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소나무와 저수지의 어울림
소나무와 저수지의 어울림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저수지에 산책로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은 게 삼 년 전이었다. 저수지 주변을 정리해서 사람들이 걷기에 좋은 길을 낸다는 게 아니라 저수지 속에, 그러니까 물 위를 사람들이 우아하게 혹은 활기차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든다는 얘기였다. 그 말을 들을 때는 공무원들이 또 뭔가 돈 쓸 거리를 찾아냈나 보다 하고 무시해 버렸다.

무시하고 잊어버렸던 그 소재가 삼 년이나 지나서 다시 생각난 것은 황병기의 가야금 산조 ‘비단길’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쫓아도 멀리 달아나지 않는, 손등에 앉았다가 콧잔등에 앉았다가 자꾸 시비를 거는 파리 한 마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등허리를 타고 줄줄 흐르는 땀이 괴로워서? 이유야 어떻든 ‘비단길’을 듣고 있는데도 비단은 떠오르지 않고 시퍼렇게 찰랑거리는 호수만 떠올라 왔다. 호수는 곧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고 있는 그림으로 확대 개편되어 갔다.

물 위를 걷는 사람들이라.

아하 싶었다. 대단히 복잡하고 오묘하고 신기한 뭔가를 내가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후딱 일어나서 달려가 보았다. 알고 보니 매우 단순한 공법의 단순한 시설이었다. 무동력 바지선을 구름다리처럼 길게 띄워놓고 쉼터와 난간을 설치한 정도였다. 단순한 시설이긴 하지만 심하게 출렁거리지 않아야 하고, 홍수가 나도 물에 잠기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해야 하니 그런대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겠다 싶기는 했다.

물 위를 산책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멀리서 구경하는 사람도 없었다. 관리하는 사람이라도 있을 법하건만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물 위에 떠 있는 산책로 입구에 거대한 자물쇠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코로나 19 때문에 개장을 무기한 보류한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보아 하니 공사를 끝낸 지도 일 년 넘어 이 년이 다 돼가는 오늘날까지 새들이나 가끔 와서 쉬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산책로 위의 다리
산책로 위의 다리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다. 뭔지 모르게 감개가 무량해진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기막힘과 감개무량이 동시에 출동하면서 내 마음은 아주 복잡해져 갔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이 저수지가 어떤 저수지인가. 생각이 없을 수 없었다.

저수지는 물을 저장하는 물 창고인 것만은 아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꿈꾸고 소망하는 사람의 생각이, 선망이 잠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없이 그냥 우두커니 한참을 보고 있노라면 수면 위로 마치 홀로그램처럼 오만 가지 그림이 떠올라 와서 나를 설레게 한다.

뿐만이 아니다. 저수지는 물고기들의 인큐베이터이고, 요람이며, 운동장이고 무덤이기도 하다. 출생과 사망이 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얼핏 천국이 따로 없구나 싶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소망하기는 물고기들도 사람 못지않아서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물고기들은 저수지란 이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떠나고 싶다 해서 사람처럼 아무 때나 훌훌 벗어던지고 떠날 수 있는 운명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갇혀만 있어야 하는 운명인 것도 아니다. 문이 열리는 날이 있다는 것을 물고기들은 안다. 특히 장마철 폭우가 거칠게 쏟아질 때, 천둥과 번개와 바람이 요란해서 사람들이 홍수 피해를 걱정하고 있을 때 물고기들이 기다리던 문은 여기저기 사방에서 마구 열린다.

폭우가 쏟아지면 여기저기 사방에 도랑이 생기면서 물이 속속 저수지로 모여든다. 물고기들은 물이 흘러내려 오는 방향으로 전속 질주한다. 앞을 가로막는 바위도, 가파른 경사도, 물이 있는 한 멈칫거리지 않고 뛰어 오르고 넘는다. 그렇게 오르고 또 오르고, 계속 오르다 보면 물고기들은 어느새 산중턱의 절간 마당에 도착해 있고, 더 이상은 나아갈 방법이 없어서 펄떡펄떡 뛴다.

