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우리의 걸음을 보호한다
기억은 우리의 걸음을 보호한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2.02.15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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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대만, 타이베이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개들의 섬

처음 공항에 내린 이후 타이베이 시내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볍게 다툰 직후였다. 다툼은 날씨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따뜻한 곳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반팔만 챙겨온 어머니는 공항에서 패딩을 껴입은 대만 사람들을 목격한 것이다. 마침 가벼운 비가 내려 사위가 어두웠다. 공항 유리 바깥의 풍경은 가을에도 여름 같다는 우리 상상속의 대만보다 훨씬 어둡고 서늘해보였다. 정 추우면 현지에서 옷을 사 입으면 된다는 생각은 우리 모두 해보지 않았고, 어머니는 며칠간 추위에 떨며 지낼 날들을 미리 겪은 듯 불쾌해했다. 왜 날씨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냐는 어머니의 말에, 나도 똑같이 처음 온 사람인데 어떻게 내가 다 알 수 있냐, 당신도 조금 더 정확히 찾아보면 좋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답했다. 날씨만큼이나 가볍고 어두운 시작이었다. 비에 젖어 도로의 아스팔트가 조금씩 더 검게 물들어 갔고 중국 향신료 냄새가 가볍게 풍기는 조용한 택시 안에서 나는 한자 번호 판의 차들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첫 번째 가족 해외여행이었다. 미묘한 세 가지 단어다. 가족, 해외, 여행. 외따로 떨어진 단어들을 붙이면 우리가 처음 겪는 것이 된다. 우리의 첫 가족 해외여행은 가족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단계를 밟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 가족도 해외를 나가고, 해외에서 돌아오고, 면세점에서 지인들의 선물을 사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적어도 우리 마음의 진폭을 흔들었으리라는 점은 틀림없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여행을 동경하지만 여행을 떠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몸이 약한 어머니에게 여행은 부러 짐을 싸고 떠나는 고역이기도 했지만, 편안한 마사지를 값싼 가격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은 고역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를 좋아하는 나는 여행을 싫어한 적이 없다. 아무튼 세 사람의 여행. 공통의 경험을 하나 더 쌓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대만은 여러 고려 속에서 정해진 여행지였다. 예산과 비행시간과 편의성이라는 세 가지 기준에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꼭 대만에 가봐야지, 해서 시작한 여행이 아니라 딱 적당한 곳이 대만인데 가서 무엇을 하고 봐야하나, 막 생각해야하는 여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중국에 대한 별별 편견에 휩싸여 있어서 대만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그냥 섬에 있는 중국?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을 피해서 숨어든 곳. 카스테라가 엄청 큰 곳. 버블티를 왜인지 많이 먹고 심지어 흑당을 써서 만드는 곳. 학생들이 피아노를 괜히 잘 칠 것 같은 곳. 매미 소리가 더운 곳. 친했던 후배가 영상통화를 걸어온 곳. 비옷을 입은 후배가 연등을 날리는 모습. 지브리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빨간 등불 있는 마을. 그곳을 뒤덮은 사람들의 뒤통수. 매끈하게 생긴 샌드위치. 다녀온 애들이 파인애플 케이크와 크래커를 사오는 곳. 이렇게 적어 놓으니, 대만은 마치 알감자를 팔 것만 같은 거대한 휴게소처럼 느껴진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타이베이 시내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개들의 섬을 보았다. 가는 길에 한강처럼 큰 강이 있었다. 한강보다는 투박하고 거칠었다. 주변은 잘 정비되지 않았고 거대한 풀숲들이 산재했다. 흐린 날에 다리 위에서 본 그 강은 우선 최대한 열심히 흐르기로 다짐한 듯 묵묵했다. 한강만큼 넓지는 않은 강폭에 작은 섬 혹은 늪지대 같은 구역이 보였다. 강을 유심히 바라보는 중에, 그 작은 섬에서 움직이고 있는 개들을 보았다. 들개들이었을까. 꽤 많은 수의 개들이 무리지어 뛰고 있었다. 그곳에 작은 세계를 만들어 놓았다는 듯이 그들은 아무렇게나 뛰고 짖었다. 늪을 뒹굴고 무리 지어 움직이고 누웠다 섰다.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귀 솟은 개가 묵묵히 서있었다. 