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디자인=이주리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는 지방의 작은 소도시였다.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한 체 세월의 두께만큼 눌려있던 앨범 속 희뿌연 흑백 사진 같은 그 동네는 단층의 한옥들과 허름한 가게들이 질서를 지키며 즐비해 있었다. 아스팔트가 덧 씌워진 신작로는 버스가 다니는 큰 도로를 향해 뻗어 있었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량이나 정화조 차량, 그리고 엿을 파는 아저씨의 리어카만이 굴러다니는 바퀴의 전부였다. 우리 집은 신작로에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야만 다다를 수 있었는데 그 골목길에는 네 개의 집들이 서로 대문을 마주보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면서부터 열리는 네 개의 대문들은 그 집의 식구들이 모두 귀가를 해도 한동안 닫히지 않는다. 앞집에 사는 아이가 부모님께 야단 듣는 소리며 그 집의 TV소리도 공유가 되는 지척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 집인 듯 한 집 아닌 한 집 같은 정을 나누며 살았다. 대문을 사이에 둔 좁은 골목길은 우리들의 놀이터였으며 가끔은 골목길을 벗어나 신작로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저녁 어스름이 펼쳐질 때까지 놀았다. 아이들끼리 놀다가 뭔가 의기투합이 되지 않거나 토라질 일도 생기곤 한다. 그럴 땐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칠 수 있는 시간은 몇 발자국이면 충분하였다.

우리 집도 그랬지만 주변의 주택들은 모두 나지막한 단층의 집들이었는데 유일하게 집안에서 고저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니 빨래를 널거나 화분을 두는 옥상이다. 옥상에 올라서면 우선은 두 개의 긴 장대를 연결한 빨래 줄이 있다. 비가 오는 날만 아니면 그 빨래 줄에는 양말이나 속옷들이 항상 고꾸라져 있었고 골목길을 향하는 방향으로 작은 선인장 화분들이 뾰족한 가시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시야는 색달랐다. 앞집의 마당이 내 눈 아래에 있었고 옆집의 지붕은 손에 닿았다. 그렇지만 내려다보고 있으면 괜히 무섭기도 하고 어질어질 하기도 했다. 옥상의 바닥을 딛고 서 있지만 내 몸은 공중에 떠있는 것 같았고 옥상을 향하는 계단 몇 개만 올라섰을 뿐인데 다리는 후들거렸으며 이미 고소의 공포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동화 속 잭은 거인의 나라에 가기위해 키 큰 콩나무를 어떻게 기어 올라갔을까.

흔하지는 않지만 양옥집이라 불리는 2층 높이의 집도 있었다. 창문 위에 또 다른 창문이 있는 집. 창문 두 개가 위 아래로 서 있는 집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집 안에 또 다른 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기도 했다. 우리 집에는 옥상을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있었지만 양옥집에서는 또 다른 집의 공간으로 이동하기 위한 통행로로 그것도 집 안에 버젓이 존재했다. 집 위에 또 다른 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어린 나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가옥구조였으며 양옥집에 사는 아이는 소위 잘 사는 집 아이로 인식이 되어 선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건물들이 단층은 아니었다. 버스가 다니는 대로변에 우뚝 서 있는 대학교나 병원 같은 공공기관들은 적어도 3층의 높이로 된 건물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만 해도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이었고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대학병원도 3층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기억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모를 유년의 그 동네는 그냥 나지막하고 오밀조밀하며 무채색이지만 따뜻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곳이었다. 도시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는 건물도 고작해야 3층의 높이였고 도시의 어디에서도 눈에 띌 수 있도록 십자가를 세운 교회도 알고 보면 단층의 건물이었다.

