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성장이 멈춘 애호박
성장이 멈춘 애호박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깊은 밤에 일어난 바람 소리가 내 마음을 흔들었던가 보다. 아니 어쩌면 마당을 굴러다니는 낙엽 소리가 내 가슴에 애련한 시를 들이밀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 하고 벌떡, 일어나서 바지를 꿰입으려고 하는데 빗방울이 듣는다.

아닌가? 우박인가?

우박이라면 큰일이다.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보니 우박은 아니다. 빗방울이 우박처럼 거칠게 뺨을 때린다. 다행이다. 만약에 우박이었다면 우리 집 마당의 농사는 정말로 끝장이다. 연한 애호박에 구멍이 숭숭 뚫릴 텐데 그 모양은 상상만으로도 참혹하다.

애호박, 이 녀석은 이름도 상큼하려니와, 보기에도 새파랗게 동글동글한 것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뭐 애호박을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니다. 애호박을 얄팍하게 저미듯이 썰어서 말렸다가 눈 내리는 겨울 한철 들깨가루로 탕을 끓이면 그 맛의 훌륭함이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아마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작년 가을 우리 집 마당의 호박 농사는 풍년이 들었더랬다. 호박을 많이 심은 것도 아니련만 앵두나무에 앵두처럼 많이도 열렸다. 그 바람에 나는 아주 신명이 났었다. 12월 초까지도 애호박은 열심히 열렸고, 나는 그것들을 따다가 얇게 썰어서 말리는 일로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도통 알지를 못했다.

 

익다가 멈춘 어른호박
익다가 멈춘 어른호박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올 가을은 이변이 들었다. 산과 들에 나무들은 아직 단풍 들 때가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파랗건만 날이 엄청 차가웠다. 장갑을 끼었어도 손가락이 곱아들고, 귀가 시려서 모자를 깊이 눌러 써야만 했다. 단풍은 아직도 멀었는데 이게 뭔 일이냐고, 입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없이 투덜거렸다.

갑자기 곤두박질 친 온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물도 들지 않은 단풍잎이 파란 채로 떨어져서 땅 위를 굴러다니며 빨갛게 혹은 노랗게 물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우리 집 마당의 호박은 성장이 중단되었다. 황금빛으로 멋지게 익어가던 어른 호박은 때깔부터가 벌써 병 든 닭처럼 시들거렸고, 애호박은 꽃을 피우려고 꽃봉오리를 멋들어지게 키우다가 우뚝, 멈춘 채로 오그라들어갔다.

10월에 얼음이 얼어붙는 것인가 했는데 다행히 거기까지는 아니었다. 어느 하루 갑자기 해가 쨍쨍하게 나오고, 온도는 쑥쑥 올라갔다. 하지만 애호박은 높아지는 온도를 따라가지 않았다. 언제 또 추위가 몰아칠지 모르는데 내가 왜 쓸데없는 일로 에너지를 소비하겠느냐는 듯이, 애호박은 성장을 멈춘 채로, 새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그냥 있어 버렸다.

뭔가 색다르게 낯선 것이 오려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인가?

단풍도 들지 않은 채로 떨어져서 뒹굴다가 단풍이 되어가는 각종 나뭇잎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애달팠다. 집 나간 누이라도 생각하듯이 애달픈 마음으로 마당에서 서성거리기를 며칠이나 했다. 그러다가 잊기로 했다. 잊기로 하자면 음악이 있어야 했다. 신쾌동 류의 거문고 산조를 골랐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방안에서 서성거리를 얼마나 하다가, 서가를 힐끗힐끗 살피다가 책 한 권을 빼 들었다. 월북 작가 박태원의 산문집이었다. 제목은 ‘구보가 아즉 박태원이었을 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한때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박태원의 산문집을 내가 왜 빼 들었는가는 나도 모른다. 제목만으로도 뭔가 산뜻한 내용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은 예감 때문이었으리라.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산뜻하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줄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와중의 어느 순간 그것이 튀어나왔다.

‘앞에 가는 저 여자 앞니가 빠졌네.’