 

멀리로 모양성이 보이고
멀리로 모양성이 보이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유년기를 절간에서 보낸 나는 그 시절에 물고기가 하늘에서 빗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슬비나 보슬비나 가랑비가 올 때는 물고기가 마당에 없지만 거센 빗줄기가 생길 때는 물고기가 나타난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러니까 그때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실제의 밧줄로 오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밧줄을 타고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깨진 것은 낚시를 알면서였다.

생각이 많은 젊은 중이 낚시를 좋아했다. 어쩌면 젊다기보다 아직은 어리다고, 또는 동자승이 조금 더 성장한 사이즈라고 함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 어린 중을 외삼촌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의 외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고, 나의 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니 내게는 자동으로 외삼촌이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 어머니의 친동생이 아니었고, 외할머니의 아들도 당연히 아니었다.

혈연이야 어떻든 나는 그가 나의 외삼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형도 없고 누나도 없는 내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내 우산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었다. 성질이 잔뜩 났을 때는 ‘시벌눔’이라는 둥의 퉁퉁 불어터진 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그런 욕지거리조차도 나를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내가 자기한테 ‘시벌눔’이라 했다고 나를 때린다거나 노려본다거나 어떤 식으로든 적대적 감정을 한 번이라도 드러냈다면 나도 아마 그렇게까지 그를 믿고 따르지 못 했을 테지만, 그는 화를 내야 할 것 같은 상황에서 화를 내는 대신 빙그레, 하는 미소를 짓는 뭐랄까, 절간의 탱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약사여래나 문수보살 같은 뭐 그런 사람이었다.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고, 누구와 싸움을 벌이는 일도 없는 그가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낚시에 취미를 들이기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중중때까중’ 어쩌고 놀려대는 또래 아이들로 인해 마음이 상했을 때 아무도 없는 저수지로 가서 응어리진 마음을 달랜다는 것을 나는 한참 뒤에 알았다.

 

쉼터
쉼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잠깐 쉬어가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강태공처럼 빈 낚시를 던져놓고 그냥 앉아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밑밥으로 된장을 챙기는가 하면, 미나리가 자라는 축축한 땅을 뒤쳐 지렁이도 듬뿍 잡아들고 떠나는 본격적인 낚시였다. 잡은 물고기로 무슨 매운탕 같은 것을 끓여먹자는 낚시는 아니었다. 잡은 물고기를 방생 어쩌고 하면서 저수지에 도로 놓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를 굳이 가져와서 절간 앞 연못에 풀어놓았다. 그러면 불자 중에 누군가가 어느 날 신고도 없이 싹 다 잡아가곤 했다.

사방으로 참나무와 벚나무가 빽빽한 절간에서 오솔길을 따라 두 시간쯤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갑자기 눈앞이 훤해지는 저수지가 나타났다. 돌멩이를 들어 올리면 가재가 불불불 달아나는 작은 골짜기와 연못밖에 몰랐던 시기의 나는 저수지가 무엇인지조차 당연히 몰랐고,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는 더더욱 몰랐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뜻밖에도 답은 간단했다.

“여기가 물고기의 집이란다.”

외삼촌의 설명을 나는 스펀지처럼 고스란히 흡수해 들였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의심의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저수지란 것은 물이고, 물고기는 물에서 사는 동물이니까 물고기의 집이라는 논리에 허점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내가 생각을 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미숙하나마 상상도 제법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때 생각했었다. 아니 상상했었다. 저 거대한 저수지는 외삼촌이 가끔 낚시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고, 물고기들 또한 외삼촌이 낚시를 할 수 있도록 저수지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이런 바보 같은 믿음은 아마 내 나이 열 살 근처에까지 계속되고 있었을 것이다.

