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서 혼자
해변에서 혼자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1.12.2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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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고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고아 이미지

내가 본 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넓고 긴 모래 사장에 거대한 한 그루의 야자수. 흔히 보는 휴양지 풍경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늘은 적당히 저물어가고 있었고 흐린 날씨의 긴 해변에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허름한 슬리퍼를 신은 머리가 희고 짧은 노인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모습 뿐. 이상한 사진이었다. 밝고 아름다운 열대 해변인 동시에 어딘가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그 위를 두터운 평화가 덮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사진으로 본‘고아’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이름도 하필이면 고아. 아마도 한국인만이 이 이름에서 쓸쓸한 정서를 건져 낼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름 때문인지, 사진 때문인지 인도에 오기 전부터 고아를 그 사진의 느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직접 방문하기 위해 인터넷으로 더 자세히 찾아본 고아는 내 생각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다. 전세계 히피들의 성지같은 해변이라고도 했다.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오래 사용했던 곳이고 그래서 가톨릭 인구가 유독 많고, 그렇게 넓지 않지만 문화적 차이 때문에 하나의‘주’로 인정 받는 곳이고, 주세가 현격히 적어서 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기 위해 모여들고, 유명한 해변들 마다 유명한 파티가 있고, 파티가 있으니 노래와 춤과 술이 있고, 그들은 흐느적거리고 시끄럽고, 온몸에 문신을 하고, 건물들은 열대의 해변에 어울리게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고, 페이스북 그룹에서는 여행객들이 친구를 구하고 파티를 하는 곳. 술이 있는 곳에 일어날 법한 문제들도 역시 그대로 일어나는 곳 - 오늘 친구가 낯선 사람과 술 먹는다고 사라진 이후에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요. 어떻게 하죠? 인도 경찰이 해결해 줄까요? 같은 말들. 내가 인터넷에서 조금 알아본 고아는 이후에 내가 경험한 고아와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무엇이 찾아본 것이고 무엇이 경험한 것인지 지금 와서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물 빠진 청바지 같았던 바다의 색이 생각보다 너무나 좋았다는 것과, 모래가 굉장히 보슬보슬 했다는 것은 확실한 나의 경험이다. 물론 사진에서 보았던 홀로 선 야자나무와 뜨개질 하는 노인의 모습은 찾지 못했다. 소란스러움을 감싸고 있는 이상한 평화만큼은 남아 있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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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에 오기 전에 나는 고아 출신을 딱 한 명 만났다. 인도의 자이푸르에 머물 때 함께 짜파티와 맥주를 마셨던 엘라는 고아에서 출장 온 회계사였는데, 영어를 모어로 사용하고 가톨릭을 믿는 그녀는 확실히 북인도 지방의 사람들과 달랐다. 무척 똑똑한 사람인 동시에 여유로운, 일 잘하는 깐깐함을 가지고 있지만 어딘가 해변처럼 털털한 느낌. 유럽이 들어오는 통로로 기능하는 동안 고아에 어떤 유럽적인 것과, 남인도스러운 것이 섞여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낸 것일까. 그녀의 옷은 화려한 원색이었지만 눈에 튀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잘 어울리는 원색을 그대로 입은 것 같았고, 고아에서는 정말 그런 원색의 건물들과 교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정말 고아라는 곳에서 나고 자라며 땅의 문화가 그녀에게도 섞여든 걸까. 고아에 있을 때 종종 엘라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자라난 곳의 상황을 몸짓, 발짓으로 풍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게 있다면 좋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디에서 자라났든, 내가 자란 토양의 좋은 부분을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 엘라와 고아의 교회들을 보며 자꾸 생각했다. 내 눈앞에 있는 고아의 이미지들을 바라보며.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해변에 스친