이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아마 머-엉해져 버렸을 것이다. 월북 작가 박태원이 이런 문장도 썼어? 앞에 가는 여자의 앞니가 빠졌다는 걸 저 남자는 어떻게 알았지? 하는 의문은 나중에 생겼고, 그때 그 순간에는 그냥 머-엉했을 뿐이었다.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서 눈이나 깜빡거리고 있다가 웃어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키득키득, 차츰 히히히, 그러다가 박장대소, 이런 웃음을 웃어본 지도 그러고 보니 차암 오래되었다.

 

박태원 산문집
박태원 산문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박태원의 산문집을 끄집어낸 것 자체가 사실은 오랜만이었다. 아니다. 오랜만이라기보다 어쩌면 처음이라고 해야 옳은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기의 작가들이 쓴 문장은 내게 낯설고, 뜻을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옛말 사전을 뒤적거리는 등 한참씩 헤매야 했다. 국문학으로 일가를 이루자는 게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어렵게 책을 읽을 필요가 뭐냐 하는 일종의 궁시렁 같은 불만이 내게 분명히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책을 샀다. 사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서 산 것은 아니었다. 80년대라고 하는 엄혹한 시기에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발굴해서 출판해 온 출판사 대표와의 인연이 낳은 감상적인 선택일 뿐이었다.

그 인연이 벌써 이십여 년 전이었다. 수도권에서 고창으로, 고창에서 다시 좀 더 깊은 해리면 거북바위가 한눈에 보이는 산자락 아래로 이사하기 전의 어느 날 시인 칭호를 달고 있는 후배의 강권으로 선운사를 갔더랬다. 그날이 그 해의 마지막 날로, 이를테면 망년회라는 것을 선운산 골짜기 농막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농막의 주인은 도솔암 입구에서 파전도 팔고 막걸리도 팔고 커피도 팔고 하여튼 온갖 것들을 파는 휴게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애당초 소설가를 지망했으나 소질 없음을 발견하고 선운산 일대가 아직 공원으로 지정되기 훨씬 전에 들어와서 살림을 차린, 비유를 하자면 선운산 시대를 개척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가 선운산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기까지의 과정이 한 편의 잘 만든 소설 같았다. 그의 어머니가 지인에게 얼마인가 돈을 빌려주었는데 지인의 사업이 완전 망해 버려서 돈을 받을 수가 없게 됐더란다. 그런데 채무자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채무자는 자기도 미처 몰랐던, 부모의 사망으로 자동 상속된 쓸모없는 땅이 선운산에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그 땅을 채권자에게 양도했다. 그 즈음 채권자의 아들이 서울은 시끄러워서 싫다고, 어디 절간 같은 데로나 들어가고 싶다 해서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전화도 없고 전기도 없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문명이란 눈을 씻고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산골짜기에서 청년은 복숭아나무를 심었다. 복숭아 농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안 뒤에는 자두나무를 심었고, 자두 농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안 뒤에는 수박농사를 했고, 수박농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안 뒤에는 고추며 가지며 오이 같은 것들을 심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농대 출신의 활달한 여인을 만나 가족을 구성했고, 아이를 낳았고, 농사만을 전문으로 해서는 먹고살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때마침 고창의 풍천장어와 복분자 술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선운산을 찾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제법 잦았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많은 곳에 그는 움막 하나를 짓고 더덕구이니 파전 같은 메뉴를 걸어놓고 동동주를 팔기 시작했다. 손님은 아직 별로 없었지만 하나씩 둘씩 단골이 생겼다.

