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다산 정약용
다산 정약용

[위클리서울=박석무] 평생동안 다산 관련 책을 읽고 있지만 어떤 때는 여러 번 읽어본 글 속에서도 새삼스럽게 이런 대목이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음미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산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일생을 알려주는 기록을 몇 가지 남겼습니다. 18년의 긴긴 유배살이를 마치고 돌아온 4년 뒤인 1822년은 61세로 회갑을 맞은 해였습니다. 죽을 날이 멀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기록으로 남겼으니「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集中本)」과「광중본(壙中本」)이라는 두 편의 글입니다. 집중본은 문집에 실어 오래 전해지기를 바라서 자신의 삶과 학문적 업적 및 공직자로서의 업적까지 상세하게 기록한 내용을 담았고, 광중본은 무덤속에 지석(誌石)으로 구워 넣으려고 간략하게 자신의 이력만 알도록 해준 글이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다산연보(茶山年譜)」라는 이름의 책이 있고, 다산이 세상을 떠난 오랜 뒤인 1921년 현손(玄孫) 정규영(丁圭英)이 다산연보를 보완하여 새롭게 만든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라는 책으로 다산의 일생과 업적을 가장 잘 담아놓은 책입니다. 다산의 글을 쓸 때마다 열어보는 책인데, 오늘 새삼스럽게 그 책을 읽다가, 아! 또 이런 대목이 있구나라는 느낌을 말해야 할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1795년 정조 19년은 다산의 나이 34세로 정조임금과 다산이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뤄가던 참으로 멋진 기간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한 기록이 있습니다.

연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월 17일 사간(司諫:종3품)에 제수되었다가 바로 이어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한 달 뒤인 2월 17일 병조참지에 제수되고, 때마침 회갑을 맞은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살아계시면 회갑을 맞을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아가 화성에서 성대한 회갑연을 여는 잔치가 베풀어져, 다산은 병조참지로 임금을 호위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임금의 최측근으로 그 큰 잔치에서 다산은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하면서 시를 짓고 글을 짓는 일에도 최고의 칭찬을 받으면서 화려한 벼슬살이를 했습니다.

잔치를 마치고 궁중에 돌아온 어느 날 임금은 다산의 실력과 재주를 시험해보려고 벌 대신 시를 지어 바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칠언배율(七言排律) 백운(百韻)의 시를 지으라고 했으니 최소한 1400자 이상의 시를 지어야 했습니다. 3경 1점에 시작해서 5경 3점에 마쳐야 했으니 6시간 정도의 밤사이에 지어야 했습니다. 시를 완성한 뒤 다산의 시를 읽어 본 정조나 문신(文臣)들이 깜짝 놀라 감당할 수 없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정조의 평가는 대단합니다. “문장이 원만하고 구절이 매끄러운 데다 경구(警句)도 아주 많았다 … 오늘 이 사람의 작품은 신속한 점으로는 시부(詩賦)보다 낫고 법도에 맞는 점으로는 표책(表策)보다 못하지 않으니 이런 사람은 참으로 실력과 재주가 보기 드문 경우…” 고 칭찬했습니다. 당시 대표적 문장가들인 3제학(三提學)으로 규장각 제학 심환지, 예문관 제학 이병정, 홍문관 제학 민종현은 임금의 분부로 평가를 했는데 감동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심환지는 “문원의 기재[文苑奇才]”라는 용어까지 사용했습니다. 감동한 임금은 그때 다산에게 귀한 선물인 대녹피(큰 사슴가죽) 한 벌을 하사하기도 했으니, 다산의 영예와 평가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게 해줍니다.

그러나 세상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원의 기재가 뒷날 비방과 중상모략으로 인하여 18년의 귀양살이 고초를 당했으니 이런 불공정한 세상이 어디에 또 있을까요. 요즘도 정치판은 온전히 비방과 중상모략만 판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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