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중입니다
과속중입니다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2.02.04 08:5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늦은 시간에 고속도로를 운전한 경우가 몇 번 있다. 아마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연휴를 맞이해 여행을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때였을 것이다. 길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아이들은 여독에 지쳐 뒷좌석에서 뻗은 지 오래 되었다. 해발고도가 높은 고속도로일수록 주변은 더욱 어둡다. 게다가 주행하는 차량이 극히 드문 한밤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전조등과 상향등에 의지한 채 뚫어져라 전방을 주시하며 주행을 하다보면 아무리 달려도 계속 따라 붙는 칠흑 같은 어둠은 귀경길의 유일한 동반자이다. 짧았던 여행의 일정을 다시금 되짚어 보면 흐뭇한 미소도 머금어지고 뭔가 아쉬운 일정은 없었는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에 가벼운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돌아갈 일상이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과의 여행이 때로는 힘들고 여러 가지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그 시절에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은 살짝 흥분되는 삶의 활력소였다.

딱히 말동무도 없고 주변은 차량의 엔진소음만 들리는 공간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불현 듯 느낌이 싸할 때가 있다.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주행 내내 따라붙던 칠흑 같은 어둠이 뒤꽁무니를 빼는 것 같기도 한 묘한 느낌. 그 때 계기판을 확인해 보면 고속도로 규정 속도 보다 더 빠른 속력을 내고 있는 것이다. 백주대낮에 도심에서는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는, 평소 안전을 위해 규정 속도를 준수하는 습관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내어서는 안 될 과속을 무심결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열심히 자동차 액셀을 밟은 덕이다.

그렇다고 해서 브레이크를 급히 밟아서도 안 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속도를 줄이고 안정된 현실의 세계로 복귀하는 데는 약 수 초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을 때 멈출 수 있는 감각과 의지가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게다가 고속도로는 과속을 방지하기 위한 카메라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으니 나처럼 무념무상으로 밟아대기만 하는 운전자들에겐 더없이 고마운 바리케이드다.

인생을 살면서도 무심한 과속에 제동을 걸어 줄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령대별로 체감하는 삶의 속도가 다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각 연령대를 나타내는 숫자가 삶의 속도 즉, 10대는 시속 10km만큼의 인생속도를 살고 있고 20대는 20km만큼, 40대는 40km만큼, 60대는 시속 60km만큼의 속도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젊었을 때는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별로 공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왜 연령대별로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인지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들렸다. 주어진 시간의 길이를 내 형편에 맞게 탄력적으로 늘렸다가 줄였다가 할 수 있는 고무줄도 아니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질서는 무너지고 혼돈의 카오스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반세기를 살아 온 지금에 와서 나의 10대를 회상해보니 맞는 말이고 격하게 공감이 간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기까지의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학교를 다녀오고 숙제를 하고 골목어귀에서 동네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재미나게 했어도 하루해는 참으로 길었다. 신학기는 벌써 시작했지만 여름방학이 오려면 한참이나 멀었고 한 주의 월요일은 진작 지나갔어도 아직 화요일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1년의 시간은 정말 더디게 흘러갔다.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까지 감내해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시속 10km로 움직이는 나의 10대는 정체되어 있었고 고인 물처럼 변화가 없었다.

반면에 40대였던 엄마는 하루가 짧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할 일은 수두룩한데 뭐 한 것도 없이 하루해가 꼴딱 넘어가버려서 정신이 없다고 했다. 오죽하면 하루 세끼 챙겨 먹는 것도 일이라며 끼니마다 울어대는 배꼽시계를 원망했다. 먹고 뒤돌아서면 배고프던 10대의 혈기왕성한 나로서는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나에게는 1년 같은 하루였지만 40대의 엄마는 1분 같은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나의 인생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 것도 40대 전후였다. 회사를 다니며 육아를 병행하던 때와는 달리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서면서 무섭게 과속 페달을 밞은 것 같다. 두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것도 잘 키우는 일이 인생의 목표가 되었고 옆도 뒤도 돌아볼 틈 없이 그야말로 무념무상 두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내기에 바빴던 시기였다. 새롭게 시작한 취미생활을 두 번째 직업으로 삼고 난타 수업과 공연활동을 함께 하며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여념 없는 세월을 보내는 동안 인생의 계기판은 과속의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는 눈 깜짝할 사이 노을을 토하며 넘어가버렸고 삼시 세끼는 규칙적이다 못해 참으로 일관성 있게 꼬박꼬박 찾아들었다. 집안 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데 이를테면 난타 작품의 영상악보를 제작하거나 질 높은 수업 내용을 위한 준비를 하는 등의 업무를 여유 있게 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도대체 지금의 나는 시속이 얼마나 되는 인생속도를 살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 사태가 발발하면서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 해를 마무리한다며 송구영신의 인사를 나누고 다가올 새해의 덕담을 주고받은 때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2월이다. 며칠 전 마트를 갔더니 당면과 부침가루가 할인 상품코너에 진열되어 있었다. 그저 그런가보다 했는데 판매대마다 명절과 관련된 제품들이 앞 다투어 진열된 것을 보고 그제서야 명절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인생의 제동시스템은 고장 난 것이 분명하다. 도무지 속도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우스갯소리라고는 하지만 연령대별 삶의 속도에 비추어보자면 내 인생의 속도는 시속 50km로 가야 정상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체감의 속도는 80km를 넘는 것 같다. 과속을 방지할 카메라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고 과속을 감지하고 제동할 감각과 의지는 있으나 무엇 때문인지 멈추는 방법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하면 무섭게 달려가는 나의 인생속도를 늦출 수 있을까.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의 흐름에 규정된 속도를 정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자 살아가는 환경이나 여건 등이 모두 상이하고 체감의 기준도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웃자고 시작한 삶의 속도는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도 아닐 터이다. 70대인 지인 한 분은 하루하루가 그렇게 더디고 시간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마치 나의 10대처럼 느린 속도를 살고 계신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이 느끼는 인생의 속도가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속도가 과속이든 저속이든 간에 중요한 것은 타인에게 떠밀려가는 과속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정신없이 살아놓고 보니 어느 새 지천명을 넘겨버린 나는 지금 과속중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과속을 하며 살아 낸 나의 세월들은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므로 후회는 없다. 인생의 목표도 분명했고 그 목표만큼이나 내 인생도 소중했으므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들을 지내왔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무심하게 주변을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도 앞만 보느라 아름다운 주변의 경치를 감상할 여유는 없지 않은가. 물론 주행 중에는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되겠지만 일상에서는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주변을 돌아보며 소홀했던 인연들도 챙기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져야겠다. 엄마의 위험천만했던 밤 운전 따위에 관심도 없이 잠에 곯아떨어지기 바빴던 아이들은 어느 새 성장해 설 명절을 보내고 나면 모두 성인이 된다. 이제는 그들이 나를 대신해서 운전대를 잡아줄 것이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과속을 하고 있는 나의 삶에 제동을 걸어줄 지도 모르겠다. 곧 설 명절이 돌아온다. 나이 한 살을 또 먹고 주름살의 깊이는 더욱 패이겠지만 나이만큼의 참 어른다운 삶을 살기위해 오늘도 열심히 달려볼 것이다. 여러분 모두 행복한 명절 되시길!!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guru 2022-02-11 15:38:36
40대로서, 글 한 줄 한 줄 정말 공감가는 내용들이네요. 혹시 인생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시면 저한테도 꼭 알려주시길 희망합니다. 부디.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