 

수심표기
수심표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때 그것이 깨지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어쩌면 지금도 세상의 모든 저수지는 물고기가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해에 가뭄이 들었다. 가뭄도 아주 큰 가뭄이어서 내 생애 처음 기우제도 구경할 수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떡을 하고 돼지를 잡아서 산꼭대기에 올랐다. 누구나 없이 넙죽넙죽 절을 하면서 울부짖는 소리로 비를 내려 주십사 기도를 하는 기우제는 지금 생각해도 볼 만한 구경거리였다.

기우제를 올렸는데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물이 쏙쏙 빠져나가던 저수지는 마침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장자리 바닥은 벌써 전에 쩍쩍 갈라졌다. 작은 물고기가 갈라진 틈에서 죽은 채로 멸치처럼 말라갔다. 큰 물고기들은 펄떡펄떡 뛰어서 아직 물이 남아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방앗간의 발동기를 동원해서 아직 남아 있는 물을 빼다가 논바닥에 뿌렸다.

저수지는 이제 완전히 말랐고, 물고기들은 큰 것 작은 것 구별이 없이 모두 잡혀서 매운탕 거리가 됐거나 새들의 먹이가 됐거나 죽어서 흙이 되어갔다. 그렇게도 알뜰하게, 살뜰하게 단 방울의 물도 남기지 않고 빼다가 논바닥에 뿌렸지만 벼는 이삭도 패보지 못하고 말라죽어갔다. 고구마며 수수, 콩 같은 밭곡식은 그보다도 훨씬 전에 이미 죽어서 땔나무처럼 바삭바삭 말라 버렸다.

그 해의 기록적인 가뭄으로 쌀 한 톨 수확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저수지확장 공사 울력에 동원되었다. 농부들뿐만 아니라 학교 선생님도, 학생도, 공무원도, 향토사단의 군인들도, 사람이라면 모두가 동원되었다.

 

전면 둑위에서
전면 둑위에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남녀노소 구별이 없이 모두가 나와서 양동이에 흙을 퍼 담아 들고 나르는 장면은 가히 장관이라 이를 만했다. 꼬맹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는 개들도 모두 나와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온 몸에 진흙을 뒤집어쓴 채로 법석을 떨었다.

겨울에는 굶어죽은 사람에 관한 얘기가 심심찮게 떠돌았다. 겨울이 가고 보릿고개 봄이 왔을 때는 여기서 저기서 풀죽이라도 끓여먹겠다고 풀을 뜯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래도 어쨌든 세월은 약이었다. 다시 농사철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또 한 번의 울력에 나섰다. 저수지의 물이 한 방울도 허비되지 않도록 수로를 정비하는 울력이었다. 저수지 둑을 보강하는 작업도 병행되었다. 아무나 함부로 저수지에 올라 둑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감시활동도 개시되었다.

저수지는 이제 명실상부한 보물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보물로서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때의 혹독한 가뭄을 교훈으로 정부에서는 여기저기 도처에 관정을 뚫는 사업에 나섰고, 개인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논에 구멍을 뚫었다. 나중에는 여유가 없는 사람도 불안해서 못 살겠다며 빚을 내서 구멍을 뚫었다. 이런 유행 덕분에 모터펌프 제작회사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여간해서 고장이 나지 않는 제품이 등장하는 등 기술력 또한 눈이 부시게 좋아졌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한두 달쯤 비가 안 내려도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의 양이 감소했다 싶으면 각자 저마다의 모터펌프를 가동해서 지하수를 끌어올리면 되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저수지의 지위는 자동으로 강등되었다. 보물은 보물이되 그리 큰 보물은 아닌, 수자원공사 직원들이 알아서 잘 관리할 테니 우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져 갔다.

그리하여 이제는 마침내 수상 산책로가 등장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나는 모르겠다. 인간의 사치에 관한 욕망은 끝이 없어서 결국은 그 사치의 포로가 되고 만다는 어느 사회학자의 분석을 씁쓸하게 더듬어나 볼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왜 이 시기에 나타나서 저리도 모진 맹위를 떨치는 것일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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