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현의 와인이야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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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재현] “100점 많이 받아 보셨나요?”

필자의 기억으로는 중학교까지는 100점 만점에 몇 점하는 식으로 평가를 받아왔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수능점수 만점은 100점보다 더 큰 수였지만, 평가 점수는 백분율로 환산되어 100% 중에 전국 석차 몇 % 하는 식으로 평가를 받았던 터라, 100이라는 숫자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적이고 감히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준다. 동시에 간절한 염원이기도 했다.

정량화. 주어진 문제가 주관식이건 객관식이건 개의치 않는다. 채점이 끝나고 점수를 받아 드는 순간에는 항상 숫자로 표현된다. 손에 쥐어진 숫자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당위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의를 제기하자니 나 혼자만 공정한 절차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모두가 받아들이니 객관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는 숫자로 표현되는 것에 불필요하게 과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100점은 우리 모두 열심히 노력하여 도달해야 하는 진리이고, 100점 스케일은 가치중립적이고 불편부당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100점 신화’에 대한 필자의 정리되지 못한 찝찝한 기분은 학창시절에서 끝나지 않고 생업을 이어가는 지금도 여전하다.
또 다른 질문 한가지. (와인 업계에서 이름만 대면 권위를 인정받는 와인 비평가들에게) 100점 만점을 받은 와인들은 ‘진리’인가? 모든 와인 생산자들이 따르고 본받아야 하는 모범이고 이상인가? 100점 와인이라는 이유로 더 높은 가격을 매기고, 소비자는 100점 받은 와인이니까 당연히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불행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와인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이유인 다양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효율성’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일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하게 많은 와인들을 미리 먹어보고 ‘객관적’으로 경험을 정리해둔 와인 비평가들의 정량화된 평가를 따르는 것이 시간/비용 대비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구매후기를 읽고 추천 상품’을 구매할 수는 없다. 와인은 가전제품이나 가정용 공구 세트가 아니므로.

와인은 먹거리다. 무엇보다 먹는 사람의 개인 취향과 경험이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먹거리라는 점에서 생각을 조금 더 넓히면 와인 평가는 음식 문화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와인을 마시고 평가하는 행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문화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효율성’은 잠시 잊어도 좋겠다.

업계 사람들의 전문적인 와인 시음/평가는 결코 객관적 과학이 아니다.
업계에서 대체적이고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기준에 따라 시음을 한 후에 정형화된 표현들을 사
용하여 평가를 내리는 기술(technic)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100점 (혹은 20점 만점이든) 스케일의 정량적 평가가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위에서 언급한 기준에 따라 시음한 와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까베르네 소비뇽 품종이 주 품종인 미국의 나파밸리 와인으로 타닌이 풍부하다. 타닌이 풍부하지만 거친 느낌은 없다. 향들은 섬세하거나 흐릿하지 않고 상당히 직설적이다. 블랙베리, 송진, 바닐라, 감초, 초콜릿 향이 진하다. 풀바디의 와인인데, 맛은 묵직하고 부드럽다.” 여기까지는 정해진 기준에 따른 기술(description)이다 - 물론 여기서도 내 감각이 인식한 맛과 향들을 묘사하는데 주관이 상당히 개입되었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렇게 인식한 와인을 100점 만점 중에 몇 점으로 평가할 것인가?
70점을 주었다고 하면, 나는 이 와인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으로 이 와인의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요소가 아쉽거나 과하거나 그도 아니면 짜임새가 부족하거나.
어찌됐든 평가자인 나의 가치 판단이 깊숙이 들어있다.
100점을 주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앞의 경우와 반대의 이유로 가치중립적이지 못하며, 이후에 닮은 유형의 와인을 만났을 때, 비슷한 판단을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만약 와인을 평가한 사람이 이름만 대면 권위를 인정받는 와인 비평가라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꽤나 많은 와인생산자들이 그 권위자의 ‘가치 판단’에 맞추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다.

그럼 와인 책들은 볼 필요도 없고, 이 칼럼을 읽을 이유도 사라지며, 와인 비평가들의 시음 노트를 살펴보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되는가?
아니다. 그 반대다. 오히려 다양하게 정보를 획득하고 얻은 정보들을 꿰어 자신만의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기연가미연가하는 얘기들에 흔들리지 않고, 일반화한 개인 취향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박재현 (주)인디펜던트리쿼코리아 전략기획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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