그런 도시에 살면서 가끔 TV 뉴스에나 볼 수 있었던 서울의 모습, 그중에서도 63빌딩이 나오는 화면은 같은 대한민국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신세계였으며 그 위용은 가히 높이만큼이나 존경할 수밖에 없는 우람함 그 자체였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서울로 이사를 오고 얼마 후 우리 가족은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을 것 같은 여의도의 63빌딩을 근접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황금색 건물 외벽은 햇빛을 받아 신비로운 광선을 내뿜고 유려한 곡선으로 하늘 높이 올라선 모습은 마치 공주님의 우아한 드레스 자락처럼 보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높이에 저 빌딩이 정말 63개 층이 맞는 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 졌다. 손가락을 짚어가며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 마다 목은 뒤로 접혀지고 허리는 꺾이기 시작했다. 결국은 63층까지 다 세어보지도 못하고 젖혀진 목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무수히 흘러갔고 우리나라 경제는 엄청 발전을 했으며 건설 시공의 기법도 나날이 새로워졌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마천루였던 63빌딩은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주변의 회색빛 고층 건물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거대한 회색의 군단은 군데군데에서 튀어 올랐다.

몇 년 전 유년을 보냈던 도시를 다시 찾았을 때도 예전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올라 앉아 있었다. 아지랑이는 더 이상 피어오르지 못했고 대신 아파트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바람만 소용돌이 칠 뿐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에서 창문너머 멀리 바라보면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산꼭대기가 있다. 정상의 모습은 항상 같지만 느낌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다. 봄에는 푸르름을 뿜어내고 여름에는 청량함을 던져준다. 가을에는 그윽함을 겨울에는 고독한 바위의 실체를 드러 내기도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산꼭대기를 향해 치달아 오르는 불청객이 나타났다. 하룻밤 자고 나면 어제보다 조금 더 높아진 시꺼먼 물체가, 다음 날이면 또 다른 높이가 되고 또 다른 날이면 어느새 생경한 모습으로 점점 더 산꼭대기를 향해 위협하는 모습은 마치 거인이 살고 있는 콩나무가 자라는 모양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나서 창문을 바라보면 예전의 청량하고 푸르른 산의 모습 대신 지하세계를 뚫고 올라온 듯 한 철골들이 보는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다. 동화 속 거인의 콩나무가 이런 속도로 자라났을까. 하룻밤사이에 미친 듯이 자라 올라 결국은 끝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의 높이를 자랑하며, 세어보다가 끝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주저앉아야 했던 63빌딩보다 더한 높이로 창밖 시야를, 내 마음을, 고고한 산의 위용마저 눌러버리는 저 콩나무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곳 또한 하늘을 향해 치닫던 높이로 건설된 아파트가아니던가. 누군가의 시야를 가리고 어떤 이의 추억을 삼켜버린 채 건설된 아파트에 살고 있는 나는 어쩌면 콩나무 위에 살고 있는 괴팍하고 욕심 많은 거인일까.

하루가 다르게 콩나무가 자라고 있는 저 곳은 과거 집창촌으로 불리던 곳이며 지금은 초고층 주상 복합 건물 4개동이 건설 중이다. 허름하고 우범지대였던 구역을 새롭게 재정비한다는 측면에서 반대할 이견은 없다. 도시는 계속 발전을 해야 하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변화와 경제적인 이득들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하늘로 치솟는 고층건물을 건설하는 것이 발전의 척도가 될 수는 없으며 더구나 주변의 시야를 밟고 위협적으로 올라서면서 개발이라는 명분을 들이댈 수는 없다고 본다.

건설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시환경정비사업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역사와 애환을 보호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향상이나 개발 위주의 방식에서 벗어나 그 동네를 터전삼아 버티고 살아왔던 이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집창촌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개선할 전략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서이다. 단기간에 끝내버리는 도시개발사업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공공의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발전이라면 꼭 고층의 건물이 아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설현장 근처를 지날 때 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푸른 하늘과 함께 주변의 조화로운 도시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다. 고공 크레인은 앞으로 얼마나 더 하늘을 휘젓고 다녀야 할까.

거인이 살고 있는 콩나무는 동화 속에서만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기에 콩나무가 자라고 있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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