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날씨가 미쳤다. 갑자기 추워졌다. 아직 단풍도 들지 않았고 곧 노랗게 물들 덕수궁 돌담길도 가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옷깃을 부여잡게 되는 계절이 급하게도 들이 닥쳤다.

사계절 중 가을을 제일 좋아한다. 태어난 계절이라 본능적인 끌림이 있어서인지 스산한 바람결에 도톰함과 가벼움 사이의 옷차림도 좋다.

핸드폰에서는 며칠 전부터 생일을 축하한다며 문자가 울려댔다. 자주 가는 병원이나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해마다 빠지지 않고 생일을 축하해 준다. 그러나 지인들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생일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SNS에 생일을 공개하고 축하를 즐겁게 받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들은 태어난 것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나는 생일을 축하받는 일이 굉장히 어색하다. 다른 사람의 생일은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축하를 해 주지만 내 생일은 그렇지 못하다.

내가 태어난 그날의 날씨도 스산한 바람이 살랑거렸다고 했다. 밤새 쥐어뜯는 진통을 겪었던 산모는 이승과 저승을 오락가락 하는 경험을 몇 번이나 했다고 했다. 찌릿찌릿 하는 배를 움켜들고 병원을 향하는 길은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라고 했다. 첫 아이를 출산하는 그 시간은 지리멸렬할 만큼의 외롭고 고통스러웠지만 처음으로 마주한 조그맣고 까만 핏덩이는 그저 예뻤다고. 병원비가 아까워 출산한 지 하루 만에 집으로 왔다. 단칸방에 마련한 신접살림은 초라했고 아이와 산모를 위해 산후조리를 해 줄 이는 없었다. 냉골이던 방에 불을 떼기 위해 연탄 한 장을 사서 돌아오는 길은 왠지 모르게 서글펐다고 했다. 혼자서 방에 불을 떼고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빠는 동안 아이 만큼은 이 세상 최고로 키우겠노라 다짐을 거듭했다. 주말이 되어서 집에 온 아이 아빠는 홀로 출산을 견디어 낸 산모에게 미안함을, 처음 마주한 딸아이의 모습에 반가움을 표현하느라 바빠 보였다.

생일이 다가오면 엄마는 늘 같은 이야기를 해년마다 해주었다.

주말부부였던 엄마는 나를 키우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밤이면 밤마다 그렇게 울어댔단다. 이웃집에 미안할 정도로 몇 시간을 울어댔다. 몸에 바늘이라도 들어갔는지 뒤져보기도 했단다. 정말 이유도 없이 그렇게 울어댔다. 미안하지만 나는 기억이 없다.

게다가 잠시도 엄마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화장실을 가려고 잠시 떼어 놓으면 죽을 듯이 울어재끼더란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잠깐 애를 받아주었는데 울음소리 때문에 도저히 똥을 눌 수가 없어서 애를 안고 쭈그려 앉아 똥을 누었다고 했다.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니 나중에 커서 유명한 가수가 될 거라며 이웃집 아줌마들이 위로해 주더란다. 지금 키우는 것이 힘들어도 나중에 크면 효도할 거라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효도는 특별히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속이나 안 썩히면 다행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생일이 제일 힘들고 괴로운 하루였다. 이 세상 최고로 키우겠다는 엄마의 다짐과는 달리 나는 이 세상 최고가 되지 못했다. 엄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고 대신 내 자존감을 조금 씩 갉아먹기 시작했다 것도 모자라 지하세계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부모를 원망했다. 왜 나를 낳았는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세상에 내놓았다고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쓴 적도 있다. 십 대의 사춘기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되었고 내 존재에 대한 이유는 더욱 불분명해졌다. 생일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1년 중 어느 날 하루에 불과했다. 오히려 평범한 어느 날 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 날만 아니면 난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나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인데 주변에서는 자꾸 축하를 해주었다. 대학 때는 친구들과 선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호프집을 데리고 가서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 주었다. 싫다는데 억지로 케이크의 불을 끄라고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술을 진탕 먹는 일이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총무부에서 기어코 생일 축하해 주었다. 동료들이 선물을 해주기도 하였고 마음씨 좋은 상사들은 회식하라며 금일봉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어색했다. 태어난 것은 내 의도가 아닌데 왜 저들이 저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술이나 진탕 먹는 일이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축하해줘서 고맙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은 듯하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나를 출산하면서 느꼈을 산모의 고통을 나도 두 번이나 겪으면서 깨달았다. 나 또한 내 아이들에게 너희들을 낳아도 되겠는지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 생명이 더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알았다. 허락하지도 않은 생명을 내 마음대로 이 세상에 내 놓았으니 그 생명이 뜻하지 않게 이 세상에 온 김에 열심히 살아 낼 수 있도록 사랑으로 온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엄마도 그러했을까. 그랬겠지. 나를 사랑으로 온 정성을 다해 키웠으리라 믿는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스산한 바람이 살랑이는 가을 어느 날이 나의 생일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미역국은 끓이지 못했다. 미신이겠지만 수능을 앞둔 자식이 있다 보니 미역국은커녕 계란도 깨지 않는 것이 불문율 아닌가.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은 안 먹어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 보내느라 뼈마디가 아스러지는 고통을 감내한 엄마에게 단 한 번도 미역국을 끓여 드린 적이 없다. 나중에 커서 효도할 거라던 오래 전 이웃집 아주머니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출산한 지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 온 엄마는 연탄 한 장 들고 오는 데도 자궁이 내려앉는듯한 아픔을 견뎠다는데 미역국이나 제대로 끓여 드셨을까?

왜 낳았냐고 대들지나 말 것을 참으로 싸가지 없는 딸년이다.

생일날 아침, 잠에서 깨어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생일의 고통스러움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엄마가 되고 보니 나의 엄마가 안쓰럽고 미안하고 그렇다. 살아 온 지난날들이 순식간에 스쳐간다. 찰나이지만 또렷한 장면으로 무의식의 경계를 넘나든다. 내년에는 좀 더 나아질 것이다.

생일이라고 가족들이 축하를 해준다. 여전히 축하를 받는 일은 어색하다. 언제쯤이면 아무렇지 않게 이 축하를 즐길 수 있으려나.

미역국이 없어도 괜찮다. 비록 사랑받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매일이 행복하니 그저 태어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덕분에 딸아이에게서 고급 진 명품 브랜드의 접시 두 세트와 아들에게서 호두파이를 선물 받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게다가 김 여사 초밥 좋아한다며 다섯 팩이나 사들고 온 남편 덕분에 잠시나마 다이어트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도 있었다.

내년 생일에는 엄마에게 미역국을 끓여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낳아 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만약 물어보았더라면 분명 태어나지 않겠노라고 했을 테니 말이다. 살아보니 괜찮은 세상 모두 엄마 덕분이라고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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