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문학동네, 2021

ⓒ위클리서울/ 정다은 기자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내가 제주에서 머물던 그해 여름의 한 달 동안, 나는 종종 광치기 해변을 걸었다. 아침에도 갔고 밤에도 갔다. 해 질 무렵에는 하늘이 때로 보라색으로 물들기도 했고, 사람들이 꽃밭을 따라 일렬로 걸었으며, 정돈되지 않은 듯 언덕 아래 바위가 듬성듬성한 부분에는 얕은 물가와 해초들이 있었다. 잘 알려진 곳이었지만 사람이 유별나게 많지는 않았다. 아름답게 펼쳐진 해변의 끝에는 성벽처럼 솟은 성산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나는 늘 일정량의 적요함을 느꼈다. 사람들이 꽃과 물을 보러 나타나는 낮에는 살짝 숨어 있다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무서운 마음 같은 것들이 그 해변에 있다고, 나는 그곳을 혼자 걸으며 이따금씩 생각했다.

아마도 지인의 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제주에 오기 전 지인은 어느 문맥에서인지 광치기 해변 이야기를 꺼냈다. 제주에는 특이한 이름들이 많다. 슬픈 유래를 가진 이름도 많다. 슬픈 사건에는 늘 슬픈 이름이 따라 붙는 법이다. 광치기 해변은 정확하지 않은 하나의 설에 의해서지만, 학살된 사람들을 묻고 장사 지낸 관이 있었다는 곳이다. 그러니까 관, 치기 해변. 바다를 향해 이어진 해변에서 그 관들이 일렬로 놓여 있다. 파도는 연거푸 관을 친다. 치고 다시 친다. 무슨 말소리처럼. 지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광치기 해변에 대한 나의 느낌은 그때 이후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면 꼭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직접 그곳을 걸으며 느꼈던 적요함이 오래 된 죽음들이 남긴 흔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요함을 만들어낸 것은 나의 마음이다. 그곳에 빈 해변을 나는 나의 마음으로 채웠다. 그러나 내가 더 많이 느꼈던 것은 어떤 위화감이었다. 그런 일들이 있었던,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사람들이 무너져 내렸던 해변이 이토록 깨끗하다는 것. 어떤 일의 흔적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 이곳의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고 또한 그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 그 일들은 그렇게 잊히는 것일까? 사람의 죽음은 내 앞의 모래들이 파도에 쓸려 사라지는 것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절박한 마음으로 묻지는 않았다. 다만 그 흔적 없음이 새삼스럽게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을 뿐이다. 사람의 얼굴을 다 지워버리는 이 무서운 바다가.

어쩌면 그래서 내가 한강의 이 소설을 선뜻 집어 들었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전작들을 따라 읽어 온 다른 여느 독자들처럼, 나는 한강이 인간의 고통에 대해, 정확히는 그 고통을 둘러싼 모든 것을 써왔다고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느꼈던 한강은, 인간에게 결코 부서지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서 인간이 산산조각 난 자리를 끝없이 되새기는 사람 같았다. 다 부서진 조각을 들고, 이렇게 부서졌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내야 할 중요하고 연약한 것이 있었다는 뜻이라고 희미하게 말해주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사람 부서진 자리에는 언제나 인간에게 휘둘러진 복합적인 폭력의 맥이 선연히 남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소설에서 내가 직접 가보았으나 내가 찾을 수 없었던 광치기 해변의 일들을 직접 목격하고 싶었던 셈이다. 이 소설이 그 날들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과거의 사건을 재현해 다시 보여주는 것, 그렇게 함으로서 잊힌 것들을 다시 기억되게 하는 것은 소설의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소설이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다. 소설은 사건 자체를 보여줄 수도 있고, 사건에 대한 ‘말’을 들려줄 수도 있다. 있었던 사건들을 눈앞에 그려낼 수도 있고, 사건을 찾아가는 우리의 상황을 보여줄 수도 있다. 이때 이 사건이 인간의 고통이라면, 인간의 죽음이라면, 역사의 비극이라면, 대량 학살이라면, 그렇게 잊히는 비극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고통에 접근할 수 있는가? 아니, 어떻게 다가가야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가? 어떤 태도로 인간의 고통을 말하고 읽어야 하는가? 이번 소설에서 내가 읽은 것은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 다가가는 고통이었다.

