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하고,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 그게 음악이고 예술이지 않을까요?“
“행복하게 하고,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 그게 음악이고 예술이지 않을까요?“
  • 우정호 기자
  • 승인 2022.01.19 17: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클리인터뷰②] 비올리스트 김남중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1부에 이어>

세계적 대가들에게서 사사한 김남중이 유학을 마쳤을 즈음, 서울은 또 다른 세계적 대가인 지휘자 정명훈이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영입된다는 소식에 들떴다. 2005년, 정명훈의 서울시향 행이 결정됐고 김남중 역시 합류했다.

“(세종문화회관 측 창을 가리키며)서울시향이 바로 저기 있어요. 사실 그 당시만 해도 해외에서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정명훈 선생님께서 오시면서 서울시향이 확 뜨게 돼 들어가게 됐어요. 커리어를 만들겠다는 생각보단 제가 배워가는 연장선상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오케스트라의 환경도 너무 재밌더라구요. 솔로로 활동하면 내가 오롯이 혼자서 뭐든 만들어 나가야 되는데, 여긴 정말 훌륭한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많이 있어서 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얻어 연주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전에 읽어보지 못한 또 다른 고전을 읽는 느낌이랄까. 같은 베토벤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을 수 있는 거구나.” 

 

ⓒ위클리서울/ 김남중 @jeremyvisuals 제공
ⓒ위클리서울/ 김남중 @jeremyvisuals 제공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서울시향에서 9년을 활약하면서도 김남중은 솔로 연주가로의 전향을 구상했다. 대부분의 비올리스트들이 오케스트라 단원을 목표로 삼는데, 오케스트라 집단 안에서의 안정감과 안전한 커리어를 포기해가면서도 그녀가 독립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의 인식은 솔로 연주가들이 돋보이기 때문에 그게 연주가로서 더 대단하다거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그렇지만은 않아요. 연주가들도 각각의 지향점이 다르고. 오케스트라에 있으면서 연주를 위한 환경이 모두 훌륭했지만 언젠가 솔로로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죠. 저는 비올리스트 중에서도 솔로에 가까운 쪽이거든요. 연주에도 솔로가 더 많고 선생님들께 트레이닝도 그렇게 받아왔고.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있던 어느 날 문득 스스로 테크닉은 있는데 아이디어가 별로 없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항상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연주하고 있으니까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오케스트라와 별개로 솔로 연주를 할 일이 있어 준비해 갔어요. 피아노와 함께 하는 공연이었는데 피아니스트가 ‘어쩜 그렇게 자기 등에 딱 업혀서 그렇게 잘 올 수가 있냐’고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원래 피아노와 비올라 둘 다 솔로에 가깝게 연주해 둘이 발을 맞추다가도 누가 먼저 길을 내주기도 하고 앞서기도 해야 하는데 내가 너무 편안하게 탁 얹어 가고 있던 거예요. 오케스트라라는 게 그렇거든요. 몇 십 명이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하니 서로 소리의 양보가 필요하고.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너무 양보해버렸구나. 내 색깔이 줄어들고 있었구나’하고.“

솔로 비올리스트로 전향

그녀는 연주에 색을 입힐 크레파스 색 종류를 늘리는 쪽을 택했다. 이왕이면 정교한 색감까지 표현할 수 있을 300색 파스텔 세트로.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점을 넘어가면 용기를 못 낼 수도 있겠다. 사실 솔로 활동을 하는 비올리스트들이 별로 없거든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게 대부분 연주가들에게 최고의 목표이기도 하고. 많은 분들이 비올라 연주가들이 수동적일 거라고 생각하시곤 해요. 그런 이미지에 비해서는 제가 도전의식이 강한 거 같아요. 겁이 없나? ‘계속 해보면 되는 거지. 아니면 아닌 거고’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보고 싶었어요.“

2014년, 그녀가 솔로로 전향하자 기다린 듯이 뉴욕 카네기 홀과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의 콜이 이어졌다.

”카네기 홀에서는 사실 대학생 때도 공연한 적이 있어요. 카네기 메인 홀인 ‘아이작 스턴 오라토리움’의 주인공이자 당시 세계 최고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소개되던 대가 아이작 스턴께서 제가 대학 4학년 때 초청해 주신 거예요. 전 실내악 팀으로 갔는데 동양 애들이 우리 몇 명 밖에 없더라구요. 아이작 스턴께서 저를 픽업해 주셨지만 얼마 안 가 돌아가셨어요. 저를 되게 예뻐해 주셨고, 카네기에서 거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좋은 추억이 많아요.“ 