너무나도 다른 세계가 평안하게 그곳에 있다는 것을, 개들의 섬을 보며 알았고 비 내리는 이 낯선 땅의 풍경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비는 아케이드를 만든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렇게나 들어간 우육면 가게에서 악수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들어간 눈에 보이는 우육면 집이었다. 오랜만에 겪는 (나름의) 장거리 비행에 지친 어머니는 이미 피곤해 있는 상태여서 도착한 오후에 곧바로 쉬고 싶어 했다. 아버지와 나는 대만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것을 보고 싶었고, 쉬더라도 뭐라도 하나 보고 쉬고 싶었다. 근처에 있는 유명한 절이라도 잠깐 들렸다 가기로 했는데 어머니에게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잠깐 들린 절에서 다시 돌아가려다가, 어머니가 걸어서 얼마 안 걸리는 거리를 택시 타자고 말했고, 아버지는 앞으로 계획한 여행과 어머니의 체력을 셈해보며 혼자 막막해졌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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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해져 당황한 듯 피곤한 듯 비어져 나온 몇 가지의 말들이 다툼으로 이어졌고 도착하자마자 했던 불편한 싸움을 이어갔다. 이왕 온 김에 가장 유명한 것들을 보고, 가장 맛있는 것들을 찾아 먹고자 했는데 그럴 정신이 없었다. 모르겠다 싶은 어질어질한 마음으로 들어간 우육면 집에서 팔각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우리 몫의 우육면이 앞에 놓였다. 음식을 앞에 두고 둘은 결국 악수를 했고, 그때부터 여행은 점차 여행이 되어 갔다. 날씨는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추위에 약한 현지인들이 아니고서야 한국인이 패딩을 껴입을 날씨도 결코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다. 해가 비추었고 우리는 모르는 도시를 함께 걷는 즐거움을 생각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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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흔적은 아케이드에 있다. 도시의 외형, 특히 건물의 생김새는 그 지방 날씨의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비가 많이 내리는 곳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듯이 우리가 묵던 번화가 건물에는 대부분 아케이드가 있었다. 건물 외벽 1층에 천장이 이어져 있어서 비가 오더라도 비를 맞지 않고 건물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 구조였다. 건물 옆으로 쭉 이어져 있는 아케이드 옆으로는 음식점과 상점이 쭉 늘어서 있고, 하나하나 가게들을 살펴보며 걸을 수 있었다.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것 같은 그곳을 걸으면 우리가 처음 보는 음식과 처음 맡는 냄새와 비슷한 듯 낯선 사람들의 얼굴이 펼쳐졌다. 위로 솟은 도시가 아니라 옆으로 펼쳐져 있는 것 같은 도시에서, 걷는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 아케이드에 있었다. 깔끔하고 멀끔한 풍경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재료들이 널려 있는 것 같은 시내의 모습들. 나는 즐겨 보곤 했던 홍콩의 영화들을 괜히 생각해내며 마치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을 마주한 듯 기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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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매가 어딘지 느슨하게 내려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젠 체하며 가꾸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은 편안함. 바쁘게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풍기는 여유로움. 아케이드 사이를 돌아다니며 갑자기 먹고 싶어진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는 느낌. 내가 모르는 중국스러운, 분위기의 매력을 다시 발견한 것 같았다. 간장에 절인 메추리알에 고량주를 컵에 쏟아 먹는 즐거움. 원래 살아가던 말레이계 원주민들은 고산지대로 올라가고, 명나라 때 들어온 중국인들이 평지를 차지하고, 패배한 국민당을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다시 도시를 차지한 이 겹겹의 섬에서, 지난 시간의 층들이 한데 뒤섞여 풍기는 이 냄새. 그 섬 안에 있는 또 다른 개들의 섬. 나는 마치 그 섬에 사는 한 마리의 개처럼 킁킁 거리며 거리를 돌아다닌다. 이 모든 것이 가족의 오랜 추억으로 남을 것임을 예감하면서. 아케이드가 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듯, 기억은 우리의 걸음을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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