 

2012년 인터뷰 모습 ⓒ위클리서울/ 최규재 기자, (책=문학동네)

소설에서 4.3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은 거의 없다. 이 소설은 그때 살던 이들의 고통을 다시 복원해 놓은 소설이 아니라, 그때 죽은 이들이 남긴 흔적을 다시 되새겨 가는 지금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되새기는 감응 자체의 과정이 바로 이 소설의 길이다. 한강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도시의 학살에 대해 쓴 이후로 모종의 병을 앓던 소설가 경하는 오래 된 친구 인선의 부탁으로 인선이 혼자 사는 제주의 집으로 인선의 앵무새를 살리러 간다. 인선은 목공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렸고, 앵무새는 하루 안에 밥을 먹지 못하면 죽는다. 경하가 찾아간 제주에는 폭설이 내렸고, 앵무새 아마는 죽어 있었다. 경하는 눈밭을 구른다. 모든 것이 눈에 덮였다. 꿈인지 환시인지 모를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는 병실에 있어야 할 인선을 영혼처럼 만난다. 인선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인선도 어머니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들.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 인선의 부모 세대가 겪은 참혹한 사건들이 인선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혼처럼 가벼운 앵무새 아마는 그림자로 날고.

과거의 기억은 그렇게 전달된다. 결코 그때의 고통을 정확하게 다시 재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아는 방식으로. 고통은 그저 누군가의 입을 통해 다시 말해진다. 전해 들었기에 그것을 직접 경험하지는 못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그 해 있었던 참혹에 조금씩 접근한다. 그러나 이런 말의 전달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원래라면 지금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할 인선을, 경하는 어떻게 제주에서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가. 어떻게 눈밭 아래 산 채로 얼어붙어 있었던 기억들을 다시 꺼내 올릴 수 있었나. 이 ‘환상’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했을까.

누구나 갑자기 그 기억을 전해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고통에게 말문을 연다. 경하와 인선은 타인의 고통을 남의 일에 연민을 보태듯 겪지 않았다. 경하가 쫓았던 지방 도시의 학살과 인선이 찾았던 베트남전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 그들은 과거의 고통에 접근하면 할수록 거의 앓는다. 그 고통을 안에 머금은 것처럼. 가슴이 아픈 게 아니라 몸과 정신이 아프다. 고통스럽다. 그러나 고통스럽게도, 그 떨어진 고통의 사건들을 묶어주는 것은 바로 그 고통이다. 여러 곳에서 벌어진 비극의 꼴은 달라도, 언제나 거기에는 폭력으로 훼손되고 찢긴 인간의 얼굴이 남는다. 그 고통을 바로 바라보는 일은 어렵다. 손가락이 잘린 인선이, 손가락을 다시 봉합시키기 위해 잘린 자리를 다시 찢어 피를 돌게 해야 하는 일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바라보고 다시 겪는 고통을 결국 온몸으로 겪어낼 때, 눈밭 아래 생매장된 기억들은 다시 우리에게 언어의 몸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눈을 헤치며 나아갈 때 그 안에는 아직 녹지 않은 것들이, 미처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것. 그 안에 썩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얼굴과 엮인 기억들이 얼어붙어 있다는 것. 그들이 차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산 사람은 체온으로 삶을 버티며 차가운 소리를 담아 쓴다. 죽은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하나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는 작별이라는 단어를 매만지며 이렇게 바꿔 써야할지도 모른다. 작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작별할 수 없습니다. 아니 작별하지 않습니다. 이제 작별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말하는 고통을 끝내 감내하고 무화되는 고통에 끝없이 저항하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다.

이 소슬하게 아름답고 서럽게 차가운 눈이 다 녹아내리기 전까지. 보이지 않지만 가득히 쌓여있는 기억의 눈밭에서 작고 가벼운 새 한 마리를 발견해내는 것. 그 새의 작은 심장처럼 얕게 뛰고 있는 그 온기가 바로 우리가 건져내야 할 인간의 혼이라고, 한강은 말하고 있다. 내가 광치기 해변을 걸으며 상상했던 관들이, 경하와 인선이 준비했던 해변에 늘어선 나무 등신대로 끝내 서기를, 그렇게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이 차가운 눈이 다 녹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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