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어느새 피어난 매화
어느새 피어난 매화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바람이 분다. 심하다. 어제도 바람은 불었고, 대나무가 활처럼 둥글게 휘어질 정도로 악착스러웠다. 그제도 바람은 불었고,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도 없는 비닐과 종이 쪼가리들이 사방천지로 휙휙 미친 듯이 날렸다.

겨울이 지나갈 즈음이면 으레 바람이 온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도 거칠게 몇날며칠 마라톤 선수처럼 숨 가쁘게 몰아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비도 없었다. 눈도 없었다. 대충 계산으로도 석 달, 내지는 넉 달 동안 비다운 비 한 번 안 내렸고, 눈이 쏟아져야 할 계절인데도 희끗희끗 꽃잎이라도 날리듯이 몇 번 비치다가 말았다.

바다 건너 일본은 2미터도 넘는 눈이 쏟아져서 사회관계망이 완전 두절됐다지만, 우리 동네에 내린 눈은 2센티미터 정도가 최고였다. 2센티미터의 눈을 물로 환산하자면 1밀리미터도 채 안 될 것이다. 그나마도 두 번 아니 세 번이나 왔던가, 하여튼 눈다운 눈은 한 번도 없었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대한민국에서 식물은 겨울 한철 활동을 멈추지만, 그렇다고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게 오랜 동안 땅이 말라 있으면 수선화 등 구근식물은 보이지도 않는 흙 속에서 말라 죽어가고, 마늘이나 양파처럼 잎이 드러나 있는 식물들은 나 이제 곧 죽을 텐데 보이지? 하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생기를 잃고 비실거리며 이파리 끝을 땅으로 향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겨울 한철 지하수를 뽑아 올려 마당 도차에 뿌려준 횟수가 몇 번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마늘은 탐스럽게 잘 자라주었다. 분량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올해도 우리 집 마늘농사는 풍년을 예약했다는 느낌이다. 내가 잘해서 풍년이 예약된 것은 아니다. 우리 집 개가 열심히 거름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느새 피어난 산수유
어느새 피어난 산수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개똥이라는 거, 이것 참 효능감이 대단한 물질이다. 화목난로용 장작을 자를 때 나온 톱밥과 개똥을 버물려서 플라스틱 통에 담아 일차 숙성을 시키고, 다시 사료포대에 담아서 이차 숙성을 시키고 나면, 그 냄새가 제법 먹음직스러워서 입에 넣어보고 싶을 지경이 된다. 이것은 저기로 가서 섞이고, 저것은 여기로 와서 섞이고, 그렇게 섞이고 또 섞이는 동안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무너지고, 개똥이나 톱밥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새로운 물질이 생성돼서 나로 하여금 그것을 먹어보고 싶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개똥 거름은 따뜻하다. 닭똥 거름은 따뜻함을 넘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며 역한 암모니아 냄새를 푹푹 풍기지만, 개똥 거름은 그냥 순하게 따뜻하고 냄새도 먹음직스럽기만 하다. 이 먹음직스럽게 따뜻한 거름을 마늘은 매우 좋아한다. 마늘뿐만이 아니다. 고추와 가지와 오이와 토마토와 호박 그리고 블루베리와 감나무와 살구나무까지도 이 거름을 좋아하고, 잡초들도 당연히 좋아해서 마치 여기가 천국이라는 듯이 겨울에도 신나게 마구 뻗어 나간다.

찬바람이 거세게 몰아치고, 흰서리가 땅을 감출 듯이 내리고, 얼음이 꽁꽁 얼어도 개똥 거름 특유의 따뜻한 이불 속에 묻힌 잡초 씨앗은 아랑곳없이 싹을 내민다. 그리고 낮에 비치는 태양을 동력으로 후딱후딱 자라난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지 않고서는, 저기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봄이 오고 있다는 믿음이 없고서는 아마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기들 믿음을 따라서는 활동하는, 잡초들의 그 일관된 자기 확신의 품성이 나는 그저 부럽기만 하다. 그리고 또한 미안하다.

텃밭에서 풀을 뽑을 때 으레 드는 생각이 그것이다. 미안함. 오래 전 언제인가 생태학자 윤구병 선생의 산문집 ‘잡초는 없다’를 접하고서 못난 생각에 코웃음을 친 적이 있었다. 잡초가 없다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람, 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논밭으로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김매기를 했던 내게 잡초는 악귀 같은 존재였었다. 뽑아도 다음 날이면 또 나와 있고, 또 뽑아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나와 있는 잡초,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왜 이렇게도 그악스럽게 나오고 또 나오는가 말이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잡초를 뽑으면서 미안해하고, 그들이 피워낸 작은 꽃을 보면서 예쁘다고 칭찬하고 있으니, 돌아보면 뭘 몰라도 한참 몰랐던 시절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느새 피어난 수선
어느새 피어난 수선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잡초를 열심히 뽑아낸다는 것은, 일언이 폐지하고 자본주의에 완전 항복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내가 왜, 어떤 계기로 하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어떤 식물도 사람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시나브로 알아차리면서 아마 그런 결론에 도달해 갔으리라 추정은 된다. 제아무리 강한 독성을 지닌 식물이라도 다른 식물과 적당량 섞어주면 사람에게 매우 유익한 약초 내지는 반찬거리 혹은 한 잔의 차가 된다는 발견과 깨달음의 순간이 기특하게도 내게 있었던 거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목적이 매우 분명해서 선택과 집중을 날카롭게, 냉정하게 칼날처럼 해버린다는 점일 게다. 지금 당장 돈이 될 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서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돈이 안 되는 것은 가차 없이 멸절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결국은 인간 자신에게도 해로운 일이라고, 생각을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매년 마늘밭이나 고추밭에 다른 풀이 보이면 뽑아내고자 애를 쓴다.

