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인터뷰②] 배우 고영빈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공연 중 고영빈 ⓒ위클리서울 /알앤디웍스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공연 중 고영빈 ⓒ위클리서울 /알앤디웍스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1부에서 이어집니다.> 

‘백작’. 고영빈의 팬들이 그를 호칭하는 단어다. 뮤지컬 ‘마마 돈 크라이’에서 ‘드라큘라 백작’ 역을 맡고 붙은 이 별명은 그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야누스적 매력을 부각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많은 좋은 작품들을 했어요. 그중 창작 뮤지컬 ‘바람의 나라’ 같은 경우는 연출가와의 호흡도 특별히 좋았고 온전하게 제 색깔을 보여줄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그런 작품을 앞으로 또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이 작품으로 굉장히 많은 사랑도 받았어요.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 ‘했던 작품 중 다시 공연해 보고 싶은 작품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제 대답은 ‘전부 다’예요. 작품 하면서 부족했던 것들이 너무나 많이 괴로울 정도로 떠오르고. 애착이 가는 작품일수록 더 그래요.”   

마음만 먹으면 골을 넣었다는 브라질 스트라이커 호나우두조차 잠자리에 들기 전 떠오르는 건 그날 경기에서 놓친 골 찬스들 뿐일 것이다. 연기를 향한 그의 발전적인 결벽이 그를 20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른 적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로 만들었다.
 
“사실 제가 연기 전공자도 아니고, 그냥 필드에 뛰어들어 지금까지 온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 혼자 체득하고 알아서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연기할 때 가장 역점을 두는 건 집중력이에요. 어떤 작품을 공연할 때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머리에 잡생각이 들어오지 않고 쭉 집중해 끝까지 가는 그런 공연을 하자는 생각. 대본을 처음 받아들 때도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집중해서 읽고 났을 때 처음 느껴지는 것들, 직관적으로 생기는 그 느낌을 기억하자. 그런 주의에요, 항상.”

“연기하는 데 있어 어떤 롤 모델이나 영감을 받을 대상 같은 게 딱히 있진 않았어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좀 난감했어요. 정말 없어서. ‘없어도 되나?’ 하는 생각 때문에. 연기도 제 스타일 대로 항상 저 혼자 체득하고 결정해왔고.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있어 레퍼런스를 참고한다거나 비슷한 상황, 인물을 떠올리거나 한 적도 없는 것 같고요. 물론, 어떤 실존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면 그에 대한 연구를 충분히 하겠지만요. 보통 작품을 할 때는 제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들을 베이스로 대사가 주는 느낌들, 소스들을 차곡차곡 담아 인물을 만들어 내는 편이에요.”

‘연기’라는 단어를 말할 때 번뜩거리는 그의 눈빛에서 성장 욕심을 느꼈다. ‘겨우’ 27년 가지고는 아직 모자란 걸까?

“연기라는 것. 저는 그냥 아직 시작도 안 한 거 같아요. 여전히 잘 모르는 거 같고. 관객들, 스태프들이 공연을 보고 저한테 굉장히 좋았다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항상 저한테는 충돌이 좀 있어요. 희한하죠, 참. 굉장히 좋았다는데 제가 의도하지 않았어요. 근데 그렇게 보였대요. ‘아 그래요?’ 하고 ‘그럼 그렇게 해봐야지’ 하면 절대 그거 똑같이 안 나와요. 반대로 제가 정확한 의도를 가지고 연기해서 어떤 반응을 예상해 보면 그것도 달라요. ‘뭐지?’ 내가 연기했을 땐 분명 만족스럽고 자연스러웠는데. 이럴 때 되게 혼란스럽고. 평생이 그래왔던 거 같아요.”

“그간 작품 하면서 달려오기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해내야 한다는데 급급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요즘 들어 더 고민해 보게 됐어요. 좀 더 스스로 ‘연기를 하는 배우입니다' 하고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지금까진 감사하게도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것들을 잘 써먹어 여기까지 왔는데, 연기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그렇다고 이 답을 책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그는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껏 해왔듯 스스로의 결론을 통해 답을 찾았다. 세상 부럽지 않은, 사랑스러운 고양이 두 마리와의 유유자적한 그의 삶에 변화가 일고 있었다.

“좀 갇혀있던 저의 삶을 탈피하고 싶어졌어요. 좀 나가서 듣고 싶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뭔가 에너지를 받고. 그럼 내 연기도 더 유연하게, 지금처럼 갇혀있는 연기는 아니지 않을까? 좀 더 쫓기지 않고 편안하게 연기에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더 알아야겠다. 그런 생각의 전환이 왔어요. 그래서 오랜 지인들에게도 몇 년 만에 연락해 만나기 시작했고요.”

 

곤 투모로우 캐릭터포스터 고종 고영빈 ⓒ위클리서울 /PAGE1
곤 투모로우 캐릭터포스터 고종 고영빈 ⓒ위클리서울 /PAGE1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배우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어떤 예술가들에겐 나이가 곧 경험과 재료가 돼 스스로의 세계를 깊게 만들기도 한다. 피카소의 전성기는 40대부터 90대까지였고, 주제 사라마구는 76세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반면, 20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린 록 음악의 순교자들도 존재했지만. 