”큰 공연장들에서 공연한 경험들이 많지만 제일 감동적이었던 곳은 베를린 필이었어요. 유서 깊은 공연장이기도 하고 당시만 해도 세계 최고 비올리스트 몇 명을 제외하곤 비올라 독주회를 거의 연 적이 없는 공연장이었어요, 미국에서만 공부했던 제가 서양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온전히 그들을 마주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죠. 제 딴엔 무모하게 브람스와 헨데미트 같은 독일 작곡가들의 헤비한 곡들로 정면 돌파해 보기로 했어요. 근데 기적이 일어났어요. 너무 신기하게 그 공연장에 사람이 꽉 찬 데다, 공연 평들이 굉장히 좋았어요. 너무나 감사하고 감동적이고.“

김남중은 2018년 러시아 글린카 콘서트 홀에서 독주회를 개최하고 비올리스트로는 최초로 미국 뉴욕 유엔본부 총회의장에서 독주 연주를 가져 순식간에 센세이셔널한 비올리스트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BTS도 아직 못 서본 공연장에 내가 선 거야”라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했다.

“연주가들 중에도 연주가 맞는 사람이 있고, 티칭이 맞는 사람이 따로 있거든요. 저는 욕심이 많아서 연주도 티칭도 전부 좋아해요. 제가 배웠던 모든 선생님이 연주가이자 선생님 자질이 뛰어나신 분들이었어요. 실제로 연주를 열심히 하면서 가르치시는 분들에게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정말 많이 배울 수 있거든요. 저 역시 그걸 제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많이 이끄는 편이에요. 레슨 위주의 가르침보단 실전 위주의 팁도 많이 던져주고. 그리고 이미 우리나라 클래식계가 정말 잘해요. 비올리스트들은 정말 해외에서도 인정 많이 받고 있고. 내 제자들도 국제 콩쿠르에서 1등 많이 하고 있고요. 그 나이대의 저보다 더 잘하는 거 같아요. 애들이 잘 됐으면 좋겠고. 진심으로.” 

 

ⓒ위클리서울/ 김남중 @jeremyvisuals 제공
ⓒ위클리서울/ 김남중 @jeremyvisuals 제공

클래식 연주가의 성취

더 큰 무대에서 더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것, 유명해지는 것은 모든 뮤지션의 목표가 아닐까?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고도 “유명해지는 게 싫다”며 자살을 택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을 제외하고. 그럼에도 음악가들 제각각 성취목표의 차이가 있다고 가정할 때, 클래식 연주가로서의 성취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작곡가 곡을 의도에 가장 가깝게 연주하는 데서? 아니면 곡을 자신의 방법대로 해석해 내는 데서? 

“연주가들도 각각 다를 수 있지만, 저는 먼저 작곡가의 의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 다음 곡을 연주로 풀어냈을 때 ‘이 곡은 완전 네 곡 같아’라는 말을 듣는 게 가장 좋죠. 처음에 연주할 곡이 주어지면 작곡가를 좋아하는 사람 생각하듯이, ‘이 사람이 뭘 좋아하지?’, ‘어떤 상황이지?’ ‘얘 왜 이랬어?’하면서 공감 점을 찾아요. 곡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인 것처럼.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공감됐을 때 가장 행복한 거잖아요. 그걸 찾으려고 해요. 그렇게 공감 점을 찾아내면서도 이 음에서 왜 이 음으로 넘어갔지? 이 부분엔 악보에 줄 하나 살짝 그었네? 왜 그었지? 뒤 쪽에는 안 그었고 여긴 그었네? 왜 그었지? 하면서 작곡가와 이 곡과 끊임없이 대화를 해요. 이 곡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그를 이해하게 됐을 때 내 색깔도 입힐 수 있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요. 

”악보를 보면 별말이 안 쓰여 있어요. 말이 없어요, 말이. 작곡가도 사실 막 여긴 ‘꽃물이 터지듯이’, ‘빗방울이 흐트러지듯이’ ‘살짝 뿌리지 말고 세게 뿌리듯이’하면서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요? 겨우 말할 수 있는 게 ‘테누토’라고 줄 위에 쓱 한 번 긋고, 크레셴도 하나 넣고, 점 하나 더 넣고. 그런 마음을 읽어야 하는 거죠. 악보엔 여백이 훨씬 많아요. 그걸 채워줘야 하는 게 연주가예요.” 

작곡가와 연주가의 역할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창의력을 연료로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만들어진 곡을 연주하는 클래식 연주가들에겐 창작에 대한 욕망도 있을까?