올해는 그 시기가 조금 늦었다. 때를 놓친 까닭에 잡초는 뿌리가 깊이 뻗었고, 그 바람에 마늘이 통째로 딸려 나오기도 한다. 그 바람에 나는 정신이 없어져 버렸다. 한 시간인지, 두 시간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 동안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노라니 무릎이 시큰거리고, 허리가 아프고, 눈앞에서 노란 것이 오락가락 한다.

안 되겠다 좀 쉬자, 하고 일어나서 전후좌우로 팔다리 운동을 하고 있노라니 뭔가가 눈에 쏙 들어오는데 매화다. 매화가 꽃을 피워냈다. 어라, 저 녀석이 언제 피어났지? 너무 놀라서 기막혀 하고 있노라니 그 아래 수선화도 피어나 있다. 세상에, 너는 또 언제 피어났다니? 그러고 보니 산수유도 그 샛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냉이도 꽃을 피워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마늘밭에서 잡초라고 뽑아낸 식물의 태반이 냉이들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올해 냉이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 했다.

 

우리 집 마늘밭
우리 집 마늘밭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나는 그동안 무엇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던 거지?

선거다. 대통령 선거.

그것은 내게 설렘이었다. 희망이었다. 구체적으로 내게 어떤 이익이 있을 것인가 따위는 계산도 해보지 않았다. 관심을 집중하는 그 자체만으로 나는 설레었고,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 것이 내 안으로 쏙쏙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을 나는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거기 있기에 가능한 희망이었다.

그 사람. 우리 집 책방에 수많은 역사서가 있지만,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사람, 그 남자. 내게 있어 이재명은 보석이었다. 그런 사람이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시살만으로도 나는 영광스러웠다.

이른바 언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도 아마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언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고, 사람은 제아무리 거짓말을 천재적으로 잘한다 해도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저기에 숭숭 뚫려 있는 구멍, 허점, 어색함, 나처럼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 눈에 그런 것들이 안 보일 리 없었다. 게다가 나는 살아온 내력 상 언론이라는 것을 거의 신뢰하지도 않는다. 신문이나 방송을 가끔 보기는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말이 아니라 말 속에 숨어 있는 다른 말을, 간교한 속임수를 찾아내기 위함일 따름이다.

어쨌든 이상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언론이라는 것들은 왜 인간 이재명을 저리도 미워하고 싫어하고 혐오하고 징그러워할까.

나의 이재명 공부의 시작은 이와 같았다. 공부하는 동안 나처럼 깊은 의구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많다는 것을 알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이재명을 보석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재명의 정치철학을 한 단어로 규정하자면 억강부약일 것이다. 강한 자는 누르고, 약한 자는 띄워 올려서 평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것. 역사를 보면 이런 정치철학을 가진 사람이 꽤 있었지만, 일정 부분 권한을 갖게 된 뒤에는 대부분 잊어버리거나 기득권자들의 포위망을 뚫지 못해서 그만 포기해 버렸다. 그런데 이재명은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늘밭 부분
마늘밭 부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언론이라는 것들은 말 만들기를 잘해서 공정이다 정의다 등등 세상에서 듣기 좋은 온갖 말을 다 갖다 써먹기는 하지만, 자기가 써먹은 말을 믿지도 않거니와 뒤집기를 다반사로 하는 집단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강한 자들이, 부자들이 던져주는 푼돈이지 공정이나 정의 따위가 아니다. 그런데 이재명이 부자를, 강한 자를 적당히 눌러야 한다고 했으니, 예쁘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인류사에서 초기의 언론은 제법 사람다운 일을 하기도 했고,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싸우기도 했다지만,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그들은 돈밖에 모르는 바보가 되어갔다. 그렇게 스스로 몰락해 갔고, 지금도 열심히 몰락을 길을 걷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코믹하게도 언론 스스로는 아직도 그걸 모른다.

보석은 스스로 빛을 내기는 하지만, 화산재처럼 쏟아져 내리는 온갖 지저분한 티끌까지 방어하지는 못한다. 속절없이, 대책 없이 일단은 묻혀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보석 자신이 갖고 있는 빛의 힘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거기 어디에 보석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힘으로 보석은 결국, 끝내, 화산재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선거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 세상으로 풍덩 빠져들고 보면 도처에서 그런 함성이 들려온다. 혈기 왕성한 젊은 기운들이 내는 목소리가, 숨소리가 나를 울컥, 울컥 하게 한다. 미래는 당연히 그들의 것이다. 주인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무엇으로 막아낼 수 있으랴.

문득 이런 문장 하나가 생각난다. 언론, 너희는 이제 죽었다. 시인 기형도의 작품 중에 ‘사랑을 잃고 나는 쓴다’가 떠올라 오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지금 보석을 놓치고 마늘밭에 잡초나 뽑아내고 있는 중이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