고아에서는 해변에서 가만히 쉬는 것이 가장 좋았다. 시끌벅적한 파티에 잘 어울리는 성격도 못 되고, 굳이 그런 소란 속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 애들은 걸핏하면 대마초를 피워댔다. 게스트하우스의 분위기는 다른 어느 곳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분위기에 잘 적응은 하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친해진 사람이 없어서 그랬나. 동행했던 효진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피쉬 탈리(일종의 인도식 백반)를 먹었다. 그때는 아마 한국의 음력 설 즈음이어서 괜히 티베트 음식점에 가서 만두를 먹기도 했다. 수영은 잘 못해도 바다에 몸을 담구고 개헤엄도 쳐보고, 물도 이리저리 뿌려보고, 전망 좋은 2층 테라스가 있는 음식점에서 밥을 시키고, 그저 누워서 해 지는 것을 오래 바라보기도 하고. 사람들이 흔히 낭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고아에는 많았다. 누가 그곳에 오래 있으라고 하면, 시간을 모르고 오래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곳. 그게 단순히 너무나 즐거운 곳이라서가 아니라, 무언가에 젖어들기 좋은 분위기여서라고 할까. 물론 고아의 밤을 사랑하는 파티피플들에게 고아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진 즐거운 곳이기도 할 것이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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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 고아의 특별한 점은 술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인도에서 맥주는 생각보다 싸지 않다. 한국보다는 저렴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값이 꽤 됐다. 북인도의 경우 술에 조금 더 엄격한 편이라 술 파는 곳을 찾기도 힘들고, 찾아가면 지하실 같은 철창이 나온다. 바쁜 시간대라면 그 철창 사이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팔을 낑낑대며 뻗어 술을 사야 한다. 때로는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몰려 들어 애걸하는 상황같다. 맥주 한 병 먹기에도 꽤 귀찮은 품이 든다. 술집 같은 것은 없기야 하겠냐만은, 편하게 찾아보기는 당연히 힘들다. 남인도의 경우에는 상황이 조금 더 좋아 술을 파는 곳들도 눈에 띄지만 한국만큼은 당연히 아니다. 무엇보다 값이 여전히 비싸다. 그런데 고아는, 마치 전 인도에서 이곳만큼은 허용한다는 듯이 주류 문화가 자유롭다. 거의 맥주 값이 1/4로 줄어든다. 일종의 술 면세 구역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고아 주 바깥으로 고아에서 산 술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불법이라고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만큼 이곳은 술 때문에 사람이 몰리는 곳이기도 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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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음은 좋아하지 않지만 술을 즐기는 편인 나에게 고아는 당연히 좋은 곳이었다. 오랜만에 돈 걱정 안하고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한국의 인도 식당에 가면 가끔 볼 수 있는 인도 맥주‘킹피셔’를 싼 값에 자주 먹었다. 남인도 지역의 유명한 술, 다크럼 종류의‘올드 몽크’도 작은 병에 먹어볼 수 있었다. 왜 많은 젊은 애들이 몰려 오는지, 왜 다른 지방 출신의 인도 출신 애들이 그렇게 고아에 가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내가 뱅갈루루에서 만났던 마노즈는 곧 파티를 즐기러 고아에 오기도 했다. 여기도 여유 있는 애들이 좋은 곳 찾아 놀러다니는 것은 똑같다. 어쩌면 나도.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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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로 해변 파라솔에 누워 맥주를 마셨다. 한 두 병 시켜 놓고 누워서 책을 읽거나 그냥 누워 있었다. 맥주와 해변으로 전부인 일상이라니, 생각하면서. 그때 내게 말을 걸어 왔던 사람은 그 파라솔 깔린 식당 직원 스친이었다. 스친은 무언가 허술하고 어색하게 행동했는데, 이상한 순수함이 묻어 있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했던 그는 내게 번역기와 간단한 문장으로 이것저것을 물어 보았다. 그는 알고 보니 인도의 북단에 가까운 라다크 쪽에서 이쪽으로 잠깐 일하러 내려온 애였다. 바다가 없는 산지에서만 살던 그는 바다에 너무 너무 와보고 싶었다고 했고, 결국 일하러 왔다. 일한지 한 달 쯤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래도 여전히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모레 사장을 괜히 기웃기웃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해변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매일 눈 덮힌 산을 바라보다가 직접 바다를 보게 된 마음은 어떤 걸까. 마침 그 바다는 내가 봐도 충분히 아름다운 바다였다. 그의 이름은 스친. 라다크에서 온 바다를 좋아하는 남자. 나는 맥주를 마시고 그는 내 옆에 앉아 별다른 말 없이 앞을 바라 보았다. 해변의 스친. 해변에 스치는 그날의 바람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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