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와인이야기-13]

ⓒ위클리서울 /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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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재현] 가족 중에 코로나 확진자가 생겨서 지난 두 주간 재택 격리 생활을 경험했다. 갇혀 지내다 보니 창 밖의 풍경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잃는게 있으면 얻는게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며 시간을 보냈다.

격리가 끝나고 제일 먼저 집 주변 공원으로 달려갔다.
잎들이 다 떨어진 채 아직은 앙상한 모습이지만 봄이 찾아오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상상하
면서 평소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다.
나무들도 기억을 할까? 어떤 원리로 나무들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고 제 모습을 바꿀까?
와인이라는 선물을 주는 포도나무는 지금 이 시기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평소에 하지 않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확행’을 누렸다.
과거 포도재배 학교 유학시절 프랑스 포도원에서 실습을 했던 경험에 비추어 옛 기억을 되살
려본다.

매서운 겨울 추위가 채 가지 않은 2월, 포도원에서 농부들은 가지치기를 한다.
가지치기는 포도나무의 생장이 잠시 멈춘 겨울 휴면기에 이루어지는데, 수확이 끝난 포도나무
에서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가 목질화되는 추운 겨울 내내 가지치기를 한다.

가지치기를 하는 여러가지 이유 중의 한가지는 이렇게 함으로써 지나간 해의 제 역할을 다한
가지들을 걷어내고, 이듬해에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가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새싹의 수
가 정해지고, 바로 이 단계에서 농부는 자신에게 알맞은 수확량과 품질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다.

흔히들 열매를 따는 시기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열매의 수확은 앞서 이루어진
수많은 선택과 결정에 따른 결과물일 따름이다.
포도나무의 일년 살이는 매년 모든 포도원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생장주기
라고 하는데 일년 열두달의 주기동안 일어나는 각각의 변화와 그 변화가 다음 단계에 영향을
미치는 연쇄작용이다. 한가지만 따로 떼어놓고는 나무의 일년 살이를 이해할 수 없다.

3월이 되어 기온이 더 올라가면 포도나무에 수액이 돌기 시작하고 나무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다. 가지치기를 한 가지의 절단면에 수액이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는 4월에는 새순이 돋아나고, 영어 표현으로 이를 ‘budbreak’ – 새순
(bud), 돋아남(break) – 라고 부른다. 새순이 돋는 이 시기에 땅 밑에서는 새뿌리가 자라난다.

가지가 거침없이 죽죽 자라나는 5월을 기점으로 5월과 6월 사이에 꽃이 피어나며, 열매를 맺
기 위한 준비과정에 들어간다.

보통 꽃이 핀 후 100~120일이 지나면 열매를 수확한다.
앞선 시간들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물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이후 다시 추워지면 잎이 다 떨어지고 겨울잠에 들어가는 포도나무는 다음해를 기다린다.

이 짧은 지면에 포도나무의 일년살이를 모두 담아내기에는 필자의 지식과 전달력은 역부족
이다. 다만 쉼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거듭나기를 기억하면서 지금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이라
위로받고 싶다.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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