“언제까지나 청년 배역을 할 수는 없는 거고 나이에 맞는 역할을 맡아 가는 게 배우로서는 굉장히 복인 거 같아요. ‘이 정도 나이에는 내가 이런 역할을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연기하는 사람들의 시간은 실제보다 십 년은 늦게 간다고들 해요. 그러다 보니 무대에서 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도 할 수 있죠. 곧 공연하는 뮤지컬 ‘곤 투모로우’ 고종 역할에는 3명의 배우가 캐스팅됐는데, 한 명은 이제 서른 살, 한 명은 마흔, 저는 마흔아홉이에요. 이런 걸 보면 재밌기도 하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슬픈 건 사실 별로 없어요. ‘카포네 트릴로지’의 올드맨 같은 배역은 정말 ‘올드맨’이 될 수 있는 40대 중반 이상의 이미지가 나와야 하는 역이었고, 이런 역할을 연기하는 건 꽤 맘에 들어요. 이 나이대의 남자 배역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요. 뮤지컬도 연극도 기본적으로 매력 있는 젊은 남자배우가 전면에 나서 공연을 이끌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중년 이상, 노년의 배우들이 극을 이끌어가는 작품은 대학로에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고요.”

지난 5월 막 내린 연극 '해롤드와 모드(19 그리고 80)'는 18년 간 ‘모드’ 역을 맡아온 박정자가 연기하는 마지막 ‘해롤드와 모드’ 무대가 돼 화제였다. 2003년부터 2021년까지 총 7번의 ‘해롤드와 모드’를 열연해 온 그녀는 올해 극 중 ‘모드’와 똑같은 나이인 80세가 됐다. 

“먼저 나이를 먹어간 다른 선배들 보면, 각자의 기로에서 적절한 선택을 해나가고 계시더라고요. 공연에서 보기 힘들어진 선배도 계시지만 어느새 방송이나 드라마에 얼굴을 많이 비추시는 분들도 계시고. 혹은 영화계로 가셨거나. 이순재 선생님께서는 연세에 맞는 배역을 맡고 계셔요. 선생님께서 지금 연세에도 에너제틱 하게 공연 많이 하시는 걸 보면, 아예 나이가 더 들어버려서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배우 나이 45세부터 50세가 과도기라고들 하더라고요. 불과 40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냥 지금처럼 뮤지컬 하고 주인공 하면서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꿈이었고. 그 밖에도 좋은 기회들이 있어 영화나 드라마를 해도 좋지만, 여전히 제 욕심으로는 할 수 있을 때까지 무대에서 주, 조연 남자배우로 오래 서고 싶은 마음이 커요. 여전히 그 꿈을 놓지 않고 있고, 저에게만 맞는 역할이 있겠죠. 분명히”
  
고영빈은 조곤조곤하지만 품격 있고 확신 있는 목소리로 ‘도전’을 말했다.

“도전해 보고 싶어졌어요. 어떤 사람들은 저한테 작품이 죄다 사랑으로 끝난다고 하고. 그러면서 악역이 잘 어울린다고 하고. 제 자신이 저도 누구보다 궁금해요. 그동안 멀리했던 과격한 연기도, 캐릭터가 강한 인물들도 연기해 보고 싶어요. 그게 악역이 됐든 어떤 질환이 있는 캐릭터든. 제 생각대로 무난한 배역이 어울리는 사람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거죠.”
 

 

ⓒ위클리서울 /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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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영빈은 다음 달 4일부터 홍익대학교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하는 창작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개막을 앞두고 있다. 뮤지컬 ‘세종, 1446’ 태종 역, KBS 드라마 ‘장영실’에서 세조 역을 열연한 그가 이번 작품에서 보여줄 고종은 어떤 왕의 모습일까? 

“왕 배역은 태종, 세조 역을 했었죠. ‘바람의 나라’ 배역도 왕이었고. 이번 ‘곤 투모로우’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창작한 작품이고 실제보다 극화시킨 부분들 많아요. 여기서 연기할 고종은 역사 속 그 인물보다 훨씬 입체적인 인물이 될 거예요. 왕의 자태나 아우라를 연기한다기보다는 전에 없던 왕의 모습이 될 것 같아 연구를 많이 하고 있어요. 왕이면서 결정권도 별로 없이 눌려있고, 유약한 면도 있고 그전에 해봤던 왕들과는 많이 다를 거예요. 어렵지만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인터뷰가 끝나고 필동으로 향하는 그의 차 안에서 그는 요즘 작품과 별개로 노래 레슨을 받고 있다고 했다. 노래로 시작해 노래로 하루가 끝날 것 같은 뮤지컬 배우가 어떤 갈증이 또 있을까?

“배우로 살면서 한 번도 이 길을 벗어난 적 없거든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 목소리로 내보고 싶은 생각을 작년부터 하게 됐어요. 기능적인 노래가 아니라 온전한 내 목소리를 내보면 좀 더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제일 궁금한 건 저에요. 제 안의 얘기를 들어보고, 저라는 사람을 솔직하게 투영하고 싶어요. 그런 노래를 하고 싶어요.“

고영빈의 목소리가 그의 지중해 빛 자동차 색만큼 투명하고 깊게 들렸다. 이 27년 차 배우의 바다에 파도가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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