 여운 등이 묻어있다고 생각했다. 섬에서 태어난 화가 김환기가 바다의 색을 담은 ‘환기 블루’를 창조해냈듯 당진이 가진 다채로운 초록색들이 김지혜의 ‘색’을 만들었다고.

“페인터들마다 성향이 있어요. 직관적이지 않고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그리는 사람들도 있고, 좀 더 학술적 접근을 하는 사람도 있죠. 저는 색에 관해선 직관성이 강한 쪽이라서 그 공간에 가면 영향을 크게 받게 돼요. 포트폴리오 정리하면서 스스로도 ‘이게 한 사람의 그림이 맞나?’하고 질문할 때도 있고. 가령 을지로 쪽에서 작업했을 땐 공업적 환경이 색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가평에 있는 70평짜리 공간에서 큰 그림을 작업하기 위해 갔는데, 너무 추우니까 따뜻한 색에 손이 안 가더라고요.” 

그녀의 설명에조차 색채가 깃들어 있었다. “당진은 따뜻한 색감이 많고, 당진에서 작업하는 동안 작업실까지 천변을 보며 구경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가곤 했어요. 밤에 하는 작업이 거의 없었고, 새벽부터 해 뜨는 걸 보며 작업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업들에 색이 입혀진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변덕스럽게 도시 한가운데서 야작하면서 나오는 작업들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기도 하고. 환경을 계속 바꿔가며 작업하는 건 확실히 좋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곳에 있진 않았어, 97x162.2,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팅, 2020
사실 그곳에 있진 않았어, 97x162.2, 캔버스에 아크릴 페인팅, 2020 ⓒ위클리서울/ 김지혜 제공

“방황을 시작한 건 반가운 일이죠. 생명이 엄청 긴 직업이니까.”

화가의 한 시대를 요약하는 전시를 한 뒤에는 어떤 변화가 생길까? 가령, ‘해왔던 스타일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방향을 정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해보자’는 다짐이 되지는 않을까.

“어느 시점부터 무거운 언어들을 쓰고 싶은 경향이 있었는데, 예전 작업의 발랄함이나 떠다니는 듯한 이미지들을 발견하고는 ‘이걸 동시에 가져갈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그러면서 옛날에 했던 가벼운 스타일도 다시 해보자는 생각도 갖고 있지만 사실 엄청 방황 중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기성 작가로 들어가는 40대의 나이를 몇 년 앞둔 시점에서 방황을 시작한 건 되게 반가운 일이죠. 생명이 엄청 긴 직업이니까.” 

화가란 무엇일까. 평생 거듭되는 방황마저 아름답게 허용되는 직업이란 고전적인 의미의 ‘숙명’ 아닌가? 

요즘엔 어떤 작업에 중점을 두고 거듭 물었다. 방황의 반경이 클수록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테니까.

“좀 더 캔버스에 정형화돼 있는 작업들, 클래식하고 얇게 가고 싶은 작업들을 해서 작년 말에 전시했어요. 그러면서도 엄청 두꺼운 느낌의 작업도 해봤는데, 나무를 소재로 했던 ‘터치’ 작업도 전시에 넣어 봤고. 작년 12월, 재미공작소에서 전자음악 하는 이지선 씨와 협업했던 작업도 있었고, 음악 협연들이 굉장히 흥미가 있어 디지털 데이터도 쌓아가는 중이에요.”

몇 년간 순전히 나의 취향으로 그녀를 클래식한 페인터라고 혼자 정의했지만 확실히 어느 시점부터 디지털 작업이며 협업이 늘었다. 

“2년 전부터 디지털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작년에 뮤지션들과 협업을 두 번 했고, 개인 전시용으로 그린 디지털 페인팅에 음악을 입힌 전시도 세 번 했어요. 계기는 단순한데, 일산으로 이사할 때 잠시 작업실을 찾느라 작업 공간을 따로 쓰기 힘들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림을 그릴 수가 없으니까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태블릿 들고 다니면서 이동 시간에도 중간중간 그렸는데, 그 단면의 파일들이 쌓이면서 ‘불규칙적 화면이 이어질 수 있는 어떤 걸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 가닥 긋고, 쌓는 작업을 계속해 폴더를 만들었어요. 처음부터 영상작업을 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영상 작업도 하게 됐어요. 기존에 하던 작업들과 디지털 페인팅을 잘 엮어 이게 내 스타일이라는 걸 잘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과제인 거 같아요.”

사실 어느 시점부터 순수예술 작가들이 하는 디지털 작업들을 보며, 이것이 시대의 흐름인가? 클래식한 페인터들의 시대는 갔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새로운 걸 시도해보자는 포부보다는, 가지고 있는 툴은 다 이용해 보자는 취지가 맞다”고 설명했다. “확실히 페인터들에게 아이패드의 등장이 컸어요. 페인트들을 충족할 수 있는 정말 쉬운 툴이 생긴 거죠. 페인터 중 감각이 살아있는 사람은 페인팅보다 디지털화 시킨 작업들에서 색감의 표현력이 더 자유로워지기도 하고요. 옛날 방식처럼 비소 같은 거 들어간 보라색 사서 쓰고 하던 세대랑은 달라졌다고 할 수 있겠어요. 요즘 물감도 굉장히 잘 나오지만, 확실히 디지털 도구 안의 팔레트는 너무 무한하기 때문에 그걸 체험해볼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반면 디지털 작업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이걸 굳이 페인팅으로 다시 옮겨야 돼? 하기도 하고, 스스로의 스타일에 맞춰 중심을 똑바로 잡고 확인을 계속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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