”완전 있죠. 3월에 있을 제 독주회에선 우리나라의 산조를 비올라로 어레인지 해서 공연하게 됐어요. 사실 산조를 하고 싶은 마음은 고등학교 때부터 있었거든요. 산조를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그걸 만들어 내려면 산조에 인생을 바쳐야 할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여러 창작 욕심이나 무대 아이디어도 많아요. 근데 웃기는 건 트레이닝을 하도 악보에 써 있는 것만 해서 그런지 겁이 나는 경우도 많아요. 연주가들은 그래서 창작 열망을 자기 색깔을 입힌 연주의 표현들로 구현하기도 하죠.“ 

연주가가 한 시간, 두 시간씩 연주를 한다면 웬만한 운동경기 만큼 체력적 에너지가 소모될 것이다. 하지만 연주에 실어야 하는 감정적 소모는 그에 비할 데가 아니지 않을까?

“26분, 30분짜리 곡을 연주하려면 그 시간만큼의 감정 컨트롤도 동반돼야 한다는 얘기죠. 물론 감정 컨트롤 이전에 그걸 제대로 실으려면 테크닉이 확실히 돼 있어야 해요. 비올라만 해도 짚는 곳 1mm 차이로 음정이 달라지거든요. 그 스트레스 역시 어마어마하고. 그러면서도 곡의 흐름에 따라 감정을 전부 실어야 하면서도 연주 자체는 이성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 에너지 소모가 정말 크죠. 너무 항상 크게 감정 소모가 돼서 그런가, 티브이를 보거나 사람들이 열광하는 어떤 노래들을 들었을 때, 감동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왜 감정이 느껴지지 않지? 내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도 해보고. 물론 그걸 표현하는 사람들도 감정이야 있겠죠. 그걸 어떻게 그 표현에 스며들게 노력을 했느냐가 다르겠지만.” 

클래식 연주가는 압박감을 어떤 방식으로 대처해낼까? 극도의 감정적 소모를 공연 마다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면 수명이 줄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압박감. 진짜 미친 듯이 있죠. 사실 어제도 새벽까지 잠을 못 잔 게, 지금 앞둔 연주회에서 곡을 어떻게 연주할까. 멘델스존 첼로 소나타를 비올라로는 초연인 이 곡을 첼로처럼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3월 독주회에선 지영희의 해금 산조를 비올라로 연주하는데, 해금처럼 해야 하나 비올라처럼 해야 하나. 보통 클래식 연주가들이 독주회를 1년에 한 번 정도 하거든요. 저는 해외 공연 포함 5, 6번 하는데도 매번 독주회 앞두고 ‘이거 취소하면 안 되나’할 정도로 혼자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압박감에 대처하는 방법이요? 그런 걸 해소할 수 있을까요. 연주가 다가오면 제가 너무나 달라져서 사람을 잘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해요. 이 압박감들이 해결이 안 되면 밤새 고통스럽고. 그러다가는 결국, 내가 뚫고 나가야 하는 난관이다. 이 스트레스들을 내 평생 희열로 바꾸자. 이렇게 느끼고 있는 그 자체로 감사하다. 이런 생각으로 넘어가게 돼요. 안 그러면 그 스트레스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어.“

창가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비췄을 때, 조금 눈가가 촉촉해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고통에서 가끔씩 눈 떠보면, 이 새벽에 내가 이 꽉 막힌 연습실에서 뭐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이 강하고 어떤 곡이 주어지면 하기 싫어도 좋아하려고 노력했어요. 작곡가의 좋은 점을 발견하려고 하고, 내가 이 작곡가의 이 곡을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그러다가도 정말 화나면 혼자서 입에 힘 딱 주고 얘기해요. ‘감사합니다...’하고. 정말 감사하지. 음악도 기승전결이 있어야 재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고통도 즐거움도 없는 곳이 있다면 그게 천국이겠어요? 지옥이지. ‘이게 천국이구나’ 생각하려고 해요.“

김남중은 ‘남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그녀의 단어로 뽑았다.

”남을 행복하게 하고 나를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것. 그게 음악이고 예술이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 연주를 해왔고, 그런 연주를 하고 싶고. 인생 자체를 그렇게 살고 싶어요. 시국이 이래서 연주가 많이 없어졌는데 작은 공연장에서 연주할 기회도 저에겐 큰 활력이 되더라구요. 관객을 즐겁게 할 기회가 또 주어진 거잖아요. 사람들이 비올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으면 좋겠고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고 싶어요. 같이 행복할 수 있게요.“ 

인터뷰를 마치고, ”3월 독주회 프로그램은 정해졌는데 이름을 정해야 하잖아요. 좋은 아이디어 없을까요?”하고 김남중이 말했다. 그녀는 이미 관객들에게 ‘이타(利他)’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 용암 같은 몰아침과 빈틈없는 어둠 같은 비올라 소리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