 

떨어져서 물드는 은행잎
떨어져서 물드는 은행잎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봄에는 서해바다에서 발원하는 안개가 신비롭다는 이유로 찾아온다는 단골이 생겼고, 여름에는 뿌리가 흙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오래 살아온 나무들의 활처럼 휘어진 몸통들이 마치 미술 전시회라도 여는 것 같아서 찾아온다는 단골이 생겼고, 가을에는 고목이 뿜어내는 노랑 빨강 색깔의 이파리가 숭고해 보여서 찾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겨울에는 오래된 나무들 위로 수북수북 쌓인 눈이 풀썩풀썩 떨어질 때의 그 소리가 너무 가슴 뭉클해서 찾지 않을 수 없다는 단골도 생겼다. 그런가 하면 오직 하나 주인 남자와 더불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잡담이나 하는 것을 목적으로 찾아오는 단골도 있었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 저마다의 취향에 따른 이유로 단골이 된 사람들이 언제 어떤 이유로 정다운 친구 관계로 발전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만나면 반가운 사이가 되어갔다. 이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대개 신문이나 잡지, 출판사 등 글쓰기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고, 화가와 가수 그리고 목공예 전문가도 두셋 섞여 있었다. 그 중에 누군가 망년회를 제안했고, 일단 시작된 망년회는 해를 거듭하며 이어져 갔다.

시인 칭호를 달고 있는 후배의 권유로 내가 그 망년회에 객원 자격으로 끼었던 그날 그이가 있었다.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서지학을 전공했고, 문고본 전문 업체로 널리 알려진 출판사를 다니다가 스스로 출판사를 세웠다는 사람. 그이가 바로 월북 작가들의 작품만을 전문으로 출판해 온 출판사 사장이었다.

월북 작가, 그 명칭도 서글픈, 그리고 소름이 오싹 돋는 단어 월북 작가.

왜 서글픈가. 왜 소름이 돋는가.

북한으로 간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행위 자체가 보안법 위반이었다. 그런 작품을 판매하거나 출판하는 행위의 죄는 당연히 엄중했다. 읽든 판매하든 정보망에 걸리면 그대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고 최악의 경우 고정간첩으로 몰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 수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그런 깡패 같은 법을 만들었고, 강력하게 시행해 왔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것을 싹 풀어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살인마 전두환이 금서를 왜 풀었지? 사람들은 그 당시 전두환의 결정을 일종의 유화책으로 파악했었다. 나는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다 하는 선전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연못에 떨어져서 익어가는 단풍잎
연못에 떨어져서 익어가는 단풍잎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쨌든 초기에는 단 하나의 출판사에서만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출판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단 하나의 출판사 관계자를 내가 그날 밤 망년회 자리에서 만난 것이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그이는 일과 관련해서는 입도 뻥긋 못 하게 해서 나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볼 만한 시간을 낼 수도 없었다.

그 뒤로 몇 년인가 흐른 뒤의 어느 날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 전두환의 심복 가운데 허씨 성을 가진 세 남자가 있었다. 이 세 남자의 권력은 전국방방곡곡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여기까지는 80년대를 거쳐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허씨 성을 가진 세 사람 중에 한 명이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나는 그 사실을 우연히, 아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단순했다. 월북 작가들의 작품을 전문으로 출판해 온 그 출판사의 그 배경이 너무 궁금해서 이것저것 서지학적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내 눈에 그것이 보였다. 허씨의 자서전을 다름 아닌 그 출판사에서 편집 출판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리하자면 이런 스토리가 나온다. 전두환의 심복 가운데 한 사람과 출판사 대표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었다는 것. 그 인연을 매개로 해서 월북 작가 해금이 이루어졌고, 단 하나의 출판사에서만 그 책을 만들어서 판매하도록 했다는 것.

한 나라의 정책이 개인적인 인연으로 뚝딱, 결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똑바로 알기는 했지만, 민주정의당을 만드는 등 그렇게도 거친 목소리로 정의를 앞세웠던 전두환의 민낯 하나를 새롭게 알았다는 데서 오는 기분은 거칠게 말해서 더럽기 짝이없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그 자식 가운데 한 명이 출판사를 운영하며 수많은 소문을 낳고 있다. 소문 중에 으뜸은 아마 판매량 부풀리기일 것이다. 서점에서 열 권이 팔리면 백 권, 천 권을 팔았다는 식으로 세금을 더 많이 내면서까지 아비가 숨겨놓은 불법의 돈을 합법화시켜 나간다는 거다. 하긴 그 아비에게서 그 자식이 무엇을 배웠으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 자식의 자식은 앞으로 무엇이 될까 하는